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84화 (84/203)

■ 84. 전쟁모드 □

어머니는 잘 지내고 계셨다.

안심이 되기도 하고, 어머니가 조금 자랑스럽기도 하고.

어머니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 분인 것 같았다.

"아, 엄마. 그리고 나 그림 팔았어요."

나는 따로 만든 통장에 넣어둔 300만원을 보여드렸다.

그리고 여행에 대해서도 말씀 드렸다.

"새로 출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당분간은 못 가지."

그래도 내 말만 듣고도 좋으신 것 같았다.

실은 방학이 되면 어머니를 모시고 잠깐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방송 이야기가 나오면서 정확한 일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엄마도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미리 생각해 두세요. 나중에라도 같이 다녀와요. 친구가 그러는데, 처음 그림 팔아서 번 돈은 의미 있게 써야 한 대요. 평생 생각나기 때문에."

어머니는 웃으며 알겠다고 하셨다.

통장만 봐도 흐뭇하신 모양이었다.

같이 웃으며 저녁을 먹고, 해외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보통의 집안에서는 흔한 대화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에게는 한 번의 인생을 겪고 나서 겨우 얻어낸 대화였다.

힘들게 얻은 기회인만큼 절대 함부로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차로 서울로 돌아오기 직전.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아, 맞다. 나 텔레비전에 잠깐 나올지도 몰라요."

"응? 웬 텔레비전?"

"그러게 말이에요. 아무튼 잘 할게요."

이렇게 포항도 마무리.

그리고 하이 유나는 전쟁 모드에 돌입했다.

찰칵. 찰칵.

오피스텔은 새벽까지 신상 상품 촬영했고, 또 촬영한 사진들을 포토샵으로 보정했다.

유나와 수진, 정화 셋은 낮 동안은 모델을 하고, 밤이 되면 쉬지도 않고 곧바로 동대문 사입을 나갔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 폭풍이랄까.'

쇼핑몰을 시작하고 이렇게 바빴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노력 상점]의 기능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미친 듯이 일을 해치워 나갔다.

그리고 어느 새 내 방의 소파베드는 두 개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팀 유나 세 명은 화장도 제대로 못 지우고, 담요를 뒤집어쓰고 쪽잠을 자곤 했다.

미안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이 노력들이 제대로 보상받으려면.'

내가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팀의 리더는 부담되는 동시에 짜릿하고 즐거운 자리였다.

방송이든 아니면 그 어떤 일이든, 나는 잘 해쳐나가서 나의 팀원들이 충분한 성과를 누리도록 만들 것이다.

* * *

그리고 드디어 영 아트 정식 홈페이지가 오픈했다.

우리 다섯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웹사이트에 접속했다.

[ 대한민국의 젊은 예술가들을 초대합니다. 젊은 예술가들의 기회의 무대. 영 아트 아메리카,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습니다. ]

예술을 주제로 한 경연 프로그램은 종종 있어왔다.

스쿨 오브 사치, 아트 오브 워크 등등.

하지만 그 중 영 아트가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차이점은 팀플레이라는 것.

팀이 모여 움직이는 만큼, 한정된 시간에 역동적인 작품이 가능했다.

그리고 어려운 현대 미술 대신 상대적으로 쉬운 주제를 다룬 점도 성공의 요인.

게다가 거액의 상금까지.

TJ 그룹의 채널 컬처온은 그런 영 아트 아메리카의 장점들을 살리면서, 한국색을 입히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한 모양이었다.

영 아트 코리아의 홈페이지가 열리자마자 인기 영화배우인 유인호의 얼굴이 크게 떠올랐다.

[ 젊으니까, 도전하세요. 당신의 젊은 피가 한국 예술을 젊게 만듭니다. ]

"유인호다!"

유명 배우가 등장하자, 팀 유나 세 명이 동시에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뭐야, 저 느끼한 놈은.'

유인호는 탑클래스의 영화배우.

외모도 괜찮지만, 연기로도 인정받는 배우였다.

거기다 특이하게, 벌어들인 돈으로 미술관을 인수했다.

그리고 자기가 속한 창작 크루의 전시를 열었다.

사실 그런 그의 시도를 안 좋게 보는 이도 많았다.

'이른바 아트테이너.'

연예인 예술가들은 특권을 가지고 출발한다.

그들의 작품은 과도하게 관심을 받고, 부풀려진 가격이 매겨진다.

그것만으로는 딱히 나쁘지 않지만, 아트테이너들이 누리는 관심은 종종 다른 젊은 예술가들의 기회를 빼앗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그들은 예술에 관심 없던 사람들을 미술관으로 불러 모은다.

굳이 찬성과 반대 입장을 정해야 한다면,

'나는 찬성하는 편.'

아트테이너의 영향력을 떠나서, 예술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그들이 누구였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제 3자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아트테이너들이 특권을 누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람들이 없어진다고 미술계가 평등해지는 것은 절대 아닐 테니까.

[ 지금 지원하세요! 영화배우 유인호와 함께 채널 컬처온이 새로운 스타를 기다립니다! ]

그리고 정화 선배가 빙그레 웃으며 지원자 인터뷰를 클릭했다.

우린 시드 배정자는 아니었지만 먼저 참여가 확정된 지원자였고, 그래서 우리의 인터뷰도 구석에 실렸다.

딸깍.

먼저 정화 선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 우린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들이고요. 학교에서는 그림을 배우지만, 수업을 마치고는 옷을 팔아요. 단순히 파는 것만 아니라, 직접 옷을 만들기도 해요. ]

그리고 탁자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김태민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김태민은 그림을 그리면서 고민하고, 수진 선배와 심각한 얼굴로 대화했다.

그리고 나중엔 완성된 하프 코트를 보며 수진, 유나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오올, 우리 태민이."

"저건 내가 아닌데."

김태민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영상으로만 보면, 김태민은 경력 10년차 패션 디자이너로 보였다.

[ 새벽 일찍 동대문에 가면, 부지런히 일하는 상인들을 보며 많은 걸 배워요. 열정을 충전하는 느낌이죠. 우린 우리가 배운 열정을 이번 기회에 증명하고 싶어요.]

그리고 유나의 인터뷰.

수진 선배는 제대로 된 대답은 몇 개 없었지만, 얼굴과 포즈만으로 충분히 임무를 마친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인터뷰가 떴다.

[ 지금까지 참여가 확정된 팀 중 가장 어린 팀인데, 특별한 각오가 있을까요? ]

[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들은 늘 주변을 관찰하고, 생각에 잠겨 있죠. 그래서 부지런한 예술가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나이들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 대회는 나이가 아니라, 열정의 승부라고 믿습니다. 열정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

[ 상당한 자신감인데요? 쇼핑몰을 시작한 이유가 있을까요? ]

[ 일단 돈이요? 돈은 중요하니까요. ]

[ 친구들이 하나같이 예쁜데, 그래서 쇼핑몰을 생각했나요? ]

[ 네, 모두 예쁘죠. 그래서 같이 있으면 즐겁습니다. ]

어라? 내 인터뷰가 조금 달라진 느낌이었다.

난 분명 길고 장황하게 설명했었는데, 내 답변은 짧고 간단했다.

"뭐야, 이주원. 우리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주원이는 돈을 좋아하는 구나."

내 인터뷰를 보고 수진, 정화 선배가 중얼거렸다.

설마 이런게 그 말로만 듣던 악마의 편집인가?

'이렇게 나왔단 말이지.'

컬처온은 잠자는 이주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런데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전생에 이런 비슷한 쇼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출연자들이 관심을 받고, 어떤 출연자가 미움을 받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적당히 컨셉을 잡고 이목을 끈다면?'

어차피 수진, 태민 등이 우리의 좋은 이미지를 철저하게 담당해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조금 설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의 쇼가 시작되었다.

* * *

영 아트 광고와 모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우린 잠시 한국대 서양화과의 반짝 스타가 되었다.

호기심과 흥미가 뒤섞인 시선.

그래도 학교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이 우린 지친 몸을 이끌고 강의실로 갔다.

오늘의 수업은 기초 서양화 2.

일이 아무리 바빠도 우린 학교는 빠지지 않는다.

거기다 이준성 교수의 수업이라면 한 번 빠졌다가 죽도록 욕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강의실로 들어가기 직전.

"그런데 이주원, 잠깐 할 말이 있어."

"응?"

유나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김태민이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자, 유나가 짧게 말했다.

"넌 먼저 들어가 있어."

"그, 그럴게."

김태민이 들어가고 유나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왜 그래? 갑자기."

"이주원, 한 판 더 해."

"응? 뭘?"

설마 소원 내기?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생글생글 약올리며 대답했다.

"설마 다시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시끄러. 네가 내 심정을 알아? 너한테 진 것만 해도 분한데, 목에 사슬이 감긴 기분이야. 한 판 더 해."

굳이, 내가 뭐 하러?

난 소원 한 개로 만족했다.

혹시 지기라도 하면 기껏 잡은 기회도 날아간다.

그런데 도저히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좋아. 그럼 한 번 더 해. 대신 네가 좋아하는 예술적 진정성을 걸고, 어떤 소원이든 무조건 들어주기야."

나는 '어떤 소원이든'을 강조해서 말했다.

유나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두 번째 내기가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크리틱의 달인.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소원 두 개를 얻어내 유나를 옭아매버리겠다.

그리고 우린 강의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교실에 앉아서, 유나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쿵쿵쿵.

오늘도 변함없이 시끄러운 발걸음과 함께, 이준성 교수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흐흐흐. 너희들. 잘 봤다."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이준성 교수가 먼저 나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열정이라면 지지 않겠다고? 흐흐흐."

수업시간에 이렇게 공개적으로 놀리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이준성 교수가 강의실을 향해 말했다.

"영 아트 말이다. 그 쇼를 기획한 실장이 내게 묻더군. 젊은 예술가들을 상대로 하는 경연을 준비 중인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반대라고 대답했다. 해외에서 성공한 쇼라도 한국 정서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지."

왜지?

나는 거액의 상금을 건다는 것만으로 젊은 작가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은 미국과 달라. 미술 쪽 시장도 작고, 경쟁도 공정하지 않지. 많은 미술가들이 제대로 된 보상 없이 자신을 희생해서 예술을 영위한다. 그런데 거기다가 거액의 상금을 건 쇼를 하겠다고? 그럼 이제까지 대가없이 노력한 사람들은 뭐가 되지? 하지만 그 여자는 자신만만하더군. 뭐, 나도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너희들. 한 번 나간 이상, 제대로 휩쓸고 와라. 너희 세 놈이라면 제법 잘 할 거다."

끄덕끄덕.

나 역시 마찬가지.

한 번 나간이상 최선을 다해 휩쓸 생각이다.

"자, 그건 그거고, 우린 수업을 해야지. 흐흐흐.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조별과제다."

응?

갑자기 조별과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출석부를 들여다보고 중얼거렸다.

"어디보자, 한 놈 두 놈, 모두 열두 놈이군. 그럼 딱 세 명 씩 네 조 만들면 되겠군."

이준성 교수는 강의실을 쳐다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보통 조별 과제를 하면 좋은 사람들끼리 뭉치지.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지가 않잖아? 언제나 좋은 사람들하고만 일할 순 없는 법이다. 그러니 오늘은 특별히 내가 너희들 조를 직접 정해주마."

아아아악!

학생들이 저항의 함성을 질렀지만, 이준성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 그럼 출석부대로 세 명씩 건너뛰면 되겠군. 먼저, 1조는 김대성, 남동민, 이주원이다."

엌.

"그리고 3조는 김태민, 장현우, 한유나."

어엌.

김태민과 한유나.

최강의 1학년이 한 조에 들어갔다.

내게 조금 큰 일이 생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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