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95화 (95/203)

■ 95. 순위 □

컬처온의 대형 스튜디오.

우리들은 팀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평론가 패널 몇 명과 메인 심사위원 세 명.

정경아가 중앙에서 진행을 맡았다.

큰 스크린에는 열아홉 팀이 그린 벽화의 편집 영상이 흘렀다.

"유예철 교수님. 어떻습니까? 직접 현장을 둘러보셨는데요. 인상에 남는 작품이 있었습니까?"

"네. 저는 무대 인생 팀의 거리 벽화를 인상 깊게 봤습니다. 연극 무대의 배경을 철길 방음벽에 그렸더군요.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네 주민들의 반응이 열광적이었습니다. 성공적인 공공미술의 단적인 사례로 볼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박경원 큐레이터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특히 4일 동안, 그 넓은 방음벽을 다 채워 버렸죠. 4일 동안 매일, 다음 날 동네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두 거물의 칭찬에 무대 인생팀은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원래 미술 평론가들은 칭찬으로 시작해서 뒤통수치며 마무리 짓는 언어의 사기꾼들이다.

"그리고 특별 심사위원으로 나온 하종호 평론가님."

하종호는 기자 출신.

미술 평론가는 아니고, 블로그에 영화나 시사 관련 글을 올리다 인기를 끈 케이스였다.

그만큼 전문성은 떨어지지만, 반대로 대중에 대한 영향력은 크다.

덕분에 메인 심사위원에 속하진 않았지만, 고정 패널로 출연하는 모양이었다.

"하종호 평론가님은 기억에 남는 팀이 있으신가요?"

"네, 한 팀 있었습니다. 팀명이 LA 컨피덴셜이었나요? 유학생으로 구성된 팀이었죠? 그 분들의 작품을 보며, 한국 미술의 미래가 밝다고 느꼈습니다. 그 작품을 그린 이유를 본인들에게 직접 듣고 싶습니다."

"아, 그러세요? 극찬이군요. LA 컨피덴셜팀, 작품을 설명해주시겠어요?"

경기 시작 전 우리를 라이벌로 꼽았던 그 팀이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마이크를 붙잡고, 들뜬 얼굴로 작품을 설명했다.

"네, 저희는 초등학교의 담벽에 그림을 그리도록 배정받았는데요. 그래서 즐겁고 예쁘고, 또 저희들의 정체성을 알릴 만한 벽화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키스 해링과 바스키아, 두 미국 낙서 화가의 그림을 저희 식으로 해석해서 벽화를 그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하종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키스 해링과 바스키아를 해석해서 그린 거였군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린 그림인지 궁금했거든요. 해석이라기보다는 어설픈 표절에 가깝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학생들의 작품을 보며, 한국 미술의 위기는 절대 학교의 잘못이 아니다. 외국에서 미술을 배운 학생들도 이렇게 수준이 낮을 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래서 한국 미술의 미래가 밝다고 하셨군요."

역시, 블로그 비평가.

하종호의 독설을 듣고 자리에 앉은 여학생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독설은 끝난 게 아니었다.

"키스 해링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 낙서를 한 장소가 뉴욕의 지하철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고양시의 초등학교 담벽이 아니라요. 여러분들의 작업은 맥락도 개념도 없는 수준 낮은 색채 혼합물이었습니다. 예고 1, 2학년 수준의 사고력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독설이 끝나고, 카메라는 집요하게 사색이 된 유학생 팀을 포착했다.

역시 방송은 잔인했다.

"그럼 국선정 교수님은 어땠습니까? 인상에 남는 팀이 있으셨나요?"

"으음. 저는 한국대 팀이 인상 깊었습니다. 팀 수진, 맞죠? 수진씨가 저기 예쁜 분 맞으시죠?"

극과 극의 온도차.

하지만 착한 수진 선배는 앞의 팀을 걱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팀에 관한 평가가 이어졌다.

"일단 그림들이 즐겁고 재치가 넘쳤습니다. 다른 팀의 벽화가 말 그대로 그림이었다면, 여긴 재미있고, 유머 넘치는 그림엽서라고 할까요? 열악한 벽의 요소들을 그대로 살린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흔히 한국대라면 고지식하고 지루한 사람들이 떠오르는데, 그 고정관념은 단번에 날려버렸습니다. 특히 안경 쓴 분, 그 신춘문예? 그 분의 답변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화면에 형원 선배의 얼굴이 크게 떴다.

"예술의 주제는 언제나 인간이니까요. 우리는 단순히 이 골목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스크린을 보며 세 명의 심사위원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첫 과제의 주제를 정확히 짚어주네요. 보기만 해도 흐뭇한 팀이었습니다."

"저도 재밌게 봤습니다."

심지어 하종호까지.

"이거, 저 골목이 저 동네 명물이 되겠는데요? 실제 주민이 사는 곳이니까, 저 곳을 방문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칭찬이 이어졌다.

그리고 결과 발표.

탈락이 결정된 세 팀이 발표되었다.

유학생 팀도 그 중 하나였다.

결국 마이크를 잡았던 여학생은 울음을 터뜨렸고, 우리와 겨룰 일은 영영 없게 되었다.

"자, 그럼 두 번째 경연을 위한 간단한 규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남게 된 16팀 중, 하위 8개 팀만 공개됩니다. 그리고 하위 8팀이 한 팀씩 승부를 겨룰 상대를 지목할 수 있습니다. 1:1의 매치. 당연히 다음 경연에는 8팀이 무더기로 탈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경아는 순서대로 8팀을 발표했다.

우리는 그 하위 8팀에 포함되지 않았다.

뿌듯하긴 했지만, 지목당하는 입장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노리는 팀이 한 둘이 아닐 텐데?'

과연 우리의 상대는 첫 번째로 결정되었다.

"자, 미대생 연합 UN팀. 그럼 상대를 지목해주시죠!"

"저희는 팀 수진과 겨루고 싶습니다."

"UN팀이 팀 수진을 골랐습니다! 인서울 미대 동아리 연합과 한국대 서양화과의 승부! 흥미진진한데요?"

고개를 돌려봤더니 PD와 작가들이 환호하는 게 느껴졌다.

우리 중 누가 이기든 스토리를 뽑아내기 편할 것이다.

그렇게 8팀의 매칭이 끝난 후, 정경아 진행자가 외쳤다.

"자, 과연 다음 승부는 어떤 방식으로 치러질까요? 그리고 승자는 누가 될까요? 다음 주를 기대해주시죠! 예술은 계속 됩니다. 영 아트 코리아!"

* * *

다음 녹화는 3일 후.

이번에도 현장에서 미션이 주어진다고 한다.

3일간의 짧은 휴식이 주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쉴 시간은 없다.

학교는 이제 기말고사 시즌.

실기 과목은 최종 채점을 한다.

이준성 교수의 기초 서양화 과목의 경우, 이번 학기 동안 5점의 실기 과제를 했다.

남은 한 주 동안 5점을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정리하고, 작가노트를 적어 제출해야 했다.

미대지만 이론 과목도 있다.

그리고 한국대 학생들은 시험에 민감하기 때문에 기말고사 준비도 철저히 해야 했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그래서 오늘은 모처럼 혼자 밖으로 나왔다.

정말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오늘 내가 혼자 나온 이유는 곧 김태민과 유나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김태민과 유나는 둘 다 12월 생.

그래서 하루 날 잡아서 같이 생일 파티를 하기로 했다.

한국대 입학하고 나서 가장 친한 친구들이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가깝게 지내고 싶으니까 뭐라도 제대로 챙겨주고 싶었다.

참고로 내 생일은 3월.

친구들과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전이라서, 기숙사 방에서 간단히 치맥으로 때웠던 기억이 있다.

'그땐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라고 생각했지.'

전생의 나는 늘 혼자였으니까.

수십 년 인생동안 생일을 챙겨본 기억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에겐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르지만, 이제 나도 시끌벅적한 생일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작지만 뿌듯한 기쁨이었다.

참고로 1월에는 수진 선배의 생일이 있다.

'이거 그러고 보니 나랑 겨우 두 달 차이잖아? 두 달 먼저 태어났다고 존댓말이랑 선배 대접을 꼬박꼬박 누리셨군.'

수진 선배가 정화 선배에 비해 살짝 어설픈 게 다 이유가 있었다.

아무튼.

먼저 유나의 선물부터.

여자의 선물은 잘 모른다.

다만 어디서 막연하게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여자 선물은 화장품을 고르면 중간은 간다고······'

유나의 화장품을 본 적이 있었는데, 고만고만한 딱 그대로 여학생 화장품이었다.

'스무 살 생일이니까.'

한 번쯤 비싼 화장품을 선물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요즘 유나 일행의 맹활약으로 지갑도 두둑했다.

그래서 용감하게 백화점 명품 화장품 코너를 찾아갔다.

수수한 옷차림의 어린 남학생 손님이 오자, 직원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찾는 상품이 있으신가요?"

"으음. 친구 선물이요."

"친구요? 그냥 친구요?"

"그냥 친구요."

그러자 직원이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미리 알아온 상품이 있으신가요?"

이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걸까.

유나 화장품의 종류를 슬쩍 적어오긴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모두 암호처럼 보였다.

정화 선배한테 미리 물어보고 올 걸 그랬다.

오늘 외출 자체가 훌쩍 떠나고픈 마음에 쉽게 나선 것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준비가 없었다.

나는 직원을 향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추천해드릴게요."

그리고 직원은 설명과 함께 진열대 위에 여러 가지 화장품들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종류가 많았다니.

여자 화장품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았다.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시겠죠?"

직원이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명품 백화점 직원이 수수한 손님에겐 불친절하며, 그 기회를 틈타 주인공이 갑질하는 이야기는 전부 과장된 게 분명했다.

가게의 직원은 동네 착한 누나처럼 무척 친절했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이건 기회야.'

지난 생 늘 해보고 싶던 것을 도전해볼 기회.

나는 직원을 향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모르겠네요. 그냥 다 주세요."

"네?"

"방금 진열대 위에 꺼내신 거 그냥 전부 주세요."

"하지만, 저희 브랜드가 가격이 좀 있어서······그러지 마시고, 제가 몇 개만 골라드릴게요. 그것만 구매하세요."

이런 친절한 직원을 봤나.

하지만 '그냥 다 주세요', 이 대사를 꼭 해보고 싶었다.

"아뇨. 그냥 다 포장해주세요."

잠시 후.

꼼꼼히 담은 쇼핑백을 건네며 직원이 말했다.

"이렇게 선물하시면 분명 고백 성공하실 겁니다!"

고백이라니.

그래도 성공할 거란 말에 기분은 좋았다.

처음 와보는 명품 화장품 샵에서 유나의 선물만 사려니 조금 미안했다.

직원 누나의 친절함이 구매욕을 자극하기도 했고.

"어머니 선물도 사고 싶은데, 골라주시겠어요?"

"네? 어머니까지요?"

난 친절하게 말했는데 직원에게 기합이 잔뜩 들어갔다.

잠시 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결국 잠시 후 나는 두 개의 커다란 쇼핑백을 가지고 화장품 코너를 빠져나왔다.

뿌듯했다.

다음은 태민이 선물 차례.

김태민의 선물은 잘 고를 자신이 있었다.

나는 대형 서점으로 갔다.

김태민의 선물은 책이냐고?

놉.

김태민도 책을 많이 읽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김태민의 독서 취향은 예측 불가.

내가 찾는 것은 대형 서점 구석에 있는 장난감 코너였다.

이번에도 직원이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찾으시는 상품이 있으신가요?"

"네. 남동생 생일 선물이요."

"동생분이 좋아하는 분야가······"

"그림을 잘 그려요."

"아, 그러세요? 그럼 동생 분 나이가?"

"1학년이요."

"고등학교 1학년, 미술 쪽이라면···"

"초등학교요."

"아, 그러세요."

그러자 직원은 팝업북을 추천했다.

팝업북은 책을 펼치면 안의 그림이 입체로 올라오는 책을 말했다.

보통은 아이들 동화책용이지만, 로버트 사부다 등 유명 작가의 팝업북은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림에 관심이 있는 아이라면 이 책이 좋을 거예요. 일러스트도 훌륭하고, 신기한 팝업들이 미술 쪽 관심을 올려줄 거예요. 지금 특판 중이거든요."

와아.

스무 살 남자인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오는 신기한 팝업북들이었다.

김태민도 좋아할 게 분명했다.

'물론 김태민도 스무 살 남자긴 하지만.'

그렇게 팝업북도 몇 권 샀다.

로버트 사부다의 걸작 동화책 두 권과 공룡과 로봇 팝업북 각각 한권씩.

김태민이 좋아할 게 확실했다.

그렇게 선물을 샀더니 짐이 꽤 많았다.

그래서 잠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혼자 커피를 마셨다.

모처럼의 여유.

지난 생에는 늘 혼자 다녔다.

그래서 혼자 있는 것이 때로는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이렇게 일부러 혼자 있는 시간을 찾아 나섰다.

장족의 발전.

새삼스레 친구들이 고맙게 여겨졌다.

나는 기분 좋게 달콤한 커피를 즐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 저기요."

고개를 돌리니 수줍어하는 여대생 둘이 있었다.

"왜 그러시죠?"

"혹시 영 아트에 나가시는···맞으세요?"

"아···"

드디어 내게도.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너무 멋있어요! 응원할게요!"

"저, 하이 유나에서 옷도 샀어요!"

훗.

유명인의 삶이란 이런 것이었군.

사인까지 해주진 않았지만, 그렇게 팬들에게 격려도 받고, 흐뭇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페를 나서기 전, 직원에게 다가갔다.

"저기 저 두 분이 마신 음료, 제가 계산하고 싶은데요."

그러자 직원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훗.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시죠?

기다리세요. 곧 방송에 나올 테니.

방송에서 보고 내가 생각나겠죠.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겠죠.

나는 직원에게 한 번 더 미소를 지어줬다.

그리고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저희 가게는 선불 카페라서요. 손님도 계산하고 드셨잖아요. 그래서······"

아, 그렇군요.

그래서 그런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봤군요.

나는 재빨리 카페를 빠져나왔다.

팀 수진 멤버 인기 순위.

형원 선배: 5위.

사인해 준 사람: 여고생 3명

이주원: 6위.

알아본 사람: 여대생 2명, 사인해 준 사람: 0명, 망신 1회

오늘까지의 집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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