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동굴 □
우두둑. 우두둑.
어두운 방.
날리는 먼지.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형원 선배가 고개를 들었다.
노트북 앞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형원 선배가 움직일 때마다 관절에서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주원아, 무슨 일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는지, 형원 선배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형원 선배는 장편 소설을 준비 중이었는데, 한동안 거의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형,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어요."
"벌써? 아직 소설을 다 쓰지 못했는데."
"저랑 같이 나가요. 방송에 좀 나가고, 사람들 환호 좀 받아보면 기분 전환도 되고, 글도 잘 나올 거예요."
"음, 그런가? 잠깐. 지금 방송이라고 했어?"
형원 선배도 팀 수진의 멤버였다.
그리고 팀 수진의 동영상에서 제일 큰 역할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형원 선배는 이미 2번의 수상으로 검증된 강력한 문학 재능충.
거기에 꾸준한 자기애.
이성에게 인정받고 싶은 강렬한 욕망.
그 세 가지가 합쳐진다면?
시청자들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는 새로운 어그로가 끌릴 게 분명했다.
이형원은 김태민 못지않은 팀 수진의 강력한 비밀 무기였다.
게다가 우리가 덜컥 우승이라도 해버린다면?
넉넉한 상금은 형원 선배의 문학 인생에 좋은 뒷받침이 될 게 분명했다.
"형, 세상이 우릴 부르고 있어요."
영 아트의 제한 인원은 팀당 2인에서 6인.
아쉽게도 한철이는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한철이는 무척 바빴다.
"으, 나도 끼고 싶다. 그런데 정신이 하나도 없네."
한철이는 대학을 졸업한 후, 병역 특례로 군복무 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한국대 컴공과에서는 무척 흔한 일.
그런데 병역 특례로 취업하기 위해서는 1학년 때부터 선배들의 라인을 잘 타야 했다.
그래서 한철이는 1학년부터 무척 바빴다.
거기에 틈틈이 내가 주는 아르바이트까지.
한철이는 도저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형원 선배를 동굴 같은 방에서 꺼내 세상에 풀어 놓았다.
* * *
"안녕하세요. 방송 이모저모의 김우식입니다. 최근 채널 컬처온에서 특별한 시도가 있었는데요. 바로 영 아트 코리아입니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업무에 투입된 TJ 이미연 기획실장의 야심작인데요. 강성희 회장의 차녀이기도 한 이미연 기획실장의 경영 능력 검증 무대이기도 합니다. 이 방송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위해 문화 평론가이자 한국예술종합대학의 오성렬 교수가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몇 마디 인사 후 오성렬 교수는 강하게 영 아트를 비판했다.
"영 아트 아메리카 역시 미국에서 강하게 비판받은 방송입니다. 방송이 아니라, 출연자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예술로 포장된 서바이버일 뿐입니다. 그리고 영 아트 코리아도 그 폐단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예술은 절대 경쟁의 소재가 될 수 없습니다. 거기다 시작도 전에 출연자의 외모와 학벌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 쇼는 시청률과 방송국의 이미지를 위해 예술을 이용하는 저속한 발상일 뿐입니다."
이런 비판과 더불어 영 아트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시드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영화배우 유인호는 원래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재미교포 아티스트 최성진이 입국할 때에 기자들이 몰려들어 질문과 카메라 세례를 퍼부었다.
최성진은 기자들 앞에서 여유롭게 답변했다.
"많은 한국 팬들의 성원으로 제가 미국에서 작가 활동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쇼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최성진은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매니저와 함께 차에 올랐다.
"TJ에서 홍보는 제대로 하는 모양이네. 이번엔 다른 입국 때보다 기자들이 배는 더 왔네."
매니저가 재미있다는 말투로 말했다.
사실 최성진은 전형적인 교포 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최성진은 나쁘지 않은 미술가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사실 미국에서는 그저 그런 젊은 예술가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의 인기는 한국과 미국에서 온도차가 컸다.
최성진은 의사가 되기 위한 코스를 밟다가 중간에 미술가로 돌아섰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메스를 쥔 화가'
훤칠한 외모, 부유한 집안, 공부 잘하는 엄친아 이미지까지.
한국에서 어느새 최성진은 천재 화가로 불리고 있었다.
차 안에서 매니저가 최성진에게 말했다.
"그거 들었어? 이번 쇼에 김용철 작가 아들도 나온데."
"들었어요. 나는 그렇게 싸구려 취급을 하더니, 자기 아들은 티비 쇼에 꽂아 넣고. 김용철 그 인간도 참 위선자예요."
"예술가들이 다 그렇지."
최성진이 한창 인기를 끌 무렵 여러 한국의 미술가들과 콜라보 전시를 계획했었다.
그리고 그 중엔 김용철 작가도 있었다.
미술계가 힘든 만큼, 최성진의 제안에 많은 미술가들이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김용철 작가는 칼같이 거절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두 작가의 노선도 달랐고, 이름의 무게도 너무 달랐다.
최성진이 그때를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 인간 아들, 꼭 나랑 마주쳤으면 좋겠다."
"흐흐. 성진이 너 자신 있나 봐? 그런데 그 한국대 애들 봤어? 엄청 예쁘던데? 스무 살, 스물 한 살이래."
"그러니까요. 이거 거절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이런 기회는 거절하면 안 되지."
영 아트 코리아는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참가 접수는 마감되었고, 컬처온은 순차적으로 조금씩 일반 참가자와 시드 참가자의 명단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새로운 출연자들이 등장할 때마다 반응이 뜨거웠다.
그래도 일반인 출연자 중 최고의 인기 팀은 역시 팀 수진이었다.
그래서 종종 컬처온이 아닌, 다른 채널에서도 팀 수진에게 인터뷰 제안이 들어올 정도였다.
물론 팀 수진은 인터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한 번의 인터뷰가 방송을 탈 때마다 하이 유나의 매출은 격하게 상승했다.
"이형원씨는 특이하게 국문과 출신이네요. 팀 수진은 전부 한국대 출신으로만 이뤄져 있는데요. 그것과 관련해서 팀 수진만의 차별성이나 메리트가 있을까요?"
"전혀요. 예술은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 같은 경우엔 신춘문예와 SF 소설 공모 대전 대상 수상자입니다. 하지만 새 소설을 쓸 때는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가 한 글자, 한 글자 신인의 자세로 씁니다. 글은 모두에게 평등하니까요. 미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대학이든, 어떤 경력이 있든 도화지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들이 계급을 가질 수 있다면 그 기준은 오직 하나일 것입니다. 바로 열정이죠."
"대, 대단하시군요. 신춘문예와 SF 소설 상도 타셨군요."
"네. 사실 신문사와 방송국의 기자로 취직이 내정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아, 제 말을 오해하진 마세요. 제가 기자님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저에겐 하나의 선택지가 더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역시 이형원은 이주원이 원한 대로, 쉽게 잊혀지지 않을 인터뷰를 잘 해내고 있었다.
그쪽으로 재능을 타고 났다고 할까.
그리고 이주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 아트에 걸린 거대한 상금 때문에 오히려 영 아트 코리아를 비판하는 시선도 많은데요. 특이하게 어린 나이에 사업체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영 아트의 상금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사업가로서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예. 저도 영 아트를 비판하는 기사와 방송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영 아트의 상업적 시도가 예술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구시대적 발상입니다. 예술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돈이 있고, 돈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예술이 있습니다. 예술과 돈은 사이좋은 친구입니다. 자기의 작품이 비싸게 팔리는 걸 싫어하는 작가는 없을 겁니다. 젊기 때문에, 돈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 상금을 원하면 순수하지 않다는 발상은 지나치게 닫힌 생각입니다. 저도 돈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시 기자들의 최대 관심은 김태민이었다.
김태민이 김용철 작가의 아들이라는 것은 어느새 소문이 퍼져버렸다.
"김태민씨. 아버지가 김용철 작가라는 사실이 맞습니까?"
"틀린 이야기입니다."
"네?"
기자가 다 알고 왔는데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제 아버지는 김용철이라는 분이 맞습니다. 하지만 김용철 작가는 아닙니다. 제게 아버지는 같이 그림을 그리는 가족, 그리고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자상한 아버지일 뿐입니다. 유명한 화가가 아닙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여러 큰 상을 수상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을...쎄요. 제가 옛날에 어떤 상을 탔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누구와 함께 있고,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태민은 기자가 답답해할만큼 느릿느릿 대답했다.
하지만 김태민도 꽤 그럴 듯하게 인터뷰를 마쳤다.
역시 김태민도 할 때는 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컬처온의 사무실.
피디와 작가들이 흐뭇한 얼굴로 뉴스들을 보고 있었다.
비판하는 뉴스든, 칭찬하는 뉴스든 별 상관없었다.
관심을 끄는 것만으로 일단 성공이었다.
"그나저나 한국대 팀 정말 고맙지 않아? 쟤들이 이렇게까지 화제를 불러올 누가 알았겠어? 지금 내 기분 같아서는 쟤들한테 감사패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야. 최작가. 저 놈들 잘 찾았어."
김우철 PD가 최희영 작가를 칭찬했다.
팀 수진을 찾아낸 것은 분명 김수희 작가였지만, 어느새 최희영 작가의 공로가 되어 있었다.
"진짜 한국대팀 너무 귀여운 것 같아. 예쁜 애들은 예쁜 걸로 관심 끌고. 안 예쁜 녀석들은 안 예쁜 대로 입을 잘 털고. PD님 말대로 쟤들 진짜 상 줘야 해."
최희영 작가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런데 말이에요."
김수희 작가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김태민은 그렇다 쳐도, 새로 등장한 이형원이랑, 그 쇼핑몰 사장이라는 학생 말이에요. 일부러 인터뷰를 특이하게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전 쟤들 보면서 진짜 한국대 학생들은 머리가 좋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에이. 아무리 한국대라도 스무 살 짜리가 뭘 알겠어? 그냥 원래 예술뽕 맞은 관종들이었는데, 갑자기 주목 받으니까 앞뒤 안 가리고 막 지르는 거야. 내가 방송 하루 이틀 해? 갑자기 방송 타는 일반인 중에 저렇게 폭주하는 사람 많아."
"맞아. 저러다 말실수 한 번 크게 하고, 조용히 사라지겠지. 뭐, 쟤들이 사고 쳐주면 우리야 땡큐지만."
김우철 PD와 최희영 작가는 서로 마주보고 웃어댔다.
하지만 김수희 작가는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그녀는 인터뷰를 하면서 이주원을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스무 살에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태도.
그리고 자신을 도발하는 듯한 능글능글한 눈웃음.
왠지 그녀는 팀 수진이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쇼에서 버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또 하루가 밝았다.
그리고 오늘은 모두가 기다리던 결전의 날.
서양화과 1학년 학생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강의실로 향했다.
"후후후후. 왔냐, 이 놈들아."
오늘은 특별하게 이준성 교수가 먼저 강의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의실에는 마치 결투를 앞 둔 서부의 총잡이들처럼 긴장이 흘렀다.
그 긴장을 날려버릴 생각인지, 이준성 교수가 걸쭉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 오늘은 내가 특별히 선물을 가져왔다. 모두 영광으로 생각해라. 아는 후배 놈한테서 아트 하우스 극장표 여섯 장을 강제로 뺏어왔다. 오늘 가장 내 맘에 드는 발표를 한 놈들에게 이 여섯 장의 티켓을 선물하마. 흐흐흐. 네놈들 면상을 보니 몇몇 조는 여섯 장이 다 필요 없을 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노골적으로 우리 1조를 노려봤다.
불쾌했지만 사실이었다.
1조는 어쩌면 티켓 3장으로 충분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준성 교수가 상품이 걸렸다고 선언하는 순간, 나와 유나는 서로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티켓을 받는 조가 이기는 걸로 하자.'
지금은 치열하게 다투고 있긴 하지만, 유나와 나는 이 정도 대화는 눈빛만으로 가능하다.
아무튼.
"자, 반장! 선택권을 주마. 오늘 네놈 조부터 먼저 할 테냐, 아니면 마지막에 할 테냐?"
피식.
평소라면 이준성 교수의 눈빛만 봐도 긴장했을 텐데, 오늘의 김대성은 달랐다.
이준성 교수의 호통에 가볍게 웃음을 흘릴 뿐.
그리고 나와 남동민을 한 번씩 쳐다봤다.
"사실 처음에 하든 마지막에 하든, 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정해야 한다면 마지막에 발표하겠습니다. 다른 조들의 발표를 봐두는 것도 꽤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요."
이준성 교수가 김대성을 향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게 해주마. 그럼 4조! 발표를 준비해라!"
그렇게 4조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4조의 주제는 앞서 들은 것처럼 뮤지컬 영화 '시카고.'
"모두 아시다시피 영화 시카고는 뮤지컬을 영화로 옮긴 작품입니다. 뮤지컬과 영화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뮤지컬은 관객의 자리가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싼 자리에서 더 좋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다릅니다. 카메라가 배우에게 직접 다가가고, 모든 객석에서 거의 동일한 시야를 갖게 됩니다. 결국 영화는 뮤지컬에서 갖지 못한 시각적 평등을 얻어낸 것입니다."
꽤 괜찮은 발표.
그리고 뒤에 이어진 괜찮은 그림.
훗.
하지만 나와 남동민, 그리고 김대성은 여유로운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리 세 남자는 지난 여러 날, 회의하고, 고민하고, 고함치고, 그림 그리며 함께 영혼을 불태웠다.
그렇게 우린 1학년의 괴물 김태민과 싸울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4조도 애썼군. 하지만 이 정도 발표로는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
우리 셋은 우리의 진짜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