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86화 (86/203)

■ 86. 결의 □

이미연은 새로 오픈한 영 아트 코리아의 홈페이지를 보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김태민의 인터뷰 영상이 떠 있었다.

"아오······"

이미연은 김태민에게 시드를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화끈하게 띄워줄 생각이었다.

한 명의 스타 화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재능만으로 부족하다.

그 뒤를 받쳐주는 스토리.

화가를 신비롭고 극적으로 만들어줄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자신이라면 김태민에게 최고의 스토리를 선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미연은 김태민에게 시드를 주고, 주목받게 해주고, 또 필요하다면 이번 경연을 위한 최강의 팀도 제공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태민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멋대로 애송이 친구들과 함께 참여 신청을 했다.

그것도 리더가 아니라 팀의 일부로.

'진짜 이 녀석, 뭘 하자는 거야.'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김태민 정도의 실력과 외모, 배경이라면.

거기다 이미연이 적당히 거들어준다면, 우승까진 아니더라도 충분히 주목받을 것이다.

'어쩌면 벌써 주목받기 시작했는지도.'

어쨌든 쇼는 시작되고 있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개인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최희영 작가가 들어왔다.

그리고 최희영 작가는 진행 상황을 보고 했다.

"홈페이지 반응도 괜찮고, 시드 출연자들에 대한 반응도 좋습니다. 지원자도 몰리고 있고요. 아마 서류와 경력 심사로 상당히 쳐내긴 하겠지만, 벌써 괜찮은 지원자들이 몇몇 보이더군요. 아, 마침 홈페이지를 보고 계셨군요. 그 친구 잘생겼죠? 한국대 팀인데, 제가 직접 나서서 발굴했습니다. 댓글도 많이 달리고, 반응도 뜨겁습니다. 특히 여학생들이 예쁘더라고요."

최희영 작가는 팀 수진이 마치 자기 공로인 것처럼 설명했다.

이미연은 피식 웃었다.

심지어 그 예쁜 여학생 중 한 명은 실제로 본 적도 있었다.

"어린 애들은 원래 다 예쁘죠. 거기다 한국인들은 한국대 여학생이라면 무조건 껌벅 죽으니까."

최희영 작가는 속으로, '한국대 아니더라도 예쁜 건 예쁜 겁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대답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한국대 팀이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초반 시청률 견인은 확실히 제법 해줄 겁니다. 다만, 오래 가지는 못 할 겁니다. 어리기도 하고, 한국대 미대는 사실 책벌레라서 실전에서는 맥을 못 춘다고 하더군요."

최희영 작가의 설명에 이미연은 가볍게 웃었다.

일개 방송작가가 감히 자신에게 미술계에 관해 설명하다니.

"그런데 그 팀에 그 잘생긴 친구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세요?"

"네? 김태민이란 학생 말씀이시죠?"

"그 친구 아버지가 김용철 작가예요. 그리고 그 친구 어머니는 산양 미술관 관장이고요."

"네? 그··· 정말요?"

"그리고 그 친구가 뉴욕 ESL 아트 프라이즈 수상자예요."

"어? 예?"

최희영 작가는 미술 대회 이름까진 몰랐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건 알 수 있었다.

"실장님이 잘 아시는 분이세요?"

"작가님 말씀대로 그 친구들이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강하게 포커스를 주도록 하세요. 그 친구 배경도 적당히 함께 다루고요."

"그, 하지만 부모님이 그런 분들이면 조심해서 접근해야 하지 않나요?"

"괜찮아요. 용철 아저씨는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 아니니까. 작가님은 그냥 작가님 일을 하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사명감을 갖고 일해주세요. 한국 미술계는 병들었어요. 젊은 작가들은 돈 한 푼 없이 고생만하고, 늙은 작가들은 안일하게 앉아서 자기 몫만 밝히고 있어요. 이 쇼가 흥행하면, 미술계에 관심도 늘 테고, 젊은 작가들에게 돈과 기회도 풀리겠죠. 그리고 한국 미술계에 슈퍼스타가 탄생하면, 생각만 해도 얼마나 뿌듯해요? 계속 수고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최희영 작가는 이미연의 사무실을 나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연은 나이는 어리지만, 재벌들 특유의 사람을 내려 보는 위압감이 있었다.

'강하게 포커스를 주라고? 지금보다 더?'

역시 윗대가리들은 언제나 피곤한 존재였다.

* * *

인터뷰가 공개되고 댓글과 주문이 폭주하고 있었다.

바쁘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흥분시키는 그런 각성제 같은 측면이 있었다.

오후.

나는 시간을 쪼개서 사무실로 돌아와 문의사항에 답글을 달고, 제품 사진을 보정했다.

노력 상점의 [잡생각제거]를 사용하면 자칫 일에 집중해 오후 수업까지 빠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알람을 맞춰두고, 일에 집중했다.

따르르릉.

벌써 시간이 된 건가?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고, 이제 학교로 돌아가 오후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찰칵. 찰칵.

고개를 들어 뒤를 보니 어느새 김태민이 들어와 제품 사진을 찍고 있었다.

"태민아, 수업 안 들어가? 같이 택시 타고 학교 가자."

"뭐야? 이제 날 본 거야? 사무실 들어온 지 꽤 됐는데. 진짜 대단한 집중력이다. 난 그냥 수업 재끼고 일 할래."

"안 돼. 네가 그러면 내가 미안하잖아. 같이 수업 가자."

어렵고 힘든 시기를 같이 겪어보면,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알 수 있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태민아, 물어볼 게 있어. 넌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거야?"

수업은 마음대로 빠지고, 그림도 설렁설렁 그리면서 쇼핑몰의 일은 꼼꼼히 해준다.

미스테리였다.

"응? 일은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유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김태민이 웃으며 대답했다.

"점심은?"

"아, 안 먹었어. 점심 건너뛰면 두 시간 채워서 일할 수 있으니까."

"그럼 샌드위치 사서 수업 들어가자."

"아, 생각났다."

김태민이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난, 여기서 열심히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같아. 너랑 유나는 항상 부지런하잖아. 노력해야 할 이유를 찾고, 목표를 정하면 밀어붙이고. 난 그러지 못했거든. 그래서 너희 두 사람을 닮고 싶다고 생각했나봐. 팀 유나에 섞여서 일에 몰두하다보면 뿌듯한 생각이 들어. 나도 할 수 있다, 뭐 이런 거."

"그게 뭐야."

김태민이 내게서 배운다니.

나에게 배우려는 사람도 있다는게 신기했다.

"나는 참치랑, 토마토 베이컨 샌드위치. 두 개 먹어도 되지? 딸기 우유도 마실래."

역시 김태민의 대답은 한 템포씩 뒤로 밀려 있다.

이제 약간 적응이 된 부분.

"그래도 학생이니까, 학교도 빠지지 말자. 특히 이준성 교수 수업은 제대로 해야지. 그림에 대해서는 항상 진지하게 임하자. 잠도 챙겨 자면서. 쉴 때는 쉬어야 그림도 잘 나오니까."

"그럴게."

"맞다. 이준성 교수 과제는 잘 하고 있어? 너희는 무슨 영화로 작업 중이야?"

"응, 우리는 두 편인데···"

그때였다.

"김태민!"

우리 등 뒤에서 날카로운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어엉?"

그리고 당황한 김태민.

"태민아,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했지? 이주원이 분명 널 노릴 거라고 내가 경고했잖아."

"어? 그러네. 유나가 말한 게 이런 거였구나. 넘어갈 뻔 했다."

유나는 날카롭게 날 노려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김태민에게 외쳤다.

"샌드위치는 내가 사줄 테니까, 빨리 가방 챙겨서 따라 나와. 이주원, 너는 따로 와."

"어, 그래. 주원아, 학교에서 보자."

그리고 김태민은 유나를 따라서 뛰어 나갔다.

'이런.'

조금만 더 했으면 유나 조의 영화를 알아낼 수 있었는데.

과연 유나.

나의 전략을 꿰고 있었다니.

하지만 나에게 반항해봤자, 너에게 부과될 나의 소원이 가혹해질 뿐이다.

* * *

그날 저녁.

나, 김대성, 남동민은 다시 회의를 시작했다.

"4조는 뮤지컬 영화 시카고를 다룬대. 무대 미술과 영화 미술의 차이. 음악을 표현하는 영화 미술, 이런 게 주제인가 봐."

남동민이 알아왔다.

"괜찮군요. 시카고라면 영화도 괜찮고, 화제성도 충분하고. 또 음악을 다루는 미술이라면 주제도 개성 있고."

상당히 괜찮은 주제.

하지만 역시 우리의 경쟁자는 김태민, 한유나가 속한 3조다.

"너는? 3조에 대해 정보를 캐는데 성공했어?"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대체 너 뭐하는 거야?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면서 그거 하나 못 알아내는 거야?"

김대성이 나를 다그쳤다.

"워낙 철저하게 숨겨서 알 수가 없어요. 내가 알아낸 건 김태민이 그림 그리고, 매일 유나에게 검사를 맡는다는 겁니다. 유나가 자기 의견을 주기도 하고. 또 태민이는 고분고분해서 유나의 말을 잘 듣습니다."

"우리가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군."

김태민의 그림에 유나의 조언.

누구나 인정하는 1학년 최강의 조합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영화가 두 편이라고 하더군요."

"제길, 우린 한 편도 못 정했는데, 거긴 두 편이라니. 분명 걔들은 영화도 잘 골랐을 거야."

우리들의 얼굴에 좌절이 깊게 드리워졌다.

하지만 위기일수록 좋은 리더가 등장하는 법.

"동민이 형. 제 얼굴을 봐주세요."

"응?"

"형, 만약 제가 영화라면 어떤 장르일 것 같아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남동민은 내 얼굴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저예산 스릴러?"

"왜 그렇죠?"

"그냥 수수하고 별 볼 것 없는 영화인데, 영화가 끝날 때 쯤 뒤통수 치는 반전이 있을 것 같아서 방심을 못할 것 같은 그런 이미지야."

음.

칭찬인지 헷갈리지만, 꽤 정확한 분석 같았다.

남동민이 다시 보였다.

"주원아, 그럼 나는 어떤 영화로 보여?"

남동민이 내게 되물었다.

"80년대 지루한 신파 한국영화요."

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왜 그렇지?"

"글쎄요. 일단 지루한 신파 한국 영화를 본 적도 거의 없는데, 그냥 그럴 것 같아요."

"읔."

좀 잔인한 답변 같긴 했지만, 남동민은 딱히 부정하지 못했다.

"그럼 나는?"

"대성이 형은 썰렁한 조폭 코미디."

"읔."

나의 대답에 김대성은 가슴에 손을 얹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이 과제는 1차는 영화 분석이지만, 2차는 그림입니다. 결국 그림을 그려야 해요. 그런데 우리들 말입니다. 우리는 셋 다 할리우드 걸작 영화가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유명한 걸작 영화를 찾고 있죠. 그게 옳은 걸까요?"

내 대답을 듣고 남동민의 눈이 번득였다.

"역시, 이주원! 네 말이 맞아. 김태민이나 한유나는 누가 봐도 걸작 영화야. 걔들은 걸작 영화를 그릴 자격이 있어. 하지만 우린······"

그리고 남동민은 회상하듯 말했다.

"실은 내가 현역일 때, 인서울 미대에 겨우 붙었지. 내가 재수를 해서 한국대를 노리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안 될 거라고 했어. 그래서 한국대 오고 나서도 현역으로 들어온 녀석들을 꼭 이겨보고 싶었어."

"형, 저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미대 가겠다고 했을 때, 담임선생님이 저보고 제정신이냐고 했어요."

"주원아. 너도 나랑 같은 과였구나."

그리고 남동민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팀이 단결된 기분.

그리고 희미한 단서가 보이는 것 같았다.

"실은 저도 마찬가지에요. 운빨로 한국대 서양화과에 붙었죠. 하지만 모두 비웃었어요. 평생 운을 다 썼다고 학원 동기들이 뒤에서 날 놀렸죠. 학교에서도 괜히 왕따 당하는 것 같고. 그래서 1학년 1학기 마치고 곧바로 군대에 갔죠."

김대성이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사연도 읊기 시작했다.

김대성의 이야기는 별로 알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자기 고백은 멈추지 않았다.

"겨우 제대하고, 다시 시작한 학교 생활은 근사하게 스타트 하고 싶었죠. 그래서 선배 노릇하려고 연설했다가 동민이 형한테 깨지고, 여학생 응원 받고 싶어서 축구 시합 나갔다가 골 먹고, 교수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군대 그림 그렸다가 놀림 당하고. 동민이 형, 주원아. 저도 사실 두 사람과 같은 과인 것 같아요."

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할 말은 많지만, 팀의 단합을 위해 잠시 참기로 했다.

"동민이 형. 형은 강남 대형 미술학원의 전임 강사예요. 그림의 기술만으로는 웬만한 교수들보다 형이 더 뛰어날지도 몰라요."

"응? 갑자기 그 말은···그렇군!"

역시 남동민.

제법 똑똑한 사람이었다.

남동민은 곧바로 내 의도를 간파했다.

"맞아. 내가 김태민을 이기려면 내가 잘 하는 분야로 싸워야 했어. 교수들의 조언을 따라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긴 했지만, 그래 그건 분명 나쁘지 않았어. 하지만 확실히 내가 당장 김태민을 이길 수 있는 부분은···."

그랬다.

남동민의 실기력은 절대 김태민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성이 형은."

잠시 김대성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김태민을 이길 수 있는 김대성 만의 장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고민했다.

그때 남동민이 내 대신 말했다.

"대성이는 뻔뻔하지."

"네? 제가요?"

"맞아요. 대성이 형은 용감하죠. 사람들이 생각만 하고 감히 시도 못할 일들은 형은 아무렇지 않게 시작하죠. 모든 골키퍼는 김병지가 되고 싶죠. 하지만 누구나 달려 나가진 못해요. 하지만 형은 달려 나갔죠. 형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요."

"주, 주원아."

"우리 조는 강해요. 그리고 특별해요. 그러니 우린 이길 겁니다."

나의 연설에 우리 셋의 심장은 뜨겁게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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