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내기 □
오늘도 새롭게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기초 서양화 2의 발표일.
전시에서 잠시 이준성 교수의 약한 모습을 보긴 했지만, 역시 크리틱은 늘 긴장된다.
이번 주제는 가면.
나는 직접 가면을 만들었다.
'가면을 직접 만들면 가산점을 준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서양화과이긴 하지만, 조소부터 공예까지 다양하게 배운다.
서양화과를 졸업해서 그림만 그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다른 영역의 예술을 많이 접할수록 그림은 더 풍부해진다.
나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만든 가면을 비닐랩과 신문지로 조심스레 포장해서 들고 갔다.
"어라?"
그런데 유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만든 가면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서 가져왔다.
그림이라면 작업실을 공유하니까, 서로의 작품을 미리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가면을 만드느라 이번엔 서로의 작품을 보지 못했다.
"뭐 만들었어?"
"궁금하면 이따 봐."
유나가 괜히 튕겼다.
하지만 튕겨봤자 유나는 내 손바닥 안에 있는 스무 살짜리 꼬맹이일뿐이다.
유나는 요즘 살짝 들떠 있었다.
전시에서 첫 그림이 순식간에 200만원에 팔렸다.
그 덕분인지 옆에 있던 100만원짜리 그림도 곧 팔렸다.
'어린 녀석이 갑자기 300만원이 생겼으니까.'
그리고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었으니까, 유나는 괜히 들뜨고 신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래서는 노련한 나의 타겟이 될 뿐이다.
'내 이번 과제의 컨셉은 장난스러움.'
그러니 발표하기 전부터 일부러 장난치면서 자신의 힘을 빼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유나가 내게 걸린 것이다.
1단계 간보기.
"한유나. 자신있나봐?"
"후후, 애 좀 썼지."
승부욕이 강한 유나는 항상 수업시간에 인정받길 원한다.
2단계 도발.
"애쓰고도 나한테 지면 더 약오를 텐데. 크리틱에선 항상 나한테 지니까."
"내가 이길 때도 있었잖아?"
"가끔?"
"흥, 이번엔 다를걸? 너도 이번에는 뭔가 준비했나 봐?"
"나야 뭐, 늘 하던 대로."
3단계 무관심.
나는 노트를 끄적이며 시선을 돌렸다.
"야, 이주원. 너 뭐 만들었길래?"
"알고 싶으면 이따가 봐."
"치사하게 굴지 말고 힌트라도 줘 봐."
유나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제 요리가 알맞게 익은 것이다.
"유나야. 그럼 내기 할래? 크리틱에서 이기는 사람, 소원 하나 들어주기."
"뭐? 소원?"
유나가 인상을 팍 썼다.
"갑자기 소원이라니 무슨 꿍꿍이야?"
"거봐. 넌 나한테 하도 많이 져서, 내기라는 말만 듣고 벌써 지는 경우부터 생각했지? 이제 패배가 습관이 된 거야."
"어떤 소원?"
"소원이 그냥 소원이지. 왜? 겁나?"
나는 일부러 얄밉게 히죽거리면서 말했다.
유나가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도전 받아줄게. 이기는 사람 소원 하나, 무조건 들어주기."
이정도면 나를 한유나 마스터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어차피 유나는 성격이 물러서 자기가 이겨봤자, 나한테 가혹한 소원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 안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음흉한 중년 아재가 있었다.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게임이었다.
'후후후.'
그리고 이번 가면은 제법 공을 들이기도 했다.
나는 자신 있었다.
'게다가 나는 크리틱의 달인.'
유나의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신나게 공격하면 값을 깎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강의가 시작하기 전, 즉흥적으로 유나를 함정에 빠뜨렸다.
예감이 좋았다.
그리고 드르륵.
문이 열리고 김대성이 들어왔다.
'응?'
그런데 김대성도 무언가 커다란 것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서 가져왔다.
뭔가 찝찝한 기분.
아무튼 쿠웅.
김대성 다음에 이준성 교수가 들어왔다.
"자, 오늘 크리틱에 앞서, 이제까지 나만 몰랐던 거냐?"
이준성 교수는 김태민을 쳐다보고 이야기했다.
김태민이 김용철 작가의 아들인 사실에 관한 이야기 같았다.
사실 서양화과 대부분은 이미 아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대답은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 단 한 번 김용철 작가와 크리틱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스무 살. 딱 너희들 나이였지."
그리고 이준성은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난 아직 크리틱이 뭔지 제대로 적응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김용철 작가는 마치 순한 얼룩말 사이를 뛰어다니는 성난 물소 같았다. 그날은 절대 잊지 못하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용철 형님은 김용철 작가가 되었고, 나는 내가 되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성공하고 싶다면, 크리틱 시간에는 일어나서 들이받아라. 하고 싶은 말은 시원하게 내뱉고, 틀린 의견이라도 자신있게 주장해라. 크리틱은 원래 이기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상대를 짓밟고 처참하게 패배시켜라."
성난 물소라니.
아마도 김태민은 어머니를 닮은 게 확실했다.
"자, 오늘의 시작은 누구지? 반장 또 너냐?"
이준성 교수는 김대성을 노려봤다.
하지만 절레절레.
김대성은 고개를 저었다.
"뭐냐?"
"오늘은 다른 학우들의 발표를 먼저 보고 나중에 발표하고 싶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김대성이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무슨 수작이냐? 남들보다 뒤에 발표하면 쓰레기가 쓰레기가 아니게 되는 거냐?"
전시회장에서 당황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준성은 평소의 막말 교수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늘은 김대성도 만만치 않았다.
"제 작품이 쓰레기인지 아닌지는 제 발표를 보고나서 말씀하시죠."
"어쭈. 기대하마. 그럼 누가 시작이냐."
드르륵.
남동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남동민이 앞에 건 것은 플라스틱 가면 세 개.
"교수님은 지난 시간에 자유로울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면의 본질을 마음대로 넘나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가면의 본질은 무엇일까. 숭배? 제사? 하지만 가면의 본질은 말 그대로 자신을 숨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는 가면을 만들었습니다."
남동민이 가져온 것은 아이들 장난감 플라스틱 로봇 가면.
나는 이름도 알지 못하는 건담, 마징가 비슷한 로봇의 얼굴을 딴 플라스틱 가면이었다.
하지만 가면 위에 아크릴물감으로 남동민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울퉁불퉁한 표면 위에 자신의 얼굴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역시 솜씨 하나는 대단했다.
남동민이 직접 그 중 하나를 얼굴에 착용하자 남동민이 남동민의 얼굴을 쓴 모양이 되었다.
"음. 늙은 놈의 작품에 대해 할 말 있는 놈 있나?"
평소와 달리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크리틱은 참여도 또한 중요하다.
질문과 발표를 많이 하면, 교수가 더 후한 값을 줄 것이다.
유나와의 내기가 걸린 이상 최선을 다해 참여해야 했다.
"그래, 도발적인 놈. 말해 봐라."
"세 개의 가면을 준비하셨네요. 만약 한 개의 가면이나 두 개의 가면이었다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3개의 가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못난이 3형제도 있고, 아기돼지 3형제도 있고, 신데렐라 세 자매도 있습니다. 세 개의 가면을 준비했다면 세 개의 가면 사이에 관련이나 인과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면에 자기 얼굴을 그리는 발상은 참신하지만, 작품 전체의 통일성이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나의 지적에 남동민과 이준성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요!"
내 발표가 끝나자 유나가 곧바로 손을 들었다.
"그래, 촌놈. 너도 말해봐라."
"지금 가면 위에 그려진 얼굴도 상당히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가면이 아니라, 로봇 가면을 골랐으니 로봇 머리의 뿔이나, 이마의 보석 같은 로봇 특유의 요소들을 살려서 작품에 포함시켰다면 더욱 조형적인 가치가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단순한 제 의견일 뿐입니다."
내게 질까봐 유나도 재빨리 의견을 더했다.
내 도발에 넘어가 내기를 수락했지만, 이제 슬슬 위기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늦었어.'
유나가 아무리 애써 봤자 나는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뭘 시킬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좋다. 늙은 놈. 자기 얼굴이 그려진 가면. 플라스틱 장난감 위에 자기 얼굴을 그린 점이 좋았다. 팝 아트적 시도라고 할까. 하지만 추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단순히 자기 얼굴을 그리는 것은 평면적인 시도지. 그리고 방금 두 놈이 한 말도 맞다. 발상에 그치지 않고, 조형적인 완성도까지 고려했어야 했다. 하지만 상당한 발전이다. 처음에 비해 작품이 많이 풍성해진 느낌이다. 사십 만원 쳐주마. 물론 사십 만원은 그냥 상징적인 액수다."
확실히 남동민의 작품은 계속 나아지고 있었다.
"자, 다음 쓰레기!"
그러자 김태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김태민 발표해봐라."
원래라면 '잘생긴 놈, 네 쓰레기를 걸어봐라.' 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태민 한정으로 이준성 교수의 언어가 순화되었다.
김태민이 가져온 것은 그림이었다.
이준성 교수는 가면을 만들어오면 가산점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김태민은 점수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가져왔다.
김태민답다고 할까.
그림 속에는 검은 깃털과 알록달록한 깃털로 엮어진 커다란 가면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가면 뒤에 얼굴이 지워진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저는 새의 깃털로 만들어진 가면을 그려봤습니다. 지난번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조개껍데기 가면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면의 시작은 무엇일까, 고민했습니다. 아마 조개껍데기 다음에는 가죽이나 깃털 가면이 아닐까. 저는 그 중에서도 알록달록한 새의 깃털에 끌렸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새의 깃털을 조사했습니다. 새의 깃털은 다양한 색과 무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깃털들을 다 모아서 가면을 만들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니까 이렇게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의 역할은 원래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니까요."
김태민이 뭔가 달라진 느낌.
이렇게 길게 자기 그림을 설명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인터넷 조사라고?'
김태민은 원래 조사 같은 것은 생략하고 무조건 시작한다.
인터넷 조사는 늘 내가 하던 것이었다.
'혹시 내가 김태민을 보고 고민하는 것처럼 김태민도 나를 보고 고민하는 건가?'
유나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가면을 들고 서 있는 남자의 얼굴에 비해 가면이 지나치게 큰 느낌입니다. 가면이라기보다는 방패나 옷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일부러 그렇게 그린 걸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그린 이유가 있을까요?"
김태민은 마치 남의 그림 보듯, 자기 그림을 살펴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처음엔 가면부터 그렸습니다. 그리고 무심코 뒤에 있는 남자를 그렸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얼굴의 크기와 가면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도중에 알았지만, 그게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졌습니다. 요즘 문득 사람들이 보는 내 모습과 내가 아는 내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음.
나는 그림을 더 살펴보기 위해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질문을 하려고 애쓰면 질문을 위한 감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가끔 그림에 집중하는 것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
깃털로 만들어진 가면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김태민은 분명 새의 깃털들은 조사했지만, 가면은 자기가 직접 머릿속에서 조합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이것은 그림이라기보다는 가면의 설계도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른다.
김태민의 그림은 녹색 정글 속에서 갑자기 만난 알록달록한 앵무새처럼 이질적이고 신비했다.
그리고 설명을 듣고 나자,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더해져 약간 우울하게 느껴졌다.
'발전하고 있는 건 나만이 아니구나.'
아직 김태민을 따라잡지 못했는데, 다시 김태민이 두 발자국 더 멀어졌다.
신기하고 알 수 없는 그림.
"아쉽군."
이준성 교수가 김태민의 그림에 대해 짧게 평가했다.
"이 그림은 미완성의 느낌이 난다. 아니면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었던 건가? 그냥 가면만을 그렸거나, 아니면 가면을 들고 있는 남자만을 그렸다면 완결된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가면을 그리고 빈 공간에 남자를 채워 넣었을 뿐이야. 그렇지?"
"네. 맞습니다."
김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이 그림을 완성했다면 멋진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더 책임감을 가지고 작품을 완성해라. 하지만 아쉬운 대로 괜찮은 그림이다. 다만 그림이니까 가산점 없이 사십 만원 쳐주마."
이준성 교수가 제법 짜게 값을 매겼다.
김태민의 과제는 언제나 주제에서 조금씩 벗어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주제에는 충실했지만 미완성의 느낌.
아무튼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