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96화 (96/203)

■ 96. 첫눈 □

학교는 학교대로 기말고사로 바빴고, 일은 일대로 바빴다.

오늘 하이 유나의 새 사무실로 이사했다.

처음부터 넓은 오피스텔로 구한 게 지금의 사무실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변수 '영 아트' 때문에 규모가 미친 듯 커져버렸다.

새로 뽑은 직원들을 위한 사무실과 탕비실도 필요했고, 점점 늘어나는 재고를 위한 창고와 선반도 필요했다.

그리고 실내 촬영 스튜디오도 있어야 했고, 주차 공간도 추가로 필요했다.

다행히 신들린 매출 덕분에 사무실 비용은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의 기세를 얼마나 유지하냐는 것.'

아직 첫 녹화는 방송을 타지도 않았다.

첫 경연이 2주.

2차 경연도 2주.

우리는 4주 방송을 확보했다.

만약 2차 경연도 이긴다면 최소 6주 이상 방송을 타게 될 것이다.

그동안 하이 유나는 더 성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방송이 끝나면 내가 입대하게 된다.'

나는 공익이니까 포항에서라도 하이 유나를 지켜보고 감독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직접적인 경영은 힘들어질 것이다.

내 입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인력도 확충해야 하고, 회사의 시스템도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강력한 성장 동력도 마련해야 했다.

의류 자체 생산은 아직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동대문의 전문 상인들도 매번 모든 상품을 성공시키진 못해. 의류 자체 생산은 생각보다 위험 부담이 커. 지금까진 운도 좋았고 또 기본 상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어. 앞으로 정기적으로 계속 히트치진 못할 거야.'

평범한 회귀자였던 나는 이제 점점 노련한 기업가가 되고 있었다.

원래 사업을 시작한 동기는 단순했다.

돈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니고,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특히 하이 유나는 유나와 얽혀 있어.'

동대문에는 연인끼리 부부끼리 쇼핑몰이나 옷 장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아주 흔했다.

하지만 그들의 결말은?

원래 장사는 성공하는 경우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장사가 실패하면 커플까지 깨지는 경우도 흔했다.

물론 유나와 나는 커플은 아니지만.

나는 일도, 유나도 전부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책임감.'

지난 번 어린이 공부방에 방문한 이후로 나는 공부방에 아이 옷과 장난감을 후원했다.

재고가 아닌 새 옷으로.

그리고 가능하면 앞으로도 계속 후원하고 싶었다.

나는 '회귀'라는 남들이 누리지 못 할 특권을 얻었다.

그렇다면 그 이익을 순전히 나 혼자 누리는 게 옳은 일일까?

어쩌면 나는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옳은 일에 써야 할 의무가 있는 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호랑이 등에 타고 있었다.

절대, 어설프게 호랑이 등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사업을 키워볼 생각이었다.

돈도 벌고, 좋은 일도 하고, 덤으로 유나까지 확실하게 붙잡을 것이다.

그리고 밤에 텅 빈 오피스텔로 돌아왔더니 조금 허전했다.

이젠 이 넓은 공간이 순전히 내 자취방이 되고 말았다.

띵동.

오피스텔 초인종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한철이까지 팀 수진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응? 각자 퇴근하더니 왜 다시 모였어요?"

"우리가 불러 모았지. 종강 파티하자. 사무실 이전 파티도 하고."

정화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모두 묘하게 들뜬 것 같았다.

파티야 나쁠 것 없지만, 이 들뜬 표정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나가 나를 창가로 끌었다.

그리고 블라인드를 걷으며 말했다.

"밖에 눈 와. 바보야."

사무실 들어올 땐 몰랐는데, 돌아와서 짐을 치운 자리를 청소하는 동안 눈이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수진 선배랑 같이 퇴근한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내가 눈이 반갑다니.'

나이 들고서는 눈이 내리면 출근 걱정, 무릎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 스무 살이었다.

나폴 거리는 첫눈을 보며 나 역시 조용히 설레었다.

"그래요, 파티해요."

아, 맞다.

그리고 나는 유나와 태민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생일 때 주려고 샀는데, 눈 오는 김에 미리 줄게."

유나는 내가 내민 커다란 쇼핑백을 받았다.

"화장품이야."

"바보야, 화장품을 한꺼번에 뭘 이렇게 많이 사? 몇 년은 쓰겠다."

유나는 나를 나무라면서도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비싼 걸 사서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유나는 이 화장품들이 얼마나 비싼 건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역시 어린애였다.

대신 옆에서 정화 선배가 브랜드 이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쉿!'

하지만 내가 신호를 보내자 입을 다물고 모른 척했다.

그리고 김태민.

시무룩.

내가 서점 로고가 찍힌 쇼핑백을 내밀자, 김태민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책이야? 잘 읽을게."

누가 들어도 가라앉은 목소리.

"한 권 꺼내서 펼쳐 봐."

김태민은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허어억!"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럴 수가! 책 안에 공룡이 들어있어!"

이렇게 단순하다니.

그런데 놀란 것은 김태민 뿐만이 아니었다.

팀 유나 세 명과 형원, 한철까지 다 같이 팝업북에 달려들었다.

"어, 뭐야 이거? 완전 신기해!"

"대박! 완전 예뻐!"

"어이! 누나! 조심해서 만져요! 모두 손 떼요! 내 책이니까!"

아무튼 첫눈 오는 날, 두 선물은 성공적이었다.

"노래방! 사장님 노래방 가요!"

그리고 수진 선배가 옆에서 방방 뛰었다.

수진 선배는 평소엔 누나처럼 굴다가 자기가 필요할 때는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사람들이 지난 회식 이후 노래방에 재미를 들린 것 같았다.

"그래요. 가요."

그렇게 우린 눈 내리는 겨울 밤, 외투를 걸치고 노래방으로 향했다.

친구들과 있어서 춥지는 않았다.

걸어가는 동안 유나가 내 옆으로 왔다.

"우리 입시 치는 날도 눈 왔었잖아. 벌써 1학년이 끝이라니."

그야 뭐, 겨울이니까.

입시 날, 눈 때문에 모두들 엄청 고생했었다.

그 사람들 안에 유나와 김태민이 있었다니.

소중한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꼭꼭 숨어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우린 그 사람들 틈에서 신기하게 친구와 가족을 발견해 낸다.

"유나야. 고마워. 지난 1년 동안 함께 해줘서."

"내가 고맙지. 화장품도 잔뜩 사주고."

"내 생일은 3월이야."

그리고 노래방에 도착했다.

첫눈 덕에 신난 건지.

아니면 맥주와 새우깡 덕에 신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두 번째라 노래방에 익숙해진 건지.

지난 회식보다 오늘은 다들 더 즐겁게 놀았다.

수진 선배는 노래 부르며 소파에 올라가 춤도 췄다.

'저 춤을 방송에서 추게 한다면 쇼핑몰 일일 매출이 1억을 돌파하지 않을까.'

노련한 사업가이자 치밀한 중년 남자인 나는 이 와중에도 사업을 구상했다.

수진 선배가 즐겁게 춤을 추자 김태민도 탬버린을 들고 같이 춤을 췄다.

팝업북을 받은 이후, 김태민도 한껏 들뜬 모양.

'태민이는 방송에서 춤을 못 추도록 막아야겠군.'

모두 즐거워하니 나도 뿌듯했다.

그래서 모처럼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주로 노래방에서 빤한 노래만 부르는 타입.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고, 내 차례를 넘긴다.

하지만 하루 정도는 진심으로 놀아도 괜찮겠지.

가면을 벗는 기분으로 노래방 기계에 애창곡을 입력했다.

내 솔직한 노래.

내 솔직한 모습.

잠시 후.

"헉. 누구야? 누가 이 노래 입력한 거야?"

갑자기 뜻밖의 전주가 흐르자 정화 선배가 소리쳤다.

"뭐지? 누가 실수로 입력한 건가?"

수진 선배가 무심코 취소를 누르려는 순간, 내가 그 손을 막았다.

"제 노래입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나의 구슬픈 목소리.

중년 회귀자의 애절한 목소리가 노래방에 울려 퍼졌다.

나도 어릴 땐 이런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자, 자연스레 뽕짝과 트롯에 귀가 열렸다.

나도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불러보고 싶었다.

"먼 훗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서로가 헤어지면 모두가 괴로워서 울 테니까요."

노래가 끝났을 때, 정화, 수진 선배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껏 수진 선배가 춤까지 추며 띄워놓은 분위기를 내가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었다.

형원 선배와 한철이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쟤, 담궈라."

형원 선배가 지시를 내리면 한철이가 출동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주원이는 이런 노래 좋아하는 구나. 그럼 나도 한 곡 불러줄게."

유나가 리모컨을 쥐고 노래를 입력했다.

그리고 탬버린을 치며 어설픈 춤과 함께 노래를 시작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아직 알 순 없지만, 인연이 끝난 후에 후회하지는 않겠지. 알 수 없는 거잖아."

유나의 예쁜 목소리가 울리자, 노래방 안의 살벌한 기운이 증발했다.

그리고 유나의 노래에 맞춰 다시 다 같이 춤추기 시작했다.

"쏘오 쏘오!"

어느새 형원 선배랑 정화 선배가 화음을 넣고 있었다.

"사랑을 하면서도~ 후회해도 한평생을 살 사람아. 정 주고 사는 인생 힘들어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이 노래는 또 어디서 배운 건지.

유나의 목소리는 정말 눈 내리는 날 마법 같았다.

덕분에 나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린 다 같이 노래방에서 신나게 새벽까지 춤추고 놀았다.

맥주와 새우깡만 있으면 밤새도록 노래할 수 있었다.

* * *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우린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마지막으로 전의를 다졌다.

그리고 사무실 밖에는 우리를 픽업하러 온 승합차가 대기 중이었다.

이번 녹화는 UN팀과의 1:1 매치.

두 팀 중 한 팀만 올라간다.

미대 동아리 연합인 UN팀은 1차전 시작 전부터 공공연히 우리를 경쟁자로 지목했다.

'한국대에 맺힌 게 많은 모양이군.'

우리는 한 번 경연에서 이길 때마다 2주간 방송 출연을 보장 받는다.

아직 첫 방송 전이다.

하지만 방송 될 때마다 하이 유나의 매출이 미친 듯 오를 게 확실했다.

그러니 반드시 이겨야 하는 승부.

물러설 곳은 없다.

"모두 파이팅!"

"파이팅!"

우린 한 번 기분 좋게 외치고 차에 올랐다.

승합차는 우리를 삼청동으로 데려갔다.

차에서 내리자 김수희 작가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몇 개 장소가 있었는데요, 피디님이 제일 좋은 장소를 드린 거예요."

"정말요?"

김수희 작가가 살짝 말해줬다.

이제 김수희 작가는 우리 편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짐작하시겠지만, 이번엔 한국대와 다른 대학의 대결 구도로 편집할 거예요."

"고마워요."

"뭘요. 응원할게요."

역시 한국대 vs 대학 연합의 구도.

내가 PD라도 그렇게 할 것 같았다.

'그럼 조심해야 해.'

한국인들은 한국대를 동경하면서도 미워한다.

특히, 나는 악역 컨셉을 자처하고 있었다.

'같은 발언이라도 한국대가 부각되면 안 좋게 비칠 수도 있어.'

그리고 우리는 건물의 지하로 안내받았다.

그곳엔 큰 탁자가 있고, 상대편인 UN팀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와 작가들도 벌써 대기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2차전 진행을 맡게 된 황재국 PD입니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서로 인사하고, 각오를 들어보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먼저 UN팀"

PD가 지목하자 UN팀의 리더가 마이크를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J대 서양화과 3학년 강찬규입니다."

"2차전 상대로 팀 수진을 지목하셨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한국은 현대 미술의 역사가 짧습니다. 그래서 그림에 값을 매기고, 미술 시장의 체계를 만들기 위해 권위에 의존하는 방법을 써왔습니다. 덕분에 한국대 출신들이 미술계에서 자리를 잡고 기득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잘못된 풍조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방송을 통해, 학벌은 학벌일 뿐이며, 그림에서 학벌은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미술 학원 아르바이트에서도 한국대 생들은 더 높은 보수를 받습니다. 실력이 아니라 학벌로 특권을 누리는 거죠."

"그렇군요."

그리고 황재국 PD는 마이크를 우리 팀에게 넘겼다.

누가 그들의 공격에 대답할 것인가?

나는 몸을 사리기로 했다.

그리고 형원 선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형원 선배는 튀는 발언을 하면서도 심각하게 들리지 않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

형원 선배라면 안전할 것이다.

형원 선배는 마이크를 쥐고 씨익 웃었다.

"한국대와 겨루고 싶다면 상대를 잘못 고르신 듯합니다. 저희는 팀 한국대가 아니라 팀 수진이니까요. 저희 역시 잘못된 관습과 싸우고 싶습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우리의 학교로 먼저 단정 짓는 것 역시, 젊은 예술인이 벗어야 할 낡은 관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원 선배의 정연한 답변에 UN팀은 대답하지 못했다.

역시 형원 선배.

신춘문예는 노래방에서 딴 것이 아니었다.

몇 마디 말로 순식간에 상황을 뒤집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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