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94화 (94/203)

■ 94. 치밀한 남자 □

그렇게 힘든 4일이 끝났다.

"고생하셨습니다."

우리도 힘들었지만, 촬영 스태프들도 마찬가지.

촬영이 끝나자 긴장이 풀리고, 피로와 추위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우린 승합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녹초가 된 태민, 형원, 정화 선배를 돌려보내고.

집 앞에서 수진 선배와 유나도 배웅했다.

그리고 혼자 오피스텔로 돌아가 저녁 하이 유나 일을 마무리했다.

새로 뽑은 경력직 직원도 잘해주고 있었고, 또 원 디자인팀의 승희씨도 며칠간 쇼핑몰 일을 봐주고 있었다.

그래서 며칠 간 자리를 비워도 하이 유나는 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그래도 이제 첫 경연이 끝났으니까, 일도 착실히 해야지.'

딸랑.

그렇게 혼자 두 시간 정도 일했는데, 문이 열리고 유나가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왔는지 뺨이 발그레 했다.

"피곤할 텐데 그냥 쉬지, 뭐 하러 왔어?"

"너도 피곤하잖아. 같이 끝내자."

"수진 선배는?"

"잠 들었어. 쿨쿨. 샤워하더니 곧바로 뻗었어. 피곤했나봐."

피식 웃음이 났다.

힘든 일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일 테니까.

며칠간 밖에서 떨면서 그림 그렸으니 뻗을 만했다.

"감기 걸리지 말라고 이불 덮어주고, 보일러 빵빵하게 돌리고 나왔어."

"잘했어. 여기 일 거의 끝났으니까 너도 가서 자."

"싫어."

유나는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온 김에 일 좀 하고 갈게."

쇼핑몰 매출이 말도 안 되게 늘고 있었다.

하루 천 벌의 옷이 팔리면, 대강 계산하면 순익이 천만 원.

그렇게 한 달이면?

어마어마했다.

첫 경연인 벽화 그리기는 아직 방송 전이다.

곧 첫날 백분 특집 편성과 함께 2주간 방송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럼 지금보다 매출이 얼마나 더 늘게 될까?'

행복한 상상도 감당이 될 때 행복하지.

너무 어마어마하게 성장하니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벽화 그리기는 내일 하루 더 스튜디오 촬영을 한다.

내일 첫 경연의 탈락자가 발표된다고 한다.

'결과는 상관없어.'

결과물에도 만족하고, 내 전략에도 자신 있었다.

'그리고 탈락해봤자.'

우린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했다.

"유나야."

"응?"

"안마해줄까?"

유나가 배시시 웃었다.

"응. 그런데 안마 받으면 졸리니까, 일 다 끝내고 해줘."

푸슝.

유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빛의 속도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가끔 느끼는데, 노력상점보다 유나 상점이 훨씬 더 강력하다.

아무튼.

타다다닥!

눈에 불을 켜고, 키보드를 미친 듯이 강타해서 순식간에 일을 마쳤다.

그리고 드르륵.

유나 뒤로 의자를 당겨와 앉았다.

"잠깐만."

그리고 유나는 따뜻한 녹차 두 잔을 옆에 가져와서, 내게 안마 받을 준비를 했다.

'바람직해.'

유나가 서서히 내 안마에 중독되고 있었다.

역시 노력 상점은 언제나 옳았으며, 항상 최선이었다.

그리고 꾸준한 안마를 통해 노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유나의 멘탈을 위해 요새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킵 해둔 소원 두 개가 있다.

이렇게 조금씩 안마를 통해 지속적인 스킨십을 쌓다보면, 자연스레 소원의 수위가 올라갈 것이다.

'후후후.'

역시 중년의 회귀자답게 나는 지독하게 치밀한 남자였다.

그렇게 토닥토닥, 시작된 안마.

지난 4일간 밖에서 고생한 최고의 보상은 지금 이 순간인 것 같았다.

유나가 춥지 말라고 오피스텔 온도를 높였는데, 그 덕분인지 비누 냄새가 더 진하게 풍겨왔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렇게 앉아서 등과 어깨를 안마하는 건, 대화를 나누기에 정말 좋은 자세인 것 같았다.

충분히 가까이 있고, 서로의 몸이 닿아 있고, 또 너무 서로의 표정을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따뜻한 녹차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 안마했다.

"형원 오빠도 참. 하나도 안 아픈데."

"그러게 말이야."

그리고 우린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들을 순서 없이 이야기했다.

"맞다. 너 이번에 멋있었어. 그림 대신 청소를 하겠다고 한 것 괜찮은 아이디어였어. 그리고 열심히 하는 모습도 멋있었고."

"진짜?"

"응."

"네가 있어서 가능했던 거야. 너랑 정화 선배랑, 수진 선배가 셋이서 벽화를 커버해주니까, 우리가 딴 짓을 할 수 있었지."

"진짜?"

"응."

우리는 꽤 멋진 팀이었다.

유나가 걱정하듯 말했다.

"쇼핑몰 매출이 너무 많이 올라서 난 솔직히 무서워."

나도 살짝 그렇긴 했지만, 그래도 리더는 티내면 안된다.

"그것도 우린 잘 해낼 거야."

"응."

내 가벼운 대꾸도 유나에겐 큰 안심이 되는지 유나는 힘 있게 대답했다.

자, 이제 일어날 시간.

나야 몇 시간이라도 지금처럼 있고 싶지만, 내일 곧바로 또 녹화가 있다.

방송에 나가려면 일찍 재워야 했다.

우리 둘 사이의 진전도 중요했지만, 모든 일에는 적당한 타이밍이 있는 법.

오늘은 힘든 하루를 보냈고, 아직 내일의 녹화도 남았으니 이 정도 행복으로 충분했다.

"아악. 몸이 녹아내려서 일어나기가 싫어."

"어서, 일어나. 안마는 다음에 또 해줄게."

"응."

말해놓고 보니 꽤 뿌듯했다.

드디어 '안마 주권'을 되찾은 것이었다.

원래 안마는 해주는 사람이 고생스러운 것.

안마를 받는 사람이 고마워해야 한다.

하지만 유나와 나 사이에는 유나가 선심 쓰듯 안마를 허락하곤 했었다.

말도 안 되는 역전이었다.

내가 '안마 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노 모어.

드디어 '안마 갑'의 자리를 되찾았다.

전부 노력 상점 덕분이었다.

'고맙다. 노력상점.'

이번에도 역시 노력상점이 나를 사람 노릇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유나를 바래다주고, 나도 만족한 기분으로 꿀잠을 잤다.

* * *

4일 전.

'무대 인생' 팀.

김영오, 박승건, 최진호는 동료 두 명과 함께 폐선된 철길로 안내 받았다.

그리고 배정된 PD가 간략하게 설명했다.

"여기 철길은 이제 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에요. 하지만 방음벽을 뜯어낸 시멘트 담장이 흉물스러우니까, 이곳에 벽화를 그려 달라는 요청입니다."

과연 철길 주위로 이미 산책하는 동네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그리고 철길을 따라, 카페와 식당도 제법 들어서 있었다.

제대로 다듬어진다면 철길 주위로 꽤 근사한 공원이 조성될 것 같았다.

여기에 벽화를 남긴다면 그림쟁이로서는 꽤 보람될 지도 모른다.

김영오와 박승건은 방음벽 앞에 섰다.

철길을 따라 길게 이어진 방음벽.

그들은 몰랐지만, 달동네로 배정된 팀 수진에 비하면 수십 배쯤 좋은 환경이었다.

물론 밋밋하니까 조금 재미가 없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림을 그리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방음벽은 넓지만, 촬영은 4일이니까 전부 다 그릴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PD는 사전에 합의된 넓이를 지정해주었다.

확실히 다른 팀에 비해 PD도 성의 없어 보였고, 배정된 VJ수도 작은 것 같았다.

미모가 넘쳐흐르는 팀 수진에 비해, 시커먼 사내들만으로 구성된 무대 인생 팀.

그리고 딱히 돋보이는 경력을 지닌 멤버도 없었다.

오히려 서류 심사를 통과한 게 신기할 정도.

그래서 무대 인생 팀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벽화 작업에 들어가기 전, 그들은 방음벽 앞에 서서 잠깐 회의를 했다.

먼저 박승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벽화. 그리고 방음벽. 이거 지금 나만 운이 좋다고 느끼는 거야?"

그러자 김영오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마치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주제 같아."

정말 그랬다.

무대 인생 팀이 늘 하는 일이 보드 판에 연극 배경 그리는 일이었다.

그들이 이제까지 그려온 무대만 벌써 수십 개.

그런데 신기하게도 방음벽의 높이가 딱 소극장 무대 배경 높이랑 비슷했다.

"주제도 좋아. 연극 산책, 어때? 산책하는 시민들에게 우리가 그려온 연극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입을 털면 되지 않을까?"

그러자 최진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될 것 같아. 그렇게 하자!"

그리고 다섯은 신나게 방음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늘 하던 일이니까 이보다 더 쉬울 수 없었다.

마치 그간의 설움을 풀어내듯 듯 번개처럼 호쾌한 붓질로 벽면을 채워나갔다.

"어? 그림이 제법 나오는데?"

"그러게요. 속도도 빠르고."

PD와 VJ의 얼굴에도 조금씩 감탄이 서리고 있었다.

"컹컹."

김영오가 정신없이 그리고 있었는데, 발치에 뚱뚱한 푸들 한 마리가 다가와 있었다.

"너 이 녀석. 어디서 온 거야?"

그런데 그때.

개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뛰어왔다.

"죄송해요. 산책하다 개를 놓쳐서. 어머, 그런데 직접 그리시는 거예요? 너무 예쁘다."

촬영 중인 걸 미처 모르고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림 때문에 사람들에게 관심 받아본 게 대체 얼마나 오랜만일까?

그것도 젊은 여자한테.

김영오는 자기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아빠, 저것 봐!"

산책하던 어린 아이가 부모를 끌고 와 사진까지 찍고 갔다.

빠른 속도로 그림이 그려질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저, 요기 앞에 카페에서 왔는데요.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고생하신다고 저희 사장님이 드리고 오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어여쁜 카페 알바생이 아메리카노와 쿠키까지 주고 갔다.

"와, 대박. 방송하나 봐. 설마 그거? 케이블에서 하는 거? 나, 그거 알아."

"그림 쩐다. 여기 벽화 생기나 봐."

그리고 둘째 날.

"아직 점심 안 먹었지? 나 이 앞에 순두부 집인데 점심 우리 집에서 먹고 가! 내가 공짜로 드릴게."

"아뇨, 저희 안 그러셔도······"

"내가 고마워서 그러지! 우리 가게 앞에 그림 그려주는데!"

PD가 거절했지만, 식사를 제공하겠다는 곳도 나왔다.

과자와 맥주를 건네는 사람들도 있었고, 거의 촬영 내내 사람들이 몰려서 구경했다.

무대 인생 팀은 이렇게까지 관심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연극을 보러 온 관객들은 늘, 무대를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그리고 배우에게만 환호를 보냈다.

제대로 된 보수를 받은 적도 없었고, 공짜로 밥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서 그림 옆에서 사진까지 찍고 있었다.

덕분에 둘째 날에 벌써 배정받은 벽을 다 그리고 말았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계속 달려야지."

다행히 방음벽은 길었다.

무대 인생 팀은 4일 동안, 컬처온에서 지정해준 벽의 세 배의 길이를 그려버렸다.

그리고 수십 명의 관객들에게 박수까지 받으며 촬영을 마쳤다.

"수고했어요! 너무 멋져요!"

"벽화 고맙습니다!"

"파이팅! 우승까지 달려요!"

서른을 앞둔 다섯 명의 남자는 어느새 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살면서 이런 응원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지방대를 다니고, 다시 무대 배경을 그리고.

그 시간동안 그들은 세상의 관심에서 지속적으로 멀어졌다.

하지만 지난 4일 동안은 달랐다.

4일 동안 함께 촬영한 PD와 VJ도 같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가 그린 그림을 좋아하고 있어.'

오랜만에 맛보는 멋진 순간이었다.

* * *

4일간의 촬영이 끝난 밤.

내일 1차 탈락자를 발표하는 스튜디오 촬영이 있었다.

이미연은 팀 수진이 지난 3일 간의 촬영, 러프 편집본을 보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

이미연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미연의 요청대로 컬처온은 김태민을 적극적으로 띄우고 있었다.

아직 방송 전이지만,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첫 촬영.

'그래, 얼마나 잘 하나 한 번 보자.'

이미연은 직접 팀 수진의 1차 과제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김태민은 3일 동안 붓 한 번 잡지 않았다.

계속 손수레를 밀면서 가파른 비탈길을 뛰어다닐 뿐.

그러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 지 3일 내내 바보처럼 싱글벙글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게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팀 수진 멤버들 모두가 눈앞의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명만이 가끔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생각에 잠기곤 했다.

마치 모든 상황을 계획하고 점검하듯이.

'이주원이라고 했지.'

낯익은 얼굴.

이준성 교수의 전시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이미연은 영 아트 코리아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주원의 인터뷰를 클릭했다.

묘하게 선을 넘을 듯, 말 듯 얄미우면서도 교활한 대답들.

분명 일부러 관심을 끌고 있었다.

'요 녀석 봐라.'

스무살 짜리 꼬마 주제에 팀 수진의 호흡을 조율하며 악역을 자처하고 있었다.

마치 김태민과 예쁜 여학생들을 돋보이게 하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물론 가장 튀는 인터뷰를 하는 것은 이형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계산이 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주원은 달랐다.

그 꼬마의 답변은 모든 것들이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다.

한 명의 화가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훌륭한 작품 외에도 여러 요소들이 필요했다.

그 중 하나는 자기를 파는 능력.

자신의 상품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값을 매기고, 판매를 위한 전략을 짤 줄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주원이 해내고 있었다.

'진기 선배가 영리한 학생이라고 칭찬했었지.'

하지만 너무 영리한 것 같았다.

김태민에게 도움이 된다면 상관없지만, 너무 영리해서 자신을 방해할 정도면 곤란했다.

'어쨌든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태민이 단 한 명이어야 해.'

이미연은 팀 수진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이제야 팀이 다시 보였다.

이주원은 너무 교활하고, 여학생들은 너무 예뻤다.

그리고 나머지 이형원.

'이 녀석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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