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1차 경연 □
생전 처음 와보는 방송국.
대형 스튜디오 안은 왁자지껄 소란스러웠다.
'영 아트.'
프로그램 제목 그대로 스튜디오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젊은 사람들 특유의 활기와 열기가 후끈 느껴졌다.
카메라를 든 VJ들.
그리고 새끼 작가와 PD들이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방송 분량을 따내고 있었다.
즉석에서 소감을 묻는 간이 인터뷰도 이뤄졌다.
나는 귀를 세우고 우리와 겨룰 사람들을 엿 들었다.
"간단하게 팀 소개를 해주시겠어요?"
"저희는 미국 유학생들로 이뤄진 팀입니다. 영 아트가 미국에서 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다시 열린다고 하길래 지원했습니다."
"미국 유학을 간 이유가 있나요?"
"그림을 정말 사랑해서, 자유롭게 배우고 싶은데 한국 입시 미술은 정말 끔찍하잖아요? 그래서 유학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영 아트 코리아에 참여하는 팀들이 전부 공개되었는데, 신경 쓰이는 팀이 있나요?"
"다들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대팀? 한국 입시 미술의 정점에 있는 학교잖아요. 그리고 저희들은 입시 미술을 거부했죠. 그러니 우리와 대척점에 있는 팀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가장 친해지고 싶은 팀은?"
"역시 한국대 팀이요."
"왜죠?"
"너무 잘생겼잖아요!"
이런.
우린 관심의 대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와 형원 선배는 제외된 듯하지만.
아무튼 비슷한 인터뷰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저희 팀명은 '무대 인생'이라고 정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연극 같다는 뜻이죠. 가장 신경 쓰이는 상대는 아무래도 한국대? 팀 수진이랬나요? 저희는 가난한데, 저희보다 어린 분이 벌써 사업체를 운영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리고 또 한 분은 유명 화가의 아들이고요. 금수저와 흙수저의 싸움이죠."
"저희 팀의 이름은 UN입니다. 서울 지역 미대들의 연합동아리입니다. 가장 신경 쓰이는 팀은 역시 한국대 팀입니다. 우리가 인서울 미대간의 연합 동아리를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한국대는 딱히 대답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이런, 이런.
우릴 경쟁자로 지목한 팀은 한둘이 아니었다.
우린 어느새 무림의 공적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 좋은 거잖아?'
저 인터뷰들이 전부 방송에 나가면 우리는 그만큼 여러 번 언급될 것이다.
이것은 기회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우리 팀 역시 마찬가지.
무거운 카메라를 든 VJ들이 유나, 수진, 태민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아버님인 김용철 작가님이 영 아트와 관련해서 특별한 조언을 해 주셨나요?"
"어머니께서 이름난 큐레이터인데, 전략을 제공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미술계에서 영 아트를 비판하는 시각도 적지 않은데 어머니께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지."
특히 김태민은 살짝 불쌍할 정도였다.
비슷한 질문을 몇 주째 받고 있었다.
"그냥 잘 하라고, 재밌게 즐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간의 씁쓸함이 김태민의 얼굴에 비치긴 했다.
그래도 김태민은 제법 의젓하게 잘하고 있었다.
평소의 해맑은 이미지와 달리 김태민도 나약한 꼬마가 아니었다.
'이준성 교수는 김용철 작가가 성난 물소라고 했지.'
맹수의 아들은 역시 맹수인 법.
그리고 형원 선배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놈의 한국대 타령. 이제 지겹습니다. 우리에게 학벌 말고도 또 다른 것들도 많다는 걸 오늘 증명하겠습니다."
유나, 수진, 태민 등 비주얼 멤버에게 과하게 쏠린 관심을 적당히 끼어들어 커트해주고 있었다.
"자, 모두 모여주세요!"
그리고 고함 소리와 함께 드디어 본격적으로 쇼가 진행되었다.
* * *
커다란 강당 같은 스튜디오.
시끌벅적 시장같은 분위기.
중앙의 환한 조명아래, 영 아트의 진행자이자, 또 다른 아트테이너인 정경아가 메인 진행자로 섰다.
정경아는 모델 출신 연기자로 자기 화실도 외부에 공개하고, 꾸준히 전시를 열어왔다.
덕분에 이 쇼의 진행자로 처음부터 내정되어 있었다.
정경아는 차례로 영 아트의 메인 심사위원 세 명을 소개했다.
"전시 기획자이며 세원 예술대 조형예술과 교수이신 유예철님, 미술 평론가이시며 서울 아티클의 편집장이신 박경원님, 미술 사학자이며 역시 전시 기획자이신 국선정 교수님."
미대생이라면 전부 한 번 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인들이었다.
유명세만 가진 미술인들도 제법 많지만, 다행히 셋은 나름 권위도 가진 편.
유예철 교수는 미디어아트 비엔날레부터 국제아트페어까지 굵직한 행사의 감독을 맡아왔다.
그리고 박경원이 편집장으로 있는 서울 아티클은 한국 예술계에서 제법 힘이 있는 미술 잡지.
국선정 교수 역시 최근 교양 채널에서 꾸준한 인지도를 쌓고 있는 스타 미술가였다.
컬처온과 이미연 실장이 이 방송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몇 번의 인사치례와 농담들.
쇼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여기 계신 세 분 외에도, 앞으로 치러질 경연에 따라 다양한 멘토와 외부 심사위원들이 함께 하실 예정입니다. 그럼 방송에 제일 익숙하신 국선정 교수님께서 첫 경연의 포인트와 심사 방향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네, 그런데 첫 경연은 내용은 아직 말해서는 안 되는 거죠?"
"맞습니다. 번호표를 뽑고, 지정된 장소에 팀별로 이동 후, 첫 경연의 주제가 깜짝 발표될 예정입니다."
국선정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만큼 순발력과 창의성이 중요하겠죠. 영 아트는 말 그대로 젊은 예술가를 위한 경연이니까요. 젊음은 곧 순발력이겠죠. 그리고 이 쇼의 취지는 역시 예술을 대중에게 가져와 알리는 거죠. 그러니 어렵지 않은 예술, 일상 속의 예술을 얼마나 잘 드러내느냐가 심사의 관건이겠네요."
정경아 진행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이 스튜디오 안에는 서류와 포트폴리오 심사만으로 선발된 열아홉 팀의 참가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첫 경연이 주어질 건데요. 그 중 세 팀이 오늘 탈락될 것입니다. 작품 하나 만으로 탈락? 잔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요. 그게 영 아트의 본질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 각 팀의 대표는 앞으로 나와 주시죠."
우리는 웃음을 머금고 수진 선배를 쳐다봤다.
수진 선배는 울상을 지으며 앞으로 나갔다.
수진 선배가 귀여운 표정을 지을 때마다 VJ는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카메라를 선배에게 들이댔다.
"팀의 대표가 되는 게 싫으세요? 예술가들은 모두 주목받고 싶어 하지 않나요?"
그리고 틈새를 노려 짧은 질문까지 던졌다.
"저도 주목받고 싶긴 한데, 함께 저를 놀리는 게 괘씸하잖아요. 그리고 저는 아직 진짜 예술가도 아니거든요."
수진 선배의 귀염, 난처한 대답을 들으며 나는 확신했다.
'방금 저 대답과 표정만으로 매출 300만은 올랐을 거야.'
그리고 진행자 정경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각 팀의 대표들은 앞으로 나와서 간단히 각오를 말하고, 번호가 적힌 공을 뽑으면 됩니다.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첫 경연은 팀마다 주어지는 조건이 모두 다르며, 그래서 뽑는 번호에 따라 운명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괜찮죠? 첫 경연에서 탈락해도 운이 나빴다고 핑계 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도발적인 멘트까지.
"저희는 그냥 열심히 할 겁니다. 그게 저희가 제일 잘 하는 일이거든요."
각오를 발표하고, 수진 선배는 웃으면서 혀를 내밀었다.
역시 수진 선배는 카메라 체질이었다.
1학기 조별 과제할 때도 그랬었다.
평소에는 살짝 맹하고 천진한 수진 선배가 이상하게 카메라 앞에서는 자연스럽다.
'화이트 노이즈 앞에서 집중을 잘하는 것과 비슷한 걸까.'
아무튼 수진 선배가 뽑은 번호는 6번.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6번이 적힌 미니버스에 앉아 있었다.
차가 출발하고, 우리 차를 뒤따라 길게 승합차의 행렬이 따라왔다.
"정말 시작돼 버렸어."
유나가 창밖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긴장 돼?"
"약간?"
"우린 잘 할 거야."
"당연하지."
유나는 대답과 함께 자신 있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버스에 자리가 많은데 나는 자연스럽게 유나 옆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너무 자연스러웠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차에 같이 탄 김수희 작가와 VJ가 쉬고 있는 친구들 위로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내가 김수희 작가를 향해 물었다.
"이동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그러자 김수희 작가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동지에 대해서는 경연 규칙상 대답드릴 수 없어요."
"아뇨. 이동지에 대해 물어본 게 아니라, 이동 시간이요. 친구들이 얼마나 쉴 수 있나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서울에서 이동 시간만으로 도착 장소를 유추할 수는 없잖아요?"
내가 조곤조곤 따지면서 묻자, 김수희 작가는 아주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아마도 보통의 초보 출연자들은 카메라를 들이대면 고분고분했을 것이다.
"사오십 분 정도요."
"그럼 그 동안이라도 모두 쉴 수 있도록 촬영을 멈춰주시겠어요?"
"그게, 저희는 리얼리티고. 또 편집하다보면 어떤 장면이 필요할지 몰라서 전부 촬영해야 해요. 방송이 처음이라 잘 모르시겠지만, 방송은 원래 이렇게······"
"아뇨. 우리가 방송에 대해 잘 알 필요가 없죠. 우리는 연예인이 아니라 예술가로 왔으니까요. 잠깐이라도 쉬는 것과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좋은 작품이 나오겠어요? 영 아트에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짐작이 가긴 해요. 그래도 우리의 휴식과 방송 분량. 어느 쪽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생각보다 강하게 항의하자 김수희 작가는 조금 더 당황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VJ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버스 안의 팀 수진은 잠시 카메라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딱히 카메라를 끄고 대단한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른 아침부터 스튜디오에서 시달린 동료들에게 잠깐의 휴식을 선물하고 싶었을 뿐.
'나 잘했어?' 하는 표정으로 유나를 보자 유나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정말 50분 후.
버스가 멈추고 우린 차에서 내렸다.
이곳은 서울의 달동네.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서 가끔 본 적은 있지만 직접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김수희 작가가 우리에게 외쳤다.
"여기서부터는 차가 들어가지 않아서 10분 정도 직접 걸어야 해요! 자, 여기서부터 촬영 재개할 테니까 모두 준비해주세요!"
대체 첫 경연의 주제가 뭐 길래?
그리고 우린 시멘트로 성의 없이 포장된 가파른 비탈길을 올랐다.
소설을 쓰느라 방 안에 갇혀 지내던 형원 선배는 헉헉 거리며 죽는 소리를 냈다.
잠시 걷자 곧 회색의 공터가 나타났다.
그리고 형원 선배의 숨소리가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김수희 작가가 우리에게 외쳤다.
"그럼 첫 번째 경연의 주제를 발표할게요. 첫 주제는 바로 거리 벽화입니다. 이곳은 컬처온이 사전에 주민들에게 벽화 조성과 촬영을 허락 받은 장소입니다. 주어진 시간은 96시간. 벽화의 주제는 자유입니다. 여섯 분이 의논해서 96시간 동안 이곳의 벽을 그림으로 채우면 됩니다."
이런.
나는 눈앞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정말 같은 서울이 맞나 싶은 달동네 빈민가.
어떤 담들은 기울어졌고, 어떤 담들은 위에 유리 조각이 박혀 있었다.
차도 올라오지 못할 정도로 길은 좁고 휘어졌다.
그리고 길 옆으로 담장이 무너진 빈집도 있었다.
빈집은 반쯤 무너져 있었고, 마당 안에는 사람들이 던져둔 쓰레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작은 공터에는 화장실 같은 건물도 보였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김수희 작가가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이곳 주민들이 쓰는 공용 화장실이에요. 일부 주택은 화장실이 기능을 못하거든요."
"그럼 4일 동안 우리도?"
"그래야 할 거예요. 이 화장실이 아니면 가장 가까운 화장실이 마을 아래로 걸어서 이십분 거리거든요."
그 대답에 유나 등등은 울상을 지었다.
벽화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일단 페인트는 우리가 평소에 쓰던 물감과 많이 달랐다.
거친 벽 위에 균일하게 칠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
96시간, 4일이라면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
"나 벽화 자원 봉사 해 본 적 있어."
정화 선배가 중얼 거리며 한걸음 나서서 집들의 담벽을 만져 보았다.
하지만 울퉁불퉁.
금이 간 곳도 있고, 집들마다 자재도 색깔도 제각각이었다.
그림 그리기 좋은 벽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다른 팀들도 상황이 비슷한가요?"
"아니요. 6번이 제일······"
김수희 작가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김수희 작가는 가지고 있던 대본의 일부를 보여주었다.
1번은 하천 공원의 간이 운동장.
2번은 폐선 철길의 방음벽.
3번은 초등학교 담장.
등등.
우리의 상황이 제일 열악했다.
김수희 작가는 미안한 표정을 짓고, 형원 선배는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때.
유나가 보란 듯이 카메라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럼, 우리가 제일 특별하겠네요!"
그리고 그 말에 정화 선배와 수진 선배가 같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와 김태민 역시 곧바로 유나의 말 속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분명 크고 깨끗한 그림을 그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예술가에게는 남과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언제나 큰 축복이었다.
오히려 도시 근처의 깨끗하고 넓은 담벽보다 훨씬 즐거운 도전이 될 것이다.
"역시 수진이, 번호를 잘 뽑았네!"
뒤늦게 눈치를 파악한 형원 선배까지 수진 선배를 칭찬했다.
그리고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김태민을 바라보았다.
'우리 상황이 나쁘지 않아.'
유나와 정화 선배의 실력은 확실하다.
유나가 저렇게 자신감을 비춘다면 우린 안심해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더 큰 그림을 봐야했다.
'방송국 놈들. 태민이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지. 남들보다 몇 배나 카메라를 들이댔어. 그게 고스란히 방송으로 나가면? 시청자들도 다 같이 김태민을 궁금해 할 거야.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다른 팀에 비해 과도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쇼핑몰의 운영자로써 이 관심을 지속시킬수록 유리했다.
'어쩌면 1차 경연도 통과하면서 시청자들을 더 안달 나게 할 방법이 있을 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