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74화 (74/203)

■ 74. 엘 한국대코 □

난데없이 등장한 서양화과 응원단.

이에 자극을 받았는지 디자인과도 열렬히 응원을 시작했다.

양측의 뜨거운 응원공방.

원래 응원을 받으면 더 열심히 뛰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선수들의 얼굴엔 긴장이 흘렀다.

'우리가 우리의 수준을 아니까.'

우리는 운동 못하는 한국대 중에서도 최하위권.

과연 응원에 걸맞는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경기는 시작되었다.

서양화과는 예비역들이 전방 공격수를 맡았다.

남동민은 스트라이커.

그리고 김태민도 공격수.

김태민은 실력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존재감이 강해서 공격수로 뽑혔다.

나는 괜히 땀 흘리고 싶지 않아서 후방 수비수.

대성 병지는 골키퍼를 자처했다.

"동민이 형님. 수비는 제게 맡기고 마음껏 공격을 즐기십시오!"

과연?

그리고 동네 축구가 시작되었다.

형편없는 발길질.

공 하나를 쫓아서 우르르 몰려가는 소떼 축구가 계속되는 가운데 그래도 남동민은 제법 잘했다.

김태민도 공을 잡는 시간은 적었지만 몸도 빠르고 패스도 잘했다.

그 외엔?

후방 수비수인 내가 느긋하게 지켜 볼만큼 경기는 널널했다.

"뒤로 빠져! 현우, 너 뭐하는 거야!"

다만 대성 병지는 아무도 듣지 않는 작전을 외치느라 뒤에서도 바빴다.

슬슬 응원단이 지겨워할 무렵.

김태민이 공을 잡고 전방을 달렸다.

"끼약! 김태민! 달려!"

"태민 오빠!"

분명 김태민은 스무살.

절대 오빠가 될 수 없는데 오빠라는 말이 종종 들린다.

그리고 남동민에게 어시스트.

뻥!

남동민의 슛이 디자인과의 골망을 갈랐다 .

"끼약! 남동민! 남동민! 김태민! 김태민!"

"서양화과 파이팅! 와아아아!"

서양화과는 열광의 도가니.

그때였다.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부어줄 그들이 도착했다.

환상의 타이밍이었다.

경기 시작 전, 뜻밖에 등장한 응원단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남동민이 그들을 부른 것이었다.

바로 치킨과 맥주였다.

전임강사 남동민은 학생 중에는 나름 고소득자.

치맥은 넉넉했다.

"이것 좀 드세요."

서양화과 응원단은 치킨과 맥주를 디자인과에도 건넸다.

"남동민! 남동민! 남동민! 남동민!"

전공을 넘어 모든 운동장이 남동민의 이름을 외쳤다.

남동민은 응원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운동장을 달렸다.

'동민이형···'

한때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남동민의 마음이 내게도 전해졌다.

한국대 서양화과에 오기 위해 그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그리고 군대에서 축구를 연마하며 또 얼마나 긴 시간을 견뎠을까.

오늘은 아침부터 동생들을 쫓아다니며 이 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득점까지 직접 해냈다.

'선생님의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남동민에겐 지금일 것이다.

그렇게 1:0으로 앞선 가운데 운동장은 열광의 도가니.

하지만 그 열광엔 부작용이 있었다.

골대 앞을 고독하게 배회하던 대성 병지마저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안돼. 진정해, 대성 병지!'

남동민을 향한 질투였던 것일까?

아니면 운동장의 열기에 동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도 예상 못한 순간, 골키퍼 김대성이 직접 공을 드리블해서 운동장의 중앙선을 돌파했다.

'미친놈아! 넌 더 이상 병장이 아니라고!'

대성 병지라는 별명을 듣는 순간 이미 안 좋은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왜 슬픈 예감은 항상 빗나가지 않는 걸까.

"이 김대성 병···!"

남동민의 안타까운 절규.

디자인과의 수비수에게 가볍게 공을 뺏긴 대성 병지는 운동장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리고 돌진하는 디자인과들.

뒤늦게 내가 공을 막으려했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뻐엉!

대체 우린 무엇을 위해 45분을 뛰어다닌 것일까.

그렇게 1:1로 힘든 전반이 마무리 되었다.

잠깐의 휴식 시간.

작전 회의를 가장한 예비역들의 무차별 김대성 난타가 시작되었다.

"절대, 골대를 벗어나지 마!"

"군대에서는 네가 공만 잡으면 수비수들이 다 멀어지지? 설마 그게 네 실력인 줄 알았던 거야?"

그렇게 한 마디씩 모질게 내뱉고도 불안했는지, 예비역들이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주원아. 너만 믿는다."

애매하게 시작된 후반전.

양측 모두 부지런히 뛰긴 했지만 실속은 없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인가?'

나 역시 남자.

항상 승리와 영광을 갈망한다.

그리고 나 역시 아재.

내 영혼은 축구를 사랑한다.

먼저 [잡생각 제거].

운동장이 고요해지고 수많은 루트와 패턴이 눈 안에 들어온다.

[숲 속 산책]

바람이 불고, 폐안에 신선한 공기가 가득 찬다.

그리고 [전신 스트레칭].

초특급 트레이너들이 온몸을 안마해주는 효과.

경기는 후반전의 중간을 지나고 있지만, 내 육체는 새롭게 리프레시되었다.

'이제 달려볼까.'

나 혼자 가벼운 발걸음.

나는 빛의 속도로 숨넘어가는 디자인과 선수들을 돌파했다.

그렇게 이어진 장거리 드리블.

나를 막으러 달려드는 상대편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그리고 툭!

가볍지만 정확한 슛.

찰랑!

"아니, 이럴 수가."

남동민의 감탄.

예비역들의 경악.

"저 녀석과 함께라면 한국대 우승까지 가능할지도!"

하나같이 그런 표정들.

나의 등장이 너무나 갑작스러워 응원단은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와아아아아! 이주원! 이주원! 이주원!"

"우리 사장님 최고!"

경기는 이제 2:1.

남동민이 새로운 작전을 지시했다.

"자, 예비역들은 모두 수비로 빠진다. 대성 병지가 헛짓하지 못하게 잘 감시해! 이주원, 김태민은 전방으로 나와!"

정확한 작전 지시.

하지만 나는 지키는 축구를 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의 나는 거의 한국대의 메시.

나는 또 한 번 공을 발에 묶고 운동장을 질주했다.

"패스! 패스! 주원아 패스!"

남동민이 한 번 더 골을 넣기 위해 내게 소리쳤다.

하지만 전반전 탁월한 활약으로, 남동민 주위엔 수비수가 많았다.

그렇다면?

톡.

나는 김태민에게 어시스트했다.

이어지는 김태민의 빠르고 정확한 동작.

파앙.

김태민의 가벼운 슛이 또 한 번 디자인과의 골망을 갈랐다.

"와아아아!"

응원단의 함성이 운동장을 채웠다.

김태민이 두 팔을 펼치고 운동장을 달렸다.

늘씬한 기럭지에 깊은 눈매.

땀에 젖어 찰랑이는 머릿결.

게다가 여름 방학부터 한철이에게 운동까지 배워서 몸도 탄탄했다.

"김태민! 김태민! 김태민!"

운동장은 전에 없던 열광의 도가니.

남동민도 나도 골을 넣었지만, 이 정도 환호는 받지 못했다.

치킨이 왔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김태민! 김태민! 김태민!"

'저 쪽은 디자인과인데······'

심지어 디자인과 응원단도 김태민의 이름을 외쳤다.

벌어진 점수 차에, 응원단의 배신에 따른 정신적인 충격까지.

이후 디자인과는 힘없이 무너졌다.

3:1

오늘은 서양화과 축구의 새 역사가 쓰인 날.

서양화과가 축구를 시작한 이후, 최고의 승리가 분명했다.

남동민이 외쳤다.

"자, 곧바로 호프집으로 달리자! 오늘은 내가 쏜다!"

"와아! 남동민! 남동민!"

시합이 끝나고 디자인과 서양화과 다 같이 호프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압도적인 하루가 끝났다.

남동민은 다음 축구 경기도 나가자고 졸랐지만, 나는 빠지기로 했다.

일도 과제도 너무 바쁘니까.

물론 오랜만의 축구는 너무 재미있었다.

* * *

크리스털 시네마의 공포 영화가 개봉하자 다시 한 번 영화 홈페이지에 사람들이 몰렸다.

심지어 우리 웹툰의 제목인 '목동 여고생'이 검색 사이트 상위권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와 더불어 영화도 크게 흥행했다.

미국에서 평도 좋았고, 웹툰을 이용한 관객 모으기도 대성공이었다.

"제 마음 알죠? 이 대표님, 제가 날 잡아서 원 디자인 전 직원 회식 시켜드릴게요!"

특히 이번 영화는 수입부터 홍보 까지 내가 깊이 관여했다.

안 그래도 이주원의 팬이었던 안수정 대표는 이제 거의 광신도로 변했다.

바람직했다.

"원 디자인 받고, 하이 유나 팀까지 회식 부탁드려도 될까요?"

"콜입니다. 언제든 시간만 잡으세요. 제가 달려갈게요."

몇 건의 큼지막한 홈페이지를 완수하자 입소문도 퍼지고, 또 영화 홈페이지마다 박아둔 원 디자인의 로고 덕도 있었다.

주문이 계속 밀려왔고, 나와 승희씨는 두 명의 경력직을 더 뽑기로 했다.

그리고 새 사무실도 알아보고 있었다.

하이 유나의 이익은 크게 늘지는 않았지만 옷 장사의 특성상 짐이 계속 많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하이 유나는 원 디자인과 회사의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쉬지 않고 집중해서 일해도 일이 끝나지 않는 원 디자인.

그에 비해 하이 유나는 마치 놀이처럼 일한다.

그리고 직원 대부분이 대학생이라 근무 시간도 유동적이었다.

그러니 두 팀이 사무실을 공유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원 부동산과 원 디자인의 매출이 크게 늘어서 새 사무실을 얻는 것은 부담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아쉬워요. 어린 동생들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승희씨는 유나와 수진, 정화를 동생처럼 귀여워했다.

오피스텔로 반찬도 자주 가져오고, 화장도 가르쳐주고, 이것저것 상담도 자주 해줬다.

말 그대로 사무실의 큰 언니 역할.

"맞아요. 태민씨 보는 낙이 컸는데, 사무실 옮기기 싫어요."

이건 이소영과 대부분 여직원들의 반응.

하지만 사무실 이사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원 디자인 모든 직원들 옷은 언제나 직원 할인가로 드릴게요."

"약속하셨어요, 대표님. 빨리 가을, 겨울옷 업데이트 해주세요!"

* * *

그리고 유나와 나는 한 번 더 전시가 열릴 카페로 갔다.

이번에는 다른 학생들은 없고, 나와 유나 뿐이었다.

그리고 세 명의 대학 교수.

바로 이준성과 그 친구들이었다.

오늘은 바로 우리의 그림 값을 매기기 위한 자리였다.

세 명의 교수가 우리의 신작을 처음 보는 날이기도 했다.

"으음······"

수업이 아니니 불필요한 크리틱은 따로 없었다.

교수들은 그냥 우리 그림을 보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림이 좋네. 참 좋네."

"하하하. 내 제자거든."

한국 정보대의 서명길 교수가 중얼거리자 이준성 교수가 흐뭇해했다.

서명길 교수는 나도 얼굴은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복도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내가 가져간 그림은 '새벽 작업실.'

유나가 가져간 그림은 펜션을 그렸던 '여름 밤 바닷가'와 이번에 그렸던 '거리의 촬영' 두 점.

먼저 L대의 오선우 교수가 이번 전시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이건 화랑을 낀 정식 전시가 아니야. 보통 화랑은 그림 값에서 돈을 크게 떼어가지. 신인 작가라면 더 그렇고."

화랑은 그림의 중개상이었다.

신인 화가라면 경우에 따라 그림 값의 절반까지 수수료로 떼어가기도 했다.

"이 전시는 거의 친목 자리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우리 모두 그림 값을 크게 부르지 않아. 물론 이 카페도 수수료를 받긴 하지만, 우리가 미리 말해뒀어. 그래서 이번에 참여하는 학생들 그림엔 수수료를 받지 않기로 했어. 그러니 우리가 매기는 가격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양해를 바랄게."

"알겠습니다."

유나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선우 교수는 내 그림 '새벽 작업실'과 유나의 '여름 밤 바닷가'를 한쪽으로 밀고, 또 한 쪽에는 '거리의 촬영'을 뒀다.

"여기 두 점은 100, 여기 이 그림은 200."

우린 티는 안냈지만, 솔직히 조금 놀랐다.

특히 '여름 밤 바닷가'는 이준성 교수가 수업 시간에 70만원을 매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30이나 높은 가격이었다.

나도 마찬가지.

100만원이라니.

특히 유나의 '거리의 촬영'은 200만원이라는 높은 값을 받았다.

'역시 이번 크리틱의 진짜 왕은 유나였어.'

물론 학생들의 그림이 몇 백을 받고 팔리는 경우는 종종 들었지만, 그게 막상 우리의 이야기가 되자 신기하게 여겨졌다.

오선우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할게. 이 전시에 참여한 다른 학생들에겐 미안하지만, 너희 둘 그림이 제일 먼저 팔릴 거야. 너희들은 한국대니까. 슬픈 일이긴 하지만 한국대 타이틀은 크거든. 특히 이 그림은 200보다 더 불러도 될 것 같은데, 그냥 이 정도만 하자. 괜찮지?"

200만원도 유나는 굉장한 값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유나는 일할 땐 똑 부러졌지만, 영혼은 순수한 어린 여학생이었다.

유나는 태연한 척 웃으며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서명길 교수가 한 마디 더 보탰다.

"한유나라고 했나? 만약 일찍 화가로 명성을 얻고 싶으면 말이야, 이 그림과 비슷한 그림을 몇 장 더 그려보도록 해. 나한테 연락해도 되고, 이준성한테 말해도 되고.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좋아할 거야."

"웃기지 말라고!"

그러자 이준성 교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준성 교수가 막말을 하는 건 학생 한정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이, 제주도 촌놈. 저 시시한 놈이 한 말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넌 이제 스무 살이야. 그림을 어떻게 팔고, 어떻게 명성을 얻을까는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네가 원하는 걸 그려라. 무엇이든 맘대로 막 그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네 스타일이나 네 방식을 미리 정하지 말란 말이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이준성 교수도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수업시간에는 팔리는 그림을 그리라고 그렇게 소릴 지르더니, 밖에 나오자 정반대의 소리를 했다.

'마음대로 막 그리라니······'

그런데 이번에도 이준성 교수의 말에 찬성이었다.

나도 유나가 마음대로 막 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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