■ 97. 금화 □
형원 선배의 활약에 UN팀은 일시에 벙어리가 되었다.
'아마 지금쯤 방송화면에는 자막이 여기저기 달리고 있겠지.'
형원 선배를 띄우고, 여러 분란을 조장하는 그런 자막들.
난 이제 녹화 중에 방송까지 예상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작가와 PD들은 싱글벙글하며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누가 이기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저 우리가 많이 싸워주기만 하면 그 뿐이다.
UN팀의 리더인 강찬규는 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형원 선배에게 대꾸하진 못했다.
"자, 그럼 자기 소개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이제 두 번째 경연의 주제와 규칙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황재국 PD는 책상 위에 도면을 펼쳤다.
지금 우리가 있는 건물의 도면이었다.
"들어올 때 모두 보셨겠지만, 지금 이 곳은 삼청동의 미술 전시관입니다. 꽤 괜찮은 곳이죠."
정말 그랬다.
이 동네에서 이 정도 미술관에서 전시하려면 꽤 돈을 쓰거나, 경력이 있는 작가여야 한다.
이제 겨우 대학생인 우리에겐 여기서 전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 아트에 참가한 충분한 보람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게 얼마나 제대로 된 전시냐는 것이겠지만.
"저희 컬처온이 이 건물의 1층과 지하를 통째로 빌렸습니다. 꽤 큰 투자였죠. 그리고 1층을 정확히 반으로 나눴습니다. 이번 경연의 주제는 '그 공간을 여러분의 작품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준비기간은 일주일. 작품의 종류도, 주제도, 방식도 모두 자유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재료값으로 현금 100만원을 지원해드릴 예정입니다."
재료비까지 준다니.
정말 컬처온에서 작정하고 이 쇼를 만들었다는 게 짐작이 갔다.
여러모로 영 아트는 젊은 예술가에게는 횡재였다.
"가벽과 레일 조명도 전시장에 준비되어 있으니 얼마든지 가져다 쓰시면 됩니다. 실내 공사가 별도로 필요할 경우, 그것까지 지원해드릴 계획입니다. 다만, 공사에는 시간이 소요되니 미리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전시장 도면을 꼼꼼히 살펴봤다.
꽤 넓은 공간.
여섯 명이 달려들긴 하겠지만, 일주일은 짧다.
괜찮은 작품을 준비하려면 정신없이 매달려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여러분이 7일간 준비하는 모든 장면들을 저희가 촬영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질문도 할 겁니다. 그 점은 참고해주시고요. 밤늦게 작업하시는 건 상관없는데, VJ들의 퇴근 시간도 고려해주십시오. 물론 농담입니다."
그렇게 썰렁한 농담도 한 번 하고.
"그리고 또 하나 심사 방법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황재국 PD의 설명에 맞춰, FD가 주황색 공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렸다.
"7일, 오늘도 포함이니 정확히 6일 반 정도겠네요. 7일 후에 여러분들의 준비가 끝나면 두 팀의 전시관이 동시에 오픈 될 겁니다. 이 상자 안에는 60개의 공이 있습니다. 서른 명씩 두 팀이 두 전시를 관람하고, 맘에 드는 팀의 전시에 이 공을 넣을 겁니다. 순서가 중요할 수 있으니 처음 30명은 UN 팀의 전시부터, 두 번째 30명은 팀 수진의 전시부터 관람하게 될 겁니다."
그때였다.
UN팀의 리더인 강찬규가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시죠."
"그건 불공정합니다."
"어떤 점에서요?"
"저희는 직접 서류 전형을 통해 나중에 참여가 확정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대 팀은 사전에 참여가 확정되었고, 홈페이지에 인터뷰도 먼저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면에서 아무래도 팀 수진이 저희보다 인지도가 높을 겁니다. 게다가 한국대니까! 관객들은 한국대가 더 대단할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나름 일리 있는 의견.
하지만 형원 선배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건 관객들의 수준을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요?"
"그···그게 아니라."
분명 처음에는 UN팀이 정의의 사도였고, 한국대 팀이 미술계의 악당이었다.
하지만 형원 선배의 언변으로 이제 악당은 UN팀으로 바뀌고 있었다.
황재국 PD가 또 한 번 웃으며 중재했다.
"네. 확실히 그런 지적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UN팀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관객들은 자기가 마음에 드는 전시의 상자에 공을 넣습니다. 다만 공의 수는 점수가 아니라, 참고 자료일 뿐입니다. 이 경연의 심사는 메인 심사위원 세 분과 초대 심사위원 세 분이 해주실 겁니다. 공의 개수는 심사위원 분들이 오직 참고 자료로만 쓰실 겁니다. 그분들은 저명한 평론가들이니 UN팀도 신뢰할 수 있으시겠죠?"
썩 내키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지만, 강찬규는 결국 수긍했다.
"자, 그럼 일어나시죠. 다 함께 올라가서 전시 현장을 둘러보시고, 아이디어를 모으십시오. 타이머는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럼 젊은 두 팀의 훌륭한 작품들을 기대하겠습니다."
* * *
1층의 전시 공간을 반으로 나눴다.
그 벽면 너머에는 팀 수진이 있고, 나머지 한 쪽은 UN팀이 맡았다.
UN 팀은 배정받은 전시장의 구조를 확인하고, 자로 벽의 높이를 측정했다.
"알지? 우리의 역할이 커."
먼저 팀의 리더인 J대 강찬규가 팀원들의 의지를 다졌다.
"이건 우리들을 위한 기회이기도 하지만, 우리 후배들을 위한 기회이기도 해. 한국대 놈들을 공개적으로 조져버리자. 그림은 수능 성적순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자."
카메라가 잠시 멀어진 틈을 타 강찬규가 과격한 단어를 사용했다.
그만큼 꼭 이기고 싶었다.
"맞아. 그리고 우린 방송에서 벌써 몇 번이나 선언했으니까 지면 큰일 나. 배수진을 친 셈이지."
"이길 수 있어. 그림 짬밥은 누구한테도 안 밀리니까."
강찬규를 비롯해 모두 의지가 불타올랐다.
"이 공간을 가득 채워라. 이거 바쁘겠는걸? 가벽을 촘촘히 세우면 그림을 더 많이 걸 수 있을 거야. 그럼 공간을 가득 채우라는 경연의 주제와도 부합되고."
"그럼 아크릴로 가야겠지? 아크릴은 빨리 마르니까. 준비 기간 이틀 잡고, 하루 한 점씩이면 일인당 다섯 점. 빡세게 나가자. 질로도 양으로도 모든 면에서 한국대 팀을 압도하는 거야."
"다섯 점은 너무 많지 않아?"
그때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강찬규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어이, 모두 모여 봐. 나한테 필승의 전략이 있어."
"필승?"
예술에서 필승이라니.
의문이 들긴 했지만, 강찬규가 너무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자, 내 말을 들어봐. 모두 자본주의랑 공산주의 알지? 그리고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유도 알고 있지? 바로 자유경쟁이야."
여기까지는 정말 모두 아는 이야기.
그래서 어쩌자고?
"전시 공간을 일곱이나 여덟 구역으로 나누는 거야. 그리고 우리끼리 경쟁하는 거지. 그래서 가장 많은 작품을 완성한 사람에게 더 넓은 공간을 부여하는 거야."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럼 동기 부여가 될 것 같아."
"한국대 팀 봤지? 남자 셋, 여자 셋이야. 분명 거기는 서로 챙겨주고, 걱정해주느라 경쟁이 없을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 강찬규는 왠지 주먹을 꾹 쥐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우린 경쟁을 통해서 우리의 생산성을 높이는 거야."
"찬성이야. 각자 자기 학교를 대표하는 기분도 들고. 방송에도 나가니까 긴장감도 들 것 같아."
그런데 D대 송혜연이 손을 들었다.
"잠깐, 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
"나는 동양화과잖아. 그런데 나도 아크릴을 그려야 해? 아무래도 아크릴이 미숙해서 난 속도를 못 낼 것 같아. 난 동양화로 해주면 안 돼?"
그러자 옆의 H대 안정효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모두 아크릴인데 혼자 동양화면 생뚱맞잖아. 그리고 너만 너무 튀고. 우리끼리 경쟁하기에도 곤란해."
"하지만 아크릴은 그려본 적이 없는데!"
그러자 보고 있던 강찬규가 결론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 민주주의니까 다수결을 따라야지. 힘들겠지만, 네가 다수를 따라서 아크릴로 그려줘."
송혜연은 결국 팀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작은 갈등은 있었지만, UN 팀은 각오가 대단했다.
* * *
반대 편.
팀 수진 측 진영.
우리는 1층으로 올라가 우리가 배정받은 공간을 살펴보았다.
작품으로 채워지기 전의 하얀 벽면들.
마치 시간과 공간이 멈춘 별개의 세상 같았다.
이런 본격적인 전시는 처음이라 묘하게 떨려왔다.
내가 정말 화가가 되어가는 중이구나, 그런 실감이 났다.
수진 선배와 태민은 벽면을 따라 같이 걷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전시 공간에 익숙해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유나와 정화 선배는 어디서 구했는지 줄자를 꺼내 벽의 높이를 재고 있었다.
'역시 야무진 사람들.'
형원 선배와 나는 전시장 가운데 서서 주위를 살펴봤다.
'나이를 먹고 나서 좋은 점은.'
첫째는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어릴 때는 무작정 계획 없이 달려들곤 했다.
나이를 먹고 나서는 성급하게 굴 수록 나중에 더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둘째는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
어릴 땐 내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다보면, 나 역시 세상에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서 가끔 남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어려운 세상일도 쉽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상조는 한국대 미대생들이 그림 실력은 떨어지면서 책만 파고 드는, 지나치게 아카데믹한 미대생을 가장한 학자들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상조 말고도 모두 비슷하게 생각할 거야.'
영 아트의 메인 심사위원 중 하나인 국선정 교수도 비슷하게 말했다.
[ 한국대라면 고지식하고 지루한 사람들이 떠오르는데······]
'그렇다면 그 기대를 기분 좋게 배신해보면 어떨까? 즐겁고, 장난스럽고, 재치 있는 한국대를 보여준다면?'
다행히 우리의 진짜 모습도 그랬다.
나는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봤다.
잘 웃고, 착하고, 영리한 녀석들.
이번 전시에서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하기 보다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어떨까?
하긴, 세상의 모든 전시는 사실 예술가의 모습을 얼마나 솔직히 보여주느냐가 성공의 관건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 경연 심사의 방식······'
PD는 단순히 참고 자료일 뿐이라고 했지만, 분명 관객의 평가는 중요하다.
관객을 만족시켜야 한다.
하지만 관객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
어쩌면 관객의 평가는 함정일 수도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형원 선배가 옆에 서 있었다.
"형원이 형. 감동이란 게 뭐죠?"
"응?"
"형은 소설가잖아요. 어떻게 독자를 감동시키죠?"
"나?"
평소에는 장난스런 사람이었지만, 내가 진지하게 묻자 형원 선배는 고민에 빠졌다.
우리가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멀리 있던 나머지 멤버들도, 하나 둘 가까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형원 선배가 대답했다.
"내 경우를 살펴보면, 감동을 주려고 쓴 글은 대부분 실패했던 것 같아. 너무 작위적이었어. 하지만 감동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쓴 글은 의외로 잘 먹혔던 것 같아. 몰입감이 중요한 게 아닐까? 감동이란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주인공이 대신 해줄 때 생기는 게 아닐까?"
몰입감이라······
알 듯 모를 듯한 대답이었다.
우리의 대화가 답답했는지 정화 선배가 말했다.
"전시장이 꽤 넓어. 가벽을 세우면 벽들이 더 많아질 테고. 이 전시장을 작품으로 채우는 게 이 경연의 주제니까, 가득 채우려면 진짜 정신없이 바쁠 것 같아."
작품으로 이 전시장을 채운다.
우린 서양화과 학생이다.
그래서 작품이라면 흔히 그림부터 생각한다.
'그것은 UN팀도 마찬가지겠지.'
얼핏 살펴본 상대편 자료에 따르면, UN 팀은 여섯 명 중 네 명이 서양화과였다.
'그림이라······'
6일 준비한 그림으로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과연 그림이 정답일까?
"정화 누나. 그리고 모두들 이리 모여 봐요. 혹시 이 이야기 알아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 커다란 카메라가 다가와 내 옆얼굴을 찍고 있었다.
음.
카메라를 의식하니 갑자기 목소리를 부드럽게 내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는 어렸을 때 읽은 짧은 동화를 말했다.
"옛날에 한 왕이 있었대요. 그 왕은 세 아들 중 가장 지혜로운 한명에게 왕국을 물려줄 생각이었죠. 그래서 세 아들에게 금화 한 닢씩을 나눠 주며 말했어요. 자, 오늘 밤이 될 때까지, 이 금화를 가지고 궁전의 가장 넓은 방을 가득 채울 것을 구해 오거라."
여기까지 말하고, 모두 내 이야기를 잘 듣고 있는지 한 번 살펴봤다.
그리고 카메라도 나를 잘 찍고 있는지 한 번 점검했다.
"아무튼, 첫째 아들은 짚단을 사서 방을 빈틈없이 채웠죠. 짚단은 싸니까, 금화 한 닢으로 충분했죠."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김태민이 끼어들었다.
"내가 들은 이야기는 솜이었어. 첫째 아들은 솜으로 방을 가득 채웠어."
"그, 그랬구나."
이 녀석.
모처럼 내 단독 풀샷을 방해하다니.
형원 선배에게 뒤쳐진 인기 순위를 만회할 좋은 기회였는데.
그렇게 머뭇거리는 사이 수진 선배가 이야기를 정리해버렸다.
"나도 그 이야기를 알아. 막내아들은 촛불을 가져와서 방을 채웠지."
"맞아요. 금화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대신 촛불을 가져와서 넓은 방을 빛으로 채웠죠."
정화 선배, 유나, 형원 선배.
세 영리한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일리 있어.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느끼했지만, 분명 괜찮은 생각이야."
"맞아요. 촬영을 의식해 너무 장황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괜찮은 아이디어 같아요. 그림으로 이 공간을 채우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해요. 그리고 서양화과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는 건 너무 재미없어요."
유나까지 동의했다.
그리고 형원 선배도.
"그래, 그림 말고 다른 것. 관객들을 전시에 몰입시킬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보자."
역시 팀 수진은 호흡이 척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