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75화 (75/203)

■ 75. 재테크 □

"그림은 얼마나 그렸지?"

"재수하지 않고 한 번에 합격한 건가?"

오선우 교수와 서명길 교수는 유나의 '거리의 촬영'에 최고가를 매겼다.

그리고 한참 칭찬하고는 유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살짝 공기가 된 기분.

'뭐, 그래도 괜찮아.'

나 역시 유나의 그림이 좋았다.

교수들이 유나의 그림을 칭찬하는 것이 내 안목이 옳았다는 증거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게다가 교수들이 유나만 예뻐하는 이유가 수긍이 가기도 했다.

'교수들의 눈에는 보이는 거겠지. 내 본전이.'

그림의 가치를 매기는 기준은 다양할 것이다.

나는 김태민이나 유나의 그림을 보며 자주 그림의 가치 대해 생각하곤 했다.

'남동민은 강남 학원의 전임 강사. 이제 스물여섯 살이지만, 기교는 절대 교수들에게 밀리지 않아.'

상조 역시 마찬가지.

사진 같은 그림을 한 번도 수정하지 않고 한 번의 붓질만으로 그려냈다.

'하지만 그런데도 남동민이나 상조의 그림을 보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어.'

물론 사람마다 기준은 다를 것이다.

전생에서 상조는 자신의 예쁜 그림들을 SNS에 올렸고, 상조는 SNS 유명 화가가 되어 제법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인기가 식을 무렵 자기 학원을 차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은다.

아무튼.

김태민이나 유나의 그림에는 남동민이나 상조의 그림에는 없는 보다 깊은 매력이 있었다.

김태민의 그림에는 믿어지지 않는 활기와 즐거움.

유나의 그림에는 따뜻한 온기와 묘한 감정들.

'두 사람에 비하면 내 그림은 힘겨워하고 있어.'

나는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고, 어떤 식으로 그려야할지 미리 연습하고, 수도 없이 고쳐서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한다.

이제까지 늘 그런 식으로 발악을 하듯, 겨우 그림들을 완성했다.

그리고 어쩌면 교수들의 눈에는 그런 힘겨운 과정들이 보였을 지도 모른다.

'밑천이 얕은 자의 발악.'

그러니 앞으로 성장이 더욱 기대되는 쪽은 분명 유나일 것이다.

내가 교수라도 유나를 예뻐했을 것이다.

[ 화가가 그림을 파는 일은 자기 자신을 파는 것과 비슷하다. ]

이준성 교수가 수업 시간에 그렇게 말했다.

옳은 말이었다.

지금 내 그림이 곧 나 자신이었다.

교수들이 매긴 유나와 나의 그림값의 차이.

그리고 우리를 대하는 교수들의 태도 차이.

그 차이가 지금 나의 현실이었다.

'난 어차피 재능을 타고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다.

물러서면 지는 것이다.

눈앞의 교수들이나, 상조 같은 사람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절대 김태민이나 유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노력하고 발악할 순 있다.

나는 내 식대로 나의 매력을 만들고, 나만의 가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김태민이나 유나라서 다행이야.'

내가 목표로 둔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순수한 마음으로 경쟁할 수 있었다.

그게 미대생으로서 큰 행운이자 축복으로 여겨졌다.

두 사람 덕분에 의기소침하기는커녕, 더 불타오를 수 있었다.

* * *

돌아오는 차 안.

그림 두 장에 삼백 만원.

유나가 엄청 좋아할 줄 알았는데, 유나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하고 있었다.

늘 당당한 유나지만, 섬세한 구석도 있었다.

"좋아해도 괜찮아. 바보야."

그러자 유나가 위로 비슷한 말을 했다.

"교수들이 뭘 알겠어? 어차피 그냥 나이든 아저씨들이야. 난 네 그림이 100만원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

"그래? 난 만족하는데?"

진심이었다.

전생에 비하면 큰 발전이었다.

미대에 온 것도 그림을 실컷 그려보고 싶었을 뿐, 내 그림을 파는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100만원이라도 뿌듯했다.

'그리고 그림만 팔린다면.'

어머니를 여행 보내드릴 수 있었다.

물론 내 돈을 보태긴 해야겠지만.

어쨌든 100만원이라도 내게는 소중한 돈이었다.

"그것보다 200만원이면 내가 네 그림 사고 싶은데?"

"됐거든?"

"진짜야. 200이면 완전 헐값인데."

"나중에, 내가 맘에 드는 그림 그리게 되면, 너한테 하나 선물할게. 됐냐?"

유나의 그림이라니, 횡재였다.

"너 약속 했다. 잘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팔아서 집 사야지. 꼭 그림 줘야 해."

그렇게 웃고 떠들자 유나도 맘 편히 좋아하게 되었다.

"300만원이라니, 믿어지지 않아. 그림 다 팔리면, 엄마 아빠 200만원만 드리고 100만원은 내가 써야지. 100만원으로 뭐 하지?"

유나는 그렇게 소녀처럼 계획도 세우며 행복해했다.

'그나저나 김태민 그림도 몇 점 얻어 볼까. 나중에 돈이 꽤 될 것 같은데.'

[ 트럭 변신 로봇 사줄게. 네 그림이랑 바꾸자.]

'이거 먹힐 것 같은데?'

방금 전까지 좋은 경쟁자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아재의 영혼은 돈에 길들여져 있었다.

"아, 그리고 미안."

"응? 뭐가?"

"거리의 촬영, 그 그림 보면서 많이 미안했었어. 내가 미처 몰랐구나 싶어서. 길에서 촬영하는 게 그렇게 힘든지 몰랐었어."

"됐어, 바보야. 이젠 괜찮아. 언니들도 있고."

이젠 괜찮다는 말은 처음에는 힘 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제까지 한 번도 티내지 않고, 함께 일하기 위해 그런 고통을 감수해준 사실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스러웠다.

"다음부터는 내가 모르는 일 있으면 꼭 가르쳐줘. 나 진짜 멍청하거든. 알겠지?"

"그래. 그럴게."

유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시는 여러 가지로 얻는 게 많았다.

* * *

한 고비가 지났다고 방심하면 안 된다.

미대의 과제는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온다.

기초 도예 시간.

"이번에 우리가 배울 건 코일링이라는 기법입니다. 아마 모두들 한 번 쯤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초등학생 때 직접 해본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코일링이란 흙을 가래떡처럼 가늘고 길게 말아서, 용수철처럼 쌓아올려 만드는 기법입니다. 토기를 만드는 가장 원시적이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김미숙 교수는 코일링으로 컵이나 대접을 만드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자, 물레와 비교해서 코일링 기법의 장점이나 특징은 어떤 게 있을까요? 자유롭게 생각나는 걸 말해 보세요."

내가 번쩍 손을 들었다.

"물레는 회전하기 때문에 원형의 도자기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코일을 쌓아서 만들면 원형뿐만 아니라, 타원이나 비대칭등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잘했어요. 가장 큰 특징이죠. 또 다른 차이는 어떤 게 있을까요?"

이번엔 유나.

"네, 말해 봐요."

"물레는 마찰을 이용해 모양을 만드니까, 표면이 매끄럽습니다. 하지만 코일링은 손으로 눌러 만드니까 원한다면 손자국을 남길 수 있습니다."

"맞아요. 아주 좋은 점을 말해줬네요. 서양화과죠? 토기에 있어서 손자국은 그림의 붓자국과 비슷해요. 매끄러운 도기를 원한다면 손자국을 없앨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인간의 손이 닿은 흔적을 남겨서 생동감 있는 도기를 만들 수도 있어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단점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이기도 해요."

그렇게 우린 몇 가지 요령을 배우고 직접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 시간에는 컵이나 대접 등, 실제 일상에서 쓸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보세요. 직접 사용해도 괜찮고, 선물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번에는 표면에 조각을 하고 그림도 그려볼 겁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만들도록 하세요."

코일링이라는 기법이 어렵지 않은 만큼, 이번에는 다루기 힘든 백자토를 사용했다.

백자토는 흰색이라 색을 넣기에 좋았다.

일단 백자토로 만들어 초벌구이 한 후에, 도자기 전용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다시 재벌 구이하면 도자기에 그림이 그려진다.

'확실히 도자기는 손이 많이 가.'

그래서 도자기를 배우면 배울수록 서양화과를 선택해서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미숙 교수는 시범을 보여준 후에 느긋하게 강의실을 돌아다녔다.

선물도 가능하고, 일상에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대부분 머그컵을 만들었다.

그런데 김태민만 대접 비슷한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뭘 만드는 중이죠?"

"제가 고양이를 기르거든요. 그래서 고양이 밥그릇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재미있는 기법을 가르쳐줄게요."

김미숙 교수는 흙을 작은 크기로 떼어내어 손가락 모양으로 길게 빚었다.

그리고 조각칼로 흙 막대의 끝에 모양을 새겼다.

마치 도장을 파는 것 같았다.

"이걸 봐요."

흙 도장 위에 새겨진 것은 고양이 발바닥 모양이었다.

"이걸 말린 후에, 마르지 않은 표면에 도장처럼 찍으면 고양이 발자국 모양으로 무늬가 생기겠죠?"

도장을 받아들고 김태민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교수인지 몇 주 동안의 수업으로 김태민의 습성을 파악한 것이었다.

김태민은 이런 아기자기하고 신기한 것을 좋아했다.

"고양이 발자국뿐만 아니라, 다른 무늬나 패턴도 시도해볼 수 있어요. 도자기에는 반복되는 무늬가 들어가는 경우가 흔해서 이렇게 도장을 만들면 편할 때도 있어요."

재미있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어도 도자기는 손이 너무 많이 갔다.

'역시 서양화가 제일이야.'

유나는 커다란 원통을 만들고 있었다.

"꽃병인가요? 설마 컵?"

교수가 묻자, 유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컵 맞아요. 제가 매일을 커피로 버티거든요. 그래서 한 번에 들이부을 수 있도록 커다란 머그컵을 만들고 있습니다. 보통 머그컵은 이제 감질나서······"

"아, 알죠. 그 고통."

김미숙 교수도 한때는 미대생이었을테니, 미대의 무서움을 잘 알 것이다.

김미숙 교수는 유나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머그컵의 표면에는 부조를 새겨 넣을 계획입니다."

유나의 스케치 노트를 보고 김미숙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김미숙 교수가 앞에 나가서 외쳤다.

"혹시 이 중에 물레를 배워보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도자기는 배울 게 끝도 없었다.

하지만 물레라···

물레는 미대생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한 분야일 것이다.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도 있었고, 부드러운 흙덩이가 놓인 물레는 언제나 특별하고 근사해 보였다.

'도예 수업을 듣고 물레를 배우지 않는다면 팥 없는 찐빵을 먹은 느낌이야.'

나는 손을 들었다.

주위를 보니 유나도, 김태민도, 김대성도, 대부분 손을 들고 있었다.

"그래요. 물레를 원하는 사람이 많네요. 하지만 물레는 어려워서 한 학기를 전부 다 써도, 컵 하나 제대로 만들기 힘들어요. 그럼 이렇게 하죠. 이번에 코일링 기법으로 여러분이 만든 것을 평가해서 제일 우수한 학생 몇 명만 선발해, 제 작업실에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전부를 데려가기엔 제 작업실이 좁아서요. 제대로 물레를 배우진 못하겠지만, 맛보기는 가능할 겁니다. 어때요? 괜찮나요?"

네에!

커다란 대답과 함께 학생들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역시 상품이 걸려야 제대로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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