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300 □
아주 잠깐 어색한 순간.
그 어색함을 치우려는 건지 이준성 교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내 제자가 이사님이랑 알고 지내는 사이라니 정말 신기하네요. 이것도 인연입니다. 으하하하."
그때였다.
"네가 태민이였구나. 용철 선배님 아들이 우리 학교 다닌다는 말은 들었는데. 반갑다. 어릴 때, 선배님 신세 많이 졌었는데."
김진기 교수가 손을 내밀고 김태민과 짧은 악수를 나눴다.
이준성 교수와 대조적으로 무척 신사적이었다.
"요, 용철 선배?"
다시 한 번 이준성 교수의 이마에 땀이 흘렀다.
"자, 잘생긴 아니, 아니. 태민이가 용철 형님 아들이라고?"
이준성은 대준문화재단의 이름을 들었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2학기가 시작하고 이준성 교수가 학생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처음 봤다.
'태민이 이름을 알고 있긴 했구나.'
김태민의 아버지가 대단한 작가라는 것은 이제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신문에서만 보는 대단한 사람을 용철 선배, 용철 형님 등등 친근한 호칭으로 듣자 무척 새로웠다.
교수들이 괜히 대단해 보였다.
이미연 이사가 환하게 웃으며 김태민에게 말했다.
"아버지랑은 얼마 전에 통화했는데, 아직 귀국 안하셨지?"
"네. 지금은 영국에 계세요."
"경매 때문에 아직 영국에 계시는 구나."
둘은 무척 친해보였다.
그리고 이미연 이사가 갑자기 생각난 듯 김태민에게 물었다.
"설마, 혹시 태민이 그림도 여기에 걸려 있는 거야?"
"아니요.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친구 두 명만 뽑고, 전 떨어뜨리셨어요."
김태민이 해맑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미연의 얼굴에 강렬한 의혹이 떠올랐다.
"네가 떨어졌다고?"
김태민은 싱글벙글 끄덕끄덕.
이준성 교수는 약간 얼빠진 표정.
"그래요? 그럼 태민이를 떨어뜨린 그림을 한 번 볼까요?"
이미연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 그림 앞에 섰다.
나와 유나, 태민은 편하게 있었는데, 우리보다 교수들이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이미연은 잠깐 내 그림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을 이렇게 자르다니. 도발적이네요. 용감하네요."
그게 전부.
그리고 유나의 그림, 거리의 촬영 앞에 섰다.
"음. 서정적이네요. 좋군요."
역시 이번에도 짧은 감평.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향해 친절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그림 그려줘요. 그리고 우리 태민이도 잘 부탁해요. 그럼 응원의 의미로 이 그림 두 점은 제가 살게요."
"네?"
순식간이었다.
그림을 파는 일이 이렇게 간단하고 빠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가 대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우리 그림 옆에는 판매된 그림이라는 뜻의 스티커가 붙어버렸다.
과연 팔릴지 궁금했던 그림이 전시 오프닝이 끝나기도 전에 팔려버렸다.
"그리고 태민이 너는 조만간 나랑 저녁이나 같이 먹자. 친구들이랑만 너무 놀지 말고, 누나도 좀 챙겨."
"네. 아르바이트 없는 날 연락드릴게요."
"네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이미연은 또 한 번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교수들에 이끌려 자리를 이동했다.
이준성 교수는 멍하니 있다가 이미연 등등을 따라갔다.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유나가 입을 벌리고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어린 아이라서, 처음으로 자기 그림을 파는 일이 감격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을 것이다.
실은 나도 살짝 그랬다.
'하지만 건너건너 지인찬스라니.'
살짝 김이 빠진 느낌도 있었다.
그래도 분명 첫 그림 판매였다.
작은 목표를 이뤄서 뿌듯했다.
* * *
그리고 며칠 후 일요일.
나와 태민, 유나, 다른 전공 세 명.
모두 여섯 명은 김미숙 교수의 공방을 방문했다.
김미숙 교수는 자기 작업실에서 수강생도 받아서 가르쳤기 때문에 일요일만 방문이 가능했다.
일요일 한정이라 생각보다 경쟁이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사는 간단히 초벌구이 결과로 진행했다.
유나는 컵에다 자기의 제주도 집, 바닷가 풍경을 새겼다.
김태민은 고양이 밥그릇 두 개와 흙 도장 십여 개.
잘만들었다기 보다는 노력상으로 뽑힌 것 같았다.
나는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는 내 모습을 컵에 부조로 새겼다.
자주 못 뵈는 어머니께 선물할 생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는 늘 믹스 커피를 드시곤 했다.
하지만 이제 믹스 커피가 필요한 고된 일은 못 하시게 할 생각이다.
'이제 믹스 커피가 입에 맞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만든 컵과 커피 메이커를 같이 선물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방문한 도예 공방.
전기 물레는 세 대가 놓여 있었다.
"수업시간에도 말했듯, 물레는 굉장히 어려워요. 흙의 중심을 잡는 것만 해도 며칠이 걸리기도 해요. 그리고 흙이 무거워서 힘이 없는 사람은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김미숙 교수는 회전하는 물레 위에 흙덩이를 올리고, 손에 물을 발라가며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쓰윽 가져다대자, 순식간에 작은 컵이 만들어졌다.
레코드판에 바늘을 올려두는 것과 비슷한 동작이었다.
약간 마법 같았다.
"자, 도전해볼 사람?"
먼저 다른 과 여학생.
"끼약!"
앞치마를 두르고 시작했지만, 사방에 흙이 튀고 진흙을 뒤집어썼다.
물을 발라서 흙을 만지기 때문에 흙이 굉장히 질었다.
그 광경을 보고 김미숙 교수가 피식 웃었다.
"아마, 오늘 이 여섯 명 중에서 단 한 명도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만약 한 명이라도 컵의 모양을 만들어낸다면, 내가 자장면을 쏠게요."
꽤 자신 있는 모양이었다.
"자, 다른 사람들도 물레에 앉아서 도전해 봐요."
우린 물레 세 대에 번갈아가며 앉아서 실습했고, 김미숙 교수와 교수의 조수가 우릴 도왔다.
"으아악"
이건 유나의 비명소리.
유나 역시 흙이 균형을 잃고, 진흙 폭탄을 뒤집어썼다.
승부를 좋아하는 유나의 특성상 점심이 걸리자 더욱 달려든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부터 얼굴까지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어엉."
유나가 우는 소리를 내자 김미숙 교수가 달랬다.
"갈아입을 옷은 가지고 왔죠?"
교수의 조수가 다시 한 번 시범을 보이고, 나는 [ 잡생각 제거]를 사용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시범을 보며 손의 모양과 팔의 각도를 외웠다.
내가 너무 진지하게 노려보자, 김미숙 교수의 조수가 웃으며 놀렸다.
"아무리 노려봐도 쉽지 않을 걸요? 절대 할 수 없으니까 교수님이 점심을 건 거예요."
과연?
나는 물레에 앉아, 시범을 본 대로 흙을 붙잡았다.
그리고 팔을 고정시키고 조심스럽게 흙을 당겼다.
내 내면은 고요했고, 손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거의 기계.
그리고 쑤욱.
내 손에서 매끄러운 진흙 컵이 탄생했다.
"어어? 어어어어?"
조수가 놀라서 호들갑을 떨었다.
"혹시 물레를 배운 적이 있어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거짓말. 교수님, 이것 보세요!"
"대단한데. 경험이 없는 것처럼 나를 속이다니. 그래도 내기는 내기니까, 자장면은 쏠게요."
김미숙 교수조차 내게 감탄했다.
그렇게 학생들의 환호를 받으며 나는 점심을 따냈다.
내가 잘 해내자, 김미숙 교수는 다른 모양의 컵도 가르쳐줬고, 요령을 깨달은 나는 곧잘 해냈다.
칭찬 받으면서 남들을 앞서 나가자 더 재미있었고, 도자기도 좋아졌다.
'원래 도자기는 피곤하게 느껴졌는데. 생각만큼 나쁜 것 같지는 않아.'
그리고 옆에서 물레에 앉아있는 김태민을 봤다.
나만큼 얇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컵의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호기심에 찬 아이처럼 굉장히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혹시 김태민의 비결은 재미가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항상 더 열심히 그리고, 더 근사하게 그리려고만 했어.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해왔지만, 김태민에 비하면 내 그림은 항상 감정이 부족했어. 나는 과연 내 그림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을까? 너무 잘 하려고 애쓰고 있진 않았을까? 내가 정말 원하는 그림을 즐겁게 그릴 때, 그림 속에 감정이 자연스럽게 담기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번 서양화 과제에는 초점을 살짝 바꿔보기로 했다.
무거운 의미를 담는 것보다는 스스로가 슬쩍 웃을 수 있는 엉뚱한 시도를 해보는 것으로.
'마침 이준성 교수가 자유로운 발상을 강조했으니까.'
교수의 의도와도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장면을 기다리는 동안, 가마부터 유약까지 도자기에 대해 여러 가지를 질문했다.
김미숙 교수는 물레천재 이주원에게 친절히 설명해줬다.
"혹시 도예과 복수 전공을 원한다면, 언제나 환영할게요."
교수의 제안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레가 재미있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 * *
카페의 전시는 길지 않았다.
전시가 끝나고 며칠 후, 김태민은 이미연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그녀의 숙소를 겸하고 있는 넓고 호화로운 작업실.
이미연은 필름 메이킹이 전공이었지만, 직접 유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문화재단과 상관없이 그녀 자신이 미술품 콜렉터이기도 했다.
작업실에는 미처 걸리지 못한 그림 여러 점들이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김태민은 그림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이미연에게 다가갔다.
"왔구나."
이미연의 작업실 구석엔 이주원과 한유나의 그림도 세워져 있었다.
"친구들 그림이네요. 그림을 사주셔서 고마워요."
김태민의 인사에 이미연은 피식 웃었다.
"사실 전부터 가져온 생각이 있었는데, 이 그림들을 보고 확신이 들었어."
"무슨 생각이요?"
"미국에서 네 그림들을 보며 늘 생각하곤 했었거든. 왜 김태민의 그림은 특별할까? 언제부터 김태민은 특별했을까?"
김태민은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아마 부모님께 재능도 물려받았을 테고.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동료 작가들의 좋은 그림들도 많이 봤겠지. 좋은 재능과 좋은 환경이 지금의 너를 만든 거야."
그리고 이미연은 김태민의 얼굴과 이주원, 한유나의 그림을 번갈아봤다.
"넌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어야 했어. 전 세계의 천재들이 모이는 곳에서 계속 자극받으면서 끝없이 도전해야 했어. 이런 평범한 그림들은 네게 자극을 줄 수 없어. 김용철 작가님은 항상 옳은 선택을 하시는데, 이번에는 틀리신 것 같아."
김태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전 반대로 생각해요. 아버지는 자주 틀리시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맞췄다고요. 그리고 이 두 그림은 평범하지 않아요."
"평범하지 않다고? 눈이 낮아진 거야?"
"틀린 건 누나예요. 나는 이 두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 작업실에 같이 있었어요. 주원이는 이 그림을 그리려고 수백 장 스케치했어요. 수채화 스케치북도 한 권 썼고요. 유나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이 그림에 담긴 의미를 아세요? 유나가 이 그림을 그린 건 일주일이지만, 지난 몇 달 간의 감정이 이 안에 담겼어요. 두 사람 다 수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새벽까지 그렸어요. 그리고 그리는 동안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고요. 어떻게 그렇게 그린 그림이 평범할 수가 있죠?"
이미연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민이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도 확고했다.
"세상엔 수많은 화가가 있고, 수많은 그림이 있지. 모두 각자 사연이 있겠지. 하지만 사람들이 일일이 귀 기울여 주진 않아. 아주 소수의 선택된 화가들만이 강제로 지나가는 관객을 붙잡고 놀라게 할 수 있어. 너처럼 말이야."
"누나가 날 과대평가 하는 것 같아요. 주원이나 유나의 그림이 평범하면 내 그림도 평범해요."
"자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돼. 김용철 작가님은 힘들게 지금의 업적을 이루셨어. 어리지 않은 나이에 유학을 가서, 현지에서 싸우고 인정받았지. 미술계의 변방인 한국 출신의 한계를 극복한 거야. 힘들게 얻은 이름이야. 그러니 넌 그 업적을 물려받고, 더 키워야 해. 눈을 크게 뜨고 더 큰 목표를 세워. 그 날 전시에 모인 교수들을 봤지? 있으나 마나한 시시한 그림들이나 그리면서 자기가 교수라고 거들먹거리지. 그게 한국 미술이야. 넌 그 사람들과 달라."
하지만 김태민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전 누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어요. 날 왜 보자고 한 지도 모르겠고요."
"나는 문화재단의 이사고, 대형 방송국의 책임자야. 난 한국 미술계와 너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어. 넌 신선한 자극과 도전 상대, 넓은 세계가 필요해."
"난 지금 충분히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누나의 도움이 필요하던 어린 애가 아니에요."
김태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어리지 않다는 말에 이미연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
"그리고 누나. 제 친구들의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면 저한테 파세요. 제가 살게요."
"삼백만원 있어?"
김태민은 머뭇거렸다.
"지금은 없지만, 마련해볼게요. 그림 다른 사람한테 팔지 말고 그냥 두세요."
"그럴게."
그리고 김태민은 그대로 뒤돌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