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85화 (85/203)

■ 85. 영화 □

"이번 주제는 영화다. 내가 학교 다닐 땐, 책으로 했다. 하지만 요즘 놈들은 책을 안 읽으니까. 그래서 아쉬운 대로, 영화로 과제를 주마. 하지만 영화도 괜찮은 예술이지."

김대성과 같은 조라니.

하지만 빨리 정신을 차려야 했다.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준성 교수의 말에 더욱 집중해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영화는 특이한 예술이다. 소리, 시각, 극.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도를 융합한 장르다. 현대 예술의 결정체라 할 수 있지. 각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들이 보통 사람들을 위해 만드는 가장 쉬운 예술이 바로 영화다. 그리고 영화는 그림과 많이 닮았다."

영화라.

일단 다행이었다.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하긴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그림은 한 순간, 한 장면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개소리다. 그림은 문이다. 하나의 상상, 하나의 감정에 들어서는 문일 뿐이다. 그래서 그림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기승전결이 있고, 그 안에 음악이 있고, 온기와 촉감이 있다. 그러니 그림이 곧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에이.

그건 좀 억지 같았다.

그런 식으로 하면 그림은 세상 모든 게 될 수도 있다.

아무튼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졌다.

보통 서양화과 실기 수업은 한 학기에 3~4개 정도의 과제가 주어진다.

하지만 이준성 교수는 특이하다.

일단 크리틱 시간에 자기가 제일 설치기 때문에 크리틱이 짧다.

그리고 학생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기 때문에 사정없이 과제를 몰아친다.

이번은 벌써 다섯 번째 과제.

하지만 지금 속도라면 이번 학기에만 6번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자, 이번 주제는 영화. 그리고 조별 과제다. 한 편, 혹은 그 이상의 영화를 정해서 분석하고, 정리해서 PPT로 발표해라. 그리고 화가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발표를 부연해줄 그림을 그려라. 몇 점을 가져올지는 알아서 해라. 화가들은 그림만 그리고 말은 못해도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바보들도 예전엔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말 못하는 화가들은 굶어죽기 십상이다. 그러니 발표도 신경 써서 해라."

발표라면 내가 잘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유나의 조도 만만치 않다.

유나도 발표를 잘하지만, 김태민도 할 때는 한다.

게다가 그림도 있다.

김태민의 유일한 약점은 설렁설렁 그린다는 것.

하지만 똑순이 유나가 옆에서 김태민을 몰아붙이면?

감당 못할 괴물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명치 한 대 맞더라도 소원 쿠폰을 쓸 걸 그랬나. 괜히 아끼다가······'

욕심이 과했던 것일까.

슬쩍 유나의 눈치를 살폈다.

유나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마 대한민국 미대생 중에 조별 과제를 받고 좋아하는 사람은 한유나가 유일할 것이다.

"자, 이번 학기도 끝나간다. 조별 과제인 만큼 가장 비중 있는 점수를 매기겠다. 그만큼 제대로 못할 경우에는 푸짐하게 욕을 먹을 각오를 해라. 정신 차리란 말이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다.

"주원아. 우리 잠깐 회의하자."

그리고 남동민이 나와 김대성을 붙잡았다.

좋죠.

합시다, 회의.

나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모두가 떠난 강의실.

나, 김대성, 남동민이 남았다.

"하하하. 제 생각엔 우리 1조가 최강인 것 같습니다. 동민이 형은 아직 1등을 못해봤지만, 나하고 주원이는 1등을 해봤으니까요. 셋 중 둘이 1등 유경험자. 1등도 해 본 사람이 하니까요. 하하하하."

김대성이 큰소리로 웃어 재꼈다.

그리고 찌릿.

남동민이 김대성을 노려봤다.

'역시 매를 버는 타입.'

뭐, 그래도 남동민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주원아, 좋은 생각 있어?"

남동민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남동민 역시 강력한 실력자.

하지만 크리틱 과제에서는 괜찮은 성과를 못 내고 있었다.

그래서 남동민은 승리에 목말라 있었다.

'음. 영화를 분석하고, 그림으로 그린다.'

그렇다면 일단 영화의 선정이 중요할 것이다.

"하하하, 형님. 그리고 주원아. 제가 딱 해답을 드리겠습니다. 깊이 생각할 게 뭐 있습니까? 일단 검색해서 칸느, 아카데미 미술상 수상작을 알아보는 겁니다. 거기서 괜찮은 거 하나 골라서 셋이 같이 영화 감상하는 거죠. 그리고 발표를 준비하고, 그림 그리는 겁니다. 어때요? 쉽죠?"

"아니요. 그렇게 해서는 절대 김태민이나 한유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내가 책상을 두드리며 강하게 외쳤다.

"단순히 분석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 과제의 완성은 그림입니다. 그림이라면 머리로만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정말 재미있게 본 영화, 그리고 우리에게 의미 있는 영화를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대성이 형이 말한 방법은 다른 조들도 생각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나는 한 번 더 강조해서 외쳤다.

"태민이 그림에는 플러스알파가 있습니다. 우리도 뭔가 특별한 걸 노리지 않는다면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나의 강력한 주장에 실실 거리던 김대성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동민이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대단하군."

"네?"

"김태민의 절친인 줄 알았는데, 주원이 네가 이렇게 승부에 집착하다니. 넌 항상 이런 자세로 과제에 임했구나. 그래서 결과물이 좋았던 거야. 어린 동생이라 편하게 생각했는데 이런 자세는 배워야겠군."

끄덕끄덕.

남동민이 감탄한 얼굴로 말하자, 김대성까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내가 늘 진지하게 과제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번엔 특히 중요하다.

"주원이 말이 옳아. 특별한 영화를 골라야 해. 안 그러면 김태민을 이길 수 없다. 대성아. 너한테 잊지 못할 영화는 어떤 게 있지?"

"잊지 못할 영화요?"

"영화를 볼 때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히고, 자기도 모르게 화면에 빨려 들어간 영화요."

김대성이 이해하기 쉽도록 내가 설명까지 해줬다.

"음...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끄덕끄덕.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였죠. 이젠 휴가를 나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용돈도 별로 없고, 그래서 비디오 가게에 가서."

"대성아, 그냥 영화 제목만 말해."

"제가 가장 충격을 받은 영화는 원, 원초적 본능이요. 전 사실 동양인 여배우를 더 좋아하지만, 샤론 스톤 누님을 보고 숨이 멎는 줄······"

졌군.

큰일이다.

나는 빠르게 김대성을 포기했다.

"동민이 형은요?"

"으...그게. 나는 액션만 좋아해서. 내가 생각나는 영화라고는 터미네이터, 다이하드······"

나 역시 마찬가지.

난 주로 옛날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단순히 좋아하는 정도였지, 크게 의미를 둔 적은 없었다.

이번 과제는 쉽지 않아보였다.

* * *

[영 아트 코리아]는 예술을 다루는 프로그램.

그런데 한국인들이 이렇게 예술에 관심이 많은지 몰랐다.

출연자 모집 광고가 뜨고, 우리의 인터뷰도 실리자, 하이 유나 사이트와 C마켓에 댓글이 폭주하고 있었다.

"으악. 이걸 어떡해."

수진 선배가 비명을 질렀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달려갔더니 이번엔 댓글이 아니었다.

우리가 1학기 때 촬영한 동영상의 링크가 퍼지고 있었다.

"이건 또 어떻게 찾아낸 거야."

네티즌 수사대의 위력은 가공할만했다.

[ 이번 영 아트 참가자, 조별 과제 영상 (여주 예쁨 주의)]

[ 헐, 한국대가 이렇게 병맛으로 노나요. 귀여워.]

[ 설마 저 시체 분장이 그 잘생긴 오빠인가요? 시체가 어렴풋이 잘생겼어.]

그런데 과연 오빠일까?

김태민은 겨우 스무 살인데, 자꾸 잘생긴 미대 오빠로 몰아가고 있었다.

[ 와, 진짜. 웬만한 연예인들 뺨치게 예쁘네. 거기다 한국대. ㄷㄷㄷ]

댓글의 대부분은 수진 선배 칭찬.

[ 헐, 저 늙은 흡혈귀가 그 돈 밝히는 쇼핑몰 사장 맞죠? 배역이 딱 맞아 떨어지네요. 성격보고 배역 맞긴 듯. ]

만세!

드디어 내 언급도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반갑다니.

아무튼.

수진 선배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자기 영상이 공개되어 난처한데, 마냥 난처해하기에는 대부분 예쁘다는 칭찬이었다.

정말 어쩔 줄 모르겠는 상황.

"이거 어떡하지? 김진기 교수님한테 전화해서 영상 내려달라 할까?"

"수진아. 이미 늦었어."

그런데 댓글뿐만이 아니었다.

주문도 같이 늘고 있었다.

[ 방송 보고 찾아가봤는데 거기 옷 생각보다 예쁘던데요? ]

[ 원래 거기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곳이었어요. 자체 생산 옷이랑 이벤트 상품이 종종 올라오는데 싸고 좋아서 평이 좋았어요. ]

이런 후기까지.

역시 평소에 이미지 관리를 잘 한 보람이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자체 생산한 옷은 레이어드 티와, 유나 재킷, 수진 하프 코트.

후드 티는 지금 공장에 들어가 있는 상태.

그 중 유나 재킷은 벌써 세 번이나 생산했다.

그래서 재고만 팔고 내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방송을 타면서 뜻밖에 주문이 폭주해버렸다.

[ 알립니다. 자체 생산품인 유나 재킷은 주문 폭주로 인해 배송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그렇게 서둘러 팝업창을 띄웠지만, 계속해서 주문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재킷 공장에 전화를 걸었다.

"어어, 이 사장. 점심은 먹었나? 무슨 일이야?"

유나 재킷과 수진 코트를 생산하는 도남 의류의 김 사장이 전화를 받았다.

원래 분명 공장에 주문하는 우리가 갑이었다.

하지만 큰 주문도 아니었고, 또 처음 하는 자체 생산이라 모르는 것도 많았다.

그래서 공장의 김사장이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다.

그리고 우리는 어린 대학생들.

그러다보니 김사장은 우리한테 조금씩 말을 놓았고,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했다.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반말을 허락한 적은 없었다.

'뭐, 그래도 옷은 잘 만드니까.'

나는 큰 불만은 없었다.

"네, 안녕하세요. 추가로 주문을 하려고요. 공장 일정을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습니다."

"어, 하프 코트가 벌써 다 팔렸어? 얼마 전에 400벌 해갔잖아? 이번엔 빨리 팔았네."

약간 의외라는 말투.

마치 열심히 하는 꼬마를 칭찬하는 것 같았다.

"하프 코트 말고 재킷이요."

"어? 그걸 또 하게? 이제 시즌 바뀌는데 좀 참지 그래? 괜히 욕심 내지 말고. 재고 쌓아두면 안 좋아. 내년에 해."

"그게 주문을 받아버려서요."

"에이, 그냥 환불해줘. 우리도 바빠서, 소량 생산은 시간을 못 맞춰."

"그게 소량이 아니라······."

"소량이 아니면 몇 벌이나 하게?"

"실은 1200벌 정도 주문하고 싶은데요."

"어? 어? 1200벌?"

"공장이 많이 바쁜가요?"

"아니, 그...그게. 아냐, 안 바빠. 1200벌이면 해야지!"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거든요. 주문 들어온 게 많아서요. 공장이 많이 바쁘면 반만 드릴까요? 나머지는 다른 공장에."

"아니야. 이사장. 내가 할게.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야근하고, 주말까지 특근 부탁해서 늦어도 보름이면."

"보름이나요? 너무 늦는데. 열흘 정도면······"

"아니, 이거. 최대한 맞춰 볼게. 그리고 생산된 옷들은 내가 미리미리 퀵으로 보낼게."

김사장이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졌다.

"검수를 좀 신경 써주셨으면 해요. 안 그래도 태민이가 실밥이랑 불량 체크 때문에 고생했거든요. 옷은 괜찮은데, 안쪽이 지저분해서."

"아? 그래? 옷이 지저분했다고? 미안해. 내가 더 신경 쓸게. 최대한 깨끗하게 보낼게. 아예 검수 담당을 한 명 더 붙일게."

"그래요. 신경 좀 써주세요. 그리고 재킷 끝나고 곧바로 하프 코트도 추가 생산하고 싶은데······"

"하프 코트도? 어, 얼마나요?"

"그것도 1200벌이요. 그런데 괜히 너무 서두르다 옷 대강 만드시면 안 되는데."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최선을 다할게. 믿고 맡겨줘요. 이 사장."

어느새 김사장의 말이 높임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럼, 다섯 시 전에 원단을 보낼게요. 늦지 않게 작업해주세요."

"그래. 최선을 다할게요. 일을 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감사인사까지 받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갑을 되찾아서, 소소하게 기뻤다.

지금 주문 들어온 옷만 해도 재킷과 하프 코트를 합치면 1300벌이 넘었다.

자체 생산 재킷과 코트는 마진이 높은 편.

세금이니, 배송비니 전부 제해도, 아무리 작게 잡아도 벌당 만원이상의 마진이 남는다.

거기다 다른 옷들까지 같이 팔리니까.

인터뷰가 공개되고 겨우 며칠 사이에 순이익이 1300만원 넘게 발생한 것이다.

팀 유나는 다섯 명이니까 1인당 250만원의 순이익.

방송 전에 최대한 상품을 늘리기 위해 팀 유나는 모두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매출이 폭발적으로 느는 게 눈으로 보이니까, 아무리 일해도 모두들 지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해주는 모습이 너무 고마웠다.

아무래도 조만간 보너스를 두둑하게 지급해야 할 것 같았다.

"자, 자! 오늘도 힘내서 일하자고요! 모두 파이팅!"

조별 과제가 주어진 이후, 활기를 되찾은 유나가 팀을 독려했다.

유나가 즐거워 보여서 나도 흐뭇했다.

'그래, 유나야. 지금 이 순간을 즐기렴.'

나도 유나가 웃는 게 좋다.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좋았고.

하지만 절대 소원은 포기 못한다.

나는 이주원이다.

포기를 모르는 크리틱의 남자.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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