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마님 □
아침 9시.
김태민은 전화벨 소리에 늦잠에서 일어났다.
발신자는 이미연.
"누나. 아직 300만원 못 모았어요."
끄응.
이미연은 김태민의 대답을 듣고 찌푸렸다.
"그것 때문에 전화를 건 게 아니라, 아니 설마 지금까지 잔거야?"
김태민은 그 말을 듣고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아, 누나. 깨워줘서 고마워요. 지각이다."
"아니, 태민아. 잠깐만.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전화한 거야."
"짧게 말해요. 학교 늦었으니까. 그리고 300만원은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이미연은 전화기를 붙잡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김태민과의 대화는 가끔 머리가 아플 때가 있었다.
"실은 미술을 다루는 텔레비전 쇼를 기획하고 있어. 상금이랑 특전도 많고, 여러 저명한 평론가들도 같이 나올 거고, 좋은 기회가 될 거야. 그리고 넌 특별히 시드를······"
"안 해요."
"응? 아니, 거절하기 전에 더 자세한 이야기를······"
"싫어요."
"아니, 내가 친구들을 안 좋게 말해서 기분이 나빴다면, 그건 내가 사과할게."
"알면 됐어요. 그리고 뭔지 몰라도 누나 제안은 거절할게요. 제가 바쁘거든요. 학교 가야 해서 끊을 게요. 300만원은 모으고 있으니까 몇 달만 기다려줘요. 그럼 이만."
그리고 김태민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미연의 전화를 이렇게 끊어버린 남자는 김태민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미연이 누군가에게 사과를 한 것도 거의 처음이었다.
아오······.
이미연은 잠시 자리에 앉아 분노를 억눌렀다.
* * *
이곳은 하이 유나 사무실 겸 내 오피스텔.
방금 배송된 택배 박스를 뒤지던 정화 선배가 성난 얼굴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하이 유나인데, 배우 이세희씨 코디 맞으시죠?"
"네, 맞는데요?"
"지금 전에 협찬 드렸던 옷들이 돌아왔는데요, 옷들이 훼손이 심각해요. 그리고 재킷 한 벌과 코트 한 벌, 스커트 한 벌은 아예 보이지도 않네요."
하이 유나가 꽤 규모를 갖춘 후에 신인 연예인들이 협찬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협찬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보통은 간단한 촬영용 의상을 빌려주는 것이다.
다시 돌려받은 옷은, 입은 흔적이 없는 경우는 재판매하기도 했고, 하이 유나 직원들이 갖거나 아니면 다른 재고와 함께 기부를 하기도 했다.
사실 연예인 협찬을 나간 옷들은 이미 어느 정도는 포기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포기와는 별개로, 빌려준 옷이 없어지거나 손상되어 있으면 절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실수로 한두 벌이 빠지거나 손상 되었으면 넘어갈 수 있었지만 오늘은 상태가 심각했다.
그래서 우리 중 가장 강력한 정화 선배가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
하지만 분노한 정화 선배와 반대로 전화를 받는 상대는 느긋한 목소리였다.
"입었던 옷들이 훼손되는 경우는 당연한 거잖아요? 그런 경우도 예상 못하고 협찬 주셨어요? 저희 세희 배우, 이번에 촬영은 잘 나왔으니까 사진 나오면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아니, 이보세요. 그럼 처음부터 옷을 구매를 하시던가요. 훼손이 당연하면 협찬을 요구하면 안 되죠. 잘 돌려주겠다고 말씀하셔서 협찬 드린 거잖아요."
"하아. 그쪽이 어리고 쇼핑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 모양인데 촬영하다보면 일이 길어질 때도 있고, 뜻대로 안 될 때도 많아요. 저희가 일일이 다 책임질 순 없잖아요? 급하게 옷 갈아입다보면 좀 늘어날 수도 있지, 옷 몇 벌로 바쁜 사람 붙잡고 치사하게 굴지 말죠?"
정화 선배의 정신 건강을 위해 내가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그래요. 양쪽 모두 치사하게 굴지 않기로 하죠. 저희도 바쁘니까요."
"하아, 사장님이세요. 이제야 말이 통하네요. 그럼 전화 끊어도 되죠?"
"아뇨. 제 말을 끝까지 들으시죠. 훼손된 옷은 저희가 넘어갈 테니, 그쪽도 옷 몇 벌로 치사하게 굴지 말고, 사라진 옷들은 정산해주시죠."
전화기 너머에서 기가 차다는 듯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작은 사이트고, 연예인이랑 일할 기회가 적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이 바닥 좁거든요? 옷 몇 벌로 이렇게 행동하시면 앞으로 연예인 협찬 못하세요."
"저희가 작은 사이트인 것은 맞지만, 그쪽도 작은 사이트나 기웃거리는 신인 배우인 것 같은데 벌써 인기 스타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다른 연예인들도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남의 물건을 함부로 다룬다면 저희도 협찬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사라진 옷들의 가격만 정산해주시죠? 신인 배우지만 그 정도는 정산해주실 수 있죠?"
"이봐요!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전화기에 대고 코디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사실 협찬 때문에 연예인과 쇼핑몰이 싸운다는 소문은 종종 들었다.
그런데 직접 겪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크리틱으로 단련된 미대생.
어떤 상황에도 이성을 잃지 않는다.
"그쪽이 잘 모르시나본데, 뉴스도 안 보세요? 이번에 우리 세희 배우 영화 들어가거든요? 세희 배우 뜨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한 말 당장 사과해요!"
"뉴스가 아니라 연예 기사겠죠. 아직 영화 촬영 끝나기도 전에 배우 본인도 아니고 담당 코디가 이렇게 스타 노릇을 하시면 빨리 관계를 정리하는 게 저희로서는 나을 것 같은데요?"
"말이면 다 말인 줄 알아요! 보자보자 하니까! 그 까짓 거 몇 푼이라고! 계좌랑 옷 원가 불러요! 당장 입금하면 되잖아요!"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고래고래 고함쳤다.
"원가는 무슨. 도매가로 옷을 드리는 건 저희가 협찬 드릴 때 이야기입니다. 우린 더 이상 그쪽과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옷의 정가를 찍어드리겠습니다."
"정말 치사하게 굴 거예요?"
"치사하다니요. 그 까짓 거 몇 푼이라고. 옷의 정가는 유류비, 인건비, 세금 등이 포함된 저희의 정당한 권리입니다. 앞으로 스타가 되실 분이 겨우 그 몇 푼으로 우는 소리를 해서 되겠습니까?"
"입금하면 되잖아!"
딸깍.
그리고 전화가 끊겨버렸다.
대부분 협찬은 별 사고 없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정말 있다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내 옆에서 정화 선배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 진짜 연예인들! 방송이 무슨 벼슬이라고! 아오! 야, 한유나! 이수진! 안되겠다. 너희들 연예인 해라. 니들이 미모로 쟤들 응징해버려!"
유나가 옆에 있다가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언니, 언니가 직접 응징하세요. 언니도 예쁘잖아요."
그렇게 안기면서 정화 선배의 화를 달랬다.
그런데 그때.
수진 선배의 전화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인지 잠시 고민하던 수진 선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제가 이수진인데요. 방송국이요? 김진기 교수님이 이 번호를 가르쳐주셨다고요? 블로그요?"
수진 선배는 특유의 약간 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다 수진 선배가 깜짝 놀랐다.
"네? 그 영상을 보셨다고요? 그게 아직 블로그에 있어요?"
아마도 1학기 때 촬영했던 이어지는 사진 영상인 것 같았다.
김진기 교수는 학생들의 과제를 자기 블로그에 올리곤 했고, 이 바닥에선 나름 유명한 블로그라고 들었었다.
수진 선배는 한참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어리버리 헤매면서 변명도 하고 거절도 했다.
그러다 결국 자기 이메일을 불러주고는 시간 약속까지 잡아버렸다.
그리고 오피스텔 주소까지 불러주고 말았다.
"네, 그럼. 그때 뵐게요."
전화를 끊고 수진 선배는 멍하니 있었다.
"누나. 무슨 일이예요?"
"어, 그게. 우리보고 방송에 나와 달래."
정화 선배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수진 선배를 쳐다봤다.
"무슨 대회를 하는데 상금이 3억이래. 팀 수진 동영상을 재밌게 봤다고 우리보고 꼭 나와 달래."
"3억이요?"
유나는 최근 300만원 돈의 맛을 보고 며칠을 설레는 기분으로 지냈다.
그런데 지금 그 딱 100배의 금액이었다.
긁적긁적.
수진 선배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컴퓨터 앞에 앉아 자기 이메일에 접속했다.
"어, 벌써 보냈네."
수진 선배가 링크를 클릭하자 '영 아트 코리아'의 설명이 주르륵 떠올랐다.
"진짜 방송이네."
정화 선배가 화면을 읽으며 중얼거렸다.
* * *
수진, 정화 선배. 나와 유나는 탁자에 둘러 앉아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노트북에는 영 아트 아메리카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크리틱을 방송에서 하는 거네요. 그런데 상금이 걸렸고, 심사위원이 교수가 아니라 유명 평론가들이네요."
유나가 대회를 간단히 요약했다.
"응, 그리고 상금이 좀 크네. 3억이랑 유학비용이랑, 유명 작가랑 콜라보 전시랑, 끝도 없네."
방송 채널은 TJ 계열사인 컬처온.
그리고 후원사엔 TJ 대준문화재단의 이름이 선명히 박혀 있었다.
그렇다면 이준성 교수의 전시에서 본 그 젊은 이사가 관련 있는 게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생에 텔레비전 쇼도 자주 봐둘 걸.'
전생의 지금이라면 한창 일과 아르바이트, 그리고 전공의 고민으로 바쁠 때였다.
텔레비전 볼 시간은커녕, 자취방에 텔레비전도 없었다.
사실 전생 내내 나는 텔레비전을 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경연 프로그램들이 여러 종류 우후죽순 생겨난 것은 알고 있지.'
내 기억이 맞다면 경연 대회의 상위권 중 일부는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상당수는 악마의 편집 등으로 방송에 이용만 당하고 소리 소문 없이 잊혀졌다.
그때 정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이거 하자. 이건 하늘의 뜻이야. 그 이세희 코디에게 복수하라는 하늘의 뜻. 생각해 봐. 전에도 얼짱 마케팅 이런 것 있었잖아? 방송에 잠깐만 나오고 쇼핑몰이 매출이 몇 배나 올랐데."
역시 계산이 빠른 정화 선배.
거기다 지금은 분노한 상황이라 의욕이 넘쳤다.
음.
하지만 나는 신중했다.
지금 이 상황만으로 우린 잘하고 있었다.
특히, 나는 평범한 스무 살이 아니었다.
내 안에는 아재의 영혼이 있었고, 하이 유나의 동료들에게 강한 책임감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돈 몇 푼보다는 내 친구들과 그들의 생활을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그러니 쇼핑몰 홍보를 위해서라면 굳이 알 수 없는 대회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수진 선배가 말했다.
"정말 우리가 방송에 나가면 쇼핑몰 매출이 늘어?"
"아마도?"
수진 선배의 말에 정화 선배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럼 하자."
수진 선배의 단호한 대답.
수진 선배가 이렇게 분명히 자기 의견을 말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전에 팀 수진으로 팀명을 정하자고 할 때,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했었지.'
그때 이후 거의 몇 달 만이었다.
"실은 할 말이 있어. 난 하이 유나가 지금보다 훨씬 커졌으면 좋겠어. 나, 사실 이번 학기 휴학하려고 했었거든. 아버지 회사가 최근에 조금 어려웠고, 또 오빠가 이제 복학이라서 집에서 대학생 둘을 지원할 수 없다고 했거든. 그런데 하이 유나가 생긴 거야. 갑자기 알바하면서 학교 다닐 수 있는 곳이 생긴 거야. 그리고 유나는 방도 같이 써 주고."
수진 선배에게 그런 사정이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방을 같이 쓰는 유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앉은 자리에서 수진 선배의 손을 붙잡았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난 수진 선배를 원망했었다니.'
내가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또."
수진 선배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니들도 알잖아. 내가 좀 어리버리 하고 일머리도 없는 거. 그런데 하이 유나에서 일하면서 일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어. 동대문에서 옷도 잘 본다고 칭찬 듣고. 또 댓글로도 예쁘다고 칭찬 듣고. 하이 유나는 그냥 알바가 아니라, 내 자존심을 충전하는 곳이야. 그래서 이 대회 나갔으면 좋겠어. 우리가 얼마나 방송을 탈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하이 유나에 도움이 된다면 꼭 했으면 좋겠어."
"언니······"
말을 마치고 순둥이 수진 선배가 살짝 울먹였다.
그러자 유나가 수진 선배의 어깨를 안아주며 달랬다.
'으음.'
그런데 수진 선배가 이렇게 말해 버리면 자칫하다간 충분한 계획 없이 일이 진행될지도 몰랐다.
나라도 중심을 잡아야 했다.
"일단 우리는 지금도 바빠요. 그리고 방송을 타면, 어쩌면 우리 일상이 많이 바뀔 지도 몰라요.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는데 굳이. 유나야. 넌 어떻게 생각해?"
유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해보자. 하이 유나는 떼어놓고 생각해도 괜찮아. 지금 바쁘긴 하지만 곧 겨울 방학이야. 그리고 재밌잖아. 친구들 다 같이 도전해 보는 거. 하이 유나에 도움이 되면 더 좋고. 우리는 이제까지 잘 해왔으니까, 어떤 일이 생겨도 앞으로도 잘 해낼 거야."
유나까지 이렇게 말한다면.
분명 좋은 기회이긴 했다.
우승할 수 있다면 거액의 상금과 유학의 기회가 생긴다.
사실 한국에서 작가로 살아가려면 언제부터인가 해외 유학이 필수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우승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지는 몰라도 도전해 볼만해. 거기다 팀 수진은 제법 강해. 한국대의 실기력과 나의 관록.'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김태민.
김태민은 강력한 팀의 자산이었다.
하지만 김태민은 유명 작가의 아들.
게다가 김태민의 재능은 약간 한국 미술계의 공공재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러니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일단 태민이한테도 물어보자. 할지 말지."
그때 문이 열리고 김태민이 들어왔다.
'저 녀석도 양반은 아니군. 그런데 태민이가 상놈이라면.'
마님들에게 인기가 엄청 많았을 게 분명했다.
'주원이는 뒷산 아래 들깨밭 타작을 저녁까지 끝내거라. 그리고 태민이, 네놈은 잠깐 나를 따라 오거라. 나랑 둘이서 갈 곳이 있구나.'
아무튼.
김태민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뭘 하자고? 그래, 하자. 뭔지 몰라도 재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