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사격 □
심사가 끝나고 우린 모두 긴장이 풀렸다.
"교수님들이 우릴 이렇게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매일 같은 학교 그림만 보다 다른 학교 그림을 보니까 또 새롭네요."
그런 잡담도 하고, 커피도 마셨다.
다만 상조는 입을 다물고 혼자 있었다.
상조는 원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협조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다만 학교에서는 다들 상조에게 맞춰줬을 뿐.'
그림도 잘 그리고, 괜히 대립하면 피곤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상조의 기분 따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집계가 끝났다.
이영조는 윤혜원이 건넨 점수표를 확인했다.
"그럼 3등부터.."
"우우! 그냥 왕만 발표해요!"
"맞아요. 이게 뭐라고."
"그럼 1등만 발표하겠습니다. 2등과 단 2점차. 1등은...."
이영조가 뜸을 들였다.
그리고 그게 뭐라고, 우린 긴장하고 이영조를 바라봤다.
"한국대학교 이주원씨입니다."
역시.
사실 내가 생각하는 1등은 유나였다.
하지만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하면 겨우 3명만 남는다.
그러니 심사풀이 너무 적어 공정한 심사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상조와 제일 대립각을 세웠지.'
사실 이 왕게임에는 감춰진 트릭이 있었다.
크리틱 이후 각자 자신이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주원에게 점수를 주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모두 한 점씩 그림을 걸자고 주장했으니까.
물론 6명 중에 작가적 자존심을 지킨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글쎄. 어쩌면 세상에 순수한 미대생은 김태민 밖에 없을 지도.'
그래도 뭐, 상관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럼 2등은 누구죠?"
내가 이영조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한국대. 한유나씨입니다."
이영조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둘 다 1학년이었다.
그림에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유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뜻일 것이다.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1등과 2등만 두 점을 거는 걸로. 그리고 모두 50호 기준 한 점을 거는 걸로 하죠. 50호보다 작은 사이즈라면 경우에 따라 두 점 이상도 가능합니다. 리플릿 인쇄업체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모두 그림 파일과 작가 노트를 제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가 남았다.
나는 윤혜원에게 걸어갔다.
"저, 혜원 선배님?"
"네?"
"혹시 이번 전시에 이 그림, 여름의 인상을 내실 건가요?"
"네.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서요."
"그럼 저 대신 그림 두 점을 거실래요? 전 어차피 준비된 그림이 한 점 뿐이거든요."
난 윤혜원에게 내 특권을 양보하기로 했다.
"혜원 선배님 그림은 두 점이 연작이니까, 둘이 모여야 의미가 완성되잖아요."
"하...하지만."
입으로는 거절을 말했지만, 윤혜원의 얼굴에 기쁨이 비쳤다.
전생에 대한 내 소소한 보답.
물론 앞으로도 친하게 지낼 수 있다면 더 많은 보답을 할 것이다.
전생에서 그녀가 내게 베푼 친절은 그녀에게는 작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소중한 기회였다.
'지난 생에 더 고마워했어야 했는데.'
전생의 나는 쉽게 지나쳤다.
아마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하시죠, 선배님. 그럼 저도 뿌듯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윤혜원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지하의 크리틱이 마무리 되었다.
유나와 나는 신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카니발을 질주했다.
우린 거의 일주일동안 잠도 못 잤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점잖은 척 태연하게 굴었다.
하지만 둘만 남게 되자 우린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며 마음껏 승리를 기뻐했다.
"전하!"
유나가 나를 놀렸다.
"유나야. 난 네 그림이 1등이라고 생각해."
"아니야. 네 그림도 정말 좋았어. 자격이 있어."
우리는 둘 다 진심으로 말했다.
이제 우리는 너무 친해서 어설프게 거짓말을 하면 금방 알아챈다.
우린 정말 서로에게 더 열심히 그리도록 이유가 되어준다.
유나 뿐만 아니라, 김태민과 남동민도.
좋은 경쟁자들이 곁에 있어 든든했다.
* * *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이제 더위가 한풀 꺾이고 있었다.
유나, 태민, 수진, 정화와 같이 쇼핑몰 일을 정리하고 학교로 가자, 학교가 평소와 달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학교 전체에 음악이 시끄럽게 울리고, 푸드 트럭과 놀이기구들이 여럿 들어와 있었다.
"설마?"
"설마 이 추레하고 어설픈 게?"
그랬다.
이 추레하고 어설픈 것이 바로 한국대학교의 대학 축제였다.
우린 축제가 시작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보통 대학교 축제는 재미와 낭만이 가득한 대학 생활의 큰 즐거움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대는 예외였다.
모든 학생이 바쁜 학교.
누구도 결속을 원치 않는 학교.
축제를 즐기는 사람도 얼마 없었고, 그만큼 행사도 초라했다.
'그냥 동네 장터 놀러온 기분.'
나야 다른 대학의 축제를 한 번 겪어봤다.
그리고 수진, 정화 선배는 벌써 2년 째.
하지만 유나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축제라니."
유나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김태민은 달랐다.
"와, 팡팡이다!"
김태민은 순식간에 트램폴린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김태민이 사라졌다.
"주원아."
유나가 내게 말했다.
"응?"
"한 십분 있다가 김태민 잡아와. 쟤 놔두면 저거 뛰느라 분명 오후 수업 재낀다."
우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김태민 때문에 강제로 축제 감상 모드에 들어갔다.
촌스런 축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모아두니 은근히 설레기도 했다.
"어? 저 인형 예쁘다."
수진 선배가 한 부스를 가리켰다.
거기엔 공기총 사격대가 있고, 인형들이 경품으로 걸려 있었다.
"저기, 하늘색 공룡 인형 말이지?"
그때 뒤에서 누군가 쓰윽 나타났다.
김대성이었다.
사실 이번 학기 복학한 김대성은 수진 선배에게 반한 남자 클럽에 가장 최근에 가입한 1인이었다.
"안녕하세요."
나와 유나의 인사를 산뜻하게 씹고는 김대성은 돈을 지불하고, 공기총을 건네받았다.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특등 사수였거든. 정화야, 넌 갖고 싶은 인형 없어?"
타앙! 탕! 탕!
김대성은 인형을 향해 공기총을 연사했다.
하지만.
"아저씨, 열 발 더요."
그림만 보면 화가를 알 수 있다.
그림이 어설픈 인간은 인생도 어설프고, 그림이 야무진 사람은 인생도 야무지다.
단, 김태민은 예외다.
아무튼 다시 김대성.
"이게 영점이 안 맞네. 그래도 이제 감 잡았어. 아저씨, 열 발 더요."
그냥 인형을 사는 게 싸게 먹힐 뻔 했다.
"주원아. 나는 저기 구석에 고릴라 인형."
유나도 인형을 가리켰다.
나는 전생에 5주 훈련을 받은 게 전부였다.
"아저씨, 열 발이요."
나는 돈을 내고, 김대성 옆에 서서 공기총을 손에 쥐었다.
타앙!
하지만 첫발은 빗나갔다.
"그치? 이상하지? 여기 영점이 틀리다니까. 특등 사수인 나도 못 맞추는데, 미필인 네가 어떻게 맞추겠냐."
김대성이 안심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게는 노력 상점이 있지.'
먼저 [전신 스트레칭 ]
온 몸이 이완되고 총을 쥔 자세도 편안해졌다.
그리고 [숲 속 산책]
시끄러운 내면이 정돈되었다.
바로 옆의 김대성도, 주위의 시끄러운 사람들도 전부 사라지고 나와 인형만이 남았다.
타앙!
"끼약! 맞췄다! 역시 이주원!"
신나서 방방 뛰는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김대성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끝이 아니지.
또 한 번 타앙!
"이야! 이주원 최고!"
내가 공룡 인형까지 맞추자 수진 선배가 환호했다.
"공룡 이름은 하늘이로 지을 거야!"
마냥 신난 수진 선배를 보며 김대성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난 미키 마우스!"
타앙!
정화 선배 선물까지 한 방에 맞췄다.
"나는 소방차 변신 로봇!"
"응?"
어느새 김태민이 돌아와 자기 장난감을 외쳤다.
"형은 뭐 필요한 거 없어요?"
"...."
그렇게 살짝 김대성도 놀려주고, 우린 장난감을 들고 신나서 강의실로 향했다.
"잠깐!"
이번엔 남동민이었다.
남동민이 나타나 우리 앞을 가로 막았다.
"주원아. 태민아. 오늘 수업 끝나고 좀 남아라."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했다.
"아, 그래. 아쉬운 대로 대성아, 너도 같이 남아라."
김대성과 남동민.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이준성 교수를 따라 술자리도 가지면서 이제는 친해진 모양이었다.
"예?"
"무슨 일이죠?"
난데없이 남으라니, 살짝 불안이 밀려왔다.
"형이 부탁 좀 하자. 제발 남아서 좀 도와주라."
1학년 최고령자 남동민이 이렇게 애원하다니.
그 이유는 바로.
"디자인과랑 축구 시합이 있는데, 지금 이대로 가면 11명 채우지 못해 실격패 당할 것 같아."
남동민은 예비역답게 축구에 집착했다.
매년 축제 때 마다 과 대항 축구대회 같은 게 열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남학생은 얼마 없는 미대.
게다가 잦은 밤샘과 음주활동으로 운동과는 담 쌓고 지낸다.
당연히 상위권에 진출할 리가 없다.
하지만 1회전이 중요했다.
바로 디자인과와의 승부.
디자인과도 상위권 진출 불가능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디자인과와 서양화과는 전통의 라이벌.
다른 전공에겐 져도 괜찮지만, 서로에게는 질 수 없었다.
디자인과와 서양화과는 복수 전공자도 많고, 교양 수업도 많이 겹친다.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닌데, 적어도 운동 경기에서만은 이상한 자존심을 세웠다.
'꼴찌는 할 수 없다. 이런 건가?'
그리고 그 자존심 승부에 최고령 1학년 남동민이 합류한 것이었다.
"태민아, 너 축구 잘하지?"
김태민은 일단 늘씬늘씬.
몸에서 스포츠가 느껴진다.
"예? 달리기는 잘 해요."
김태민은 합격.
"주원아. 넌 당연히 잘 하지?"
나는 약간 아재 이미지에 시골 총각 이미지.
당연히 축구를 잘 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어깨에 문제가 있어 공익 판정을 받았다.
어깨에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운동은 웬만큼 다 잘하는 편.
'아파트 신문 배달도 문제없이 했으니까.'
"형, 저는 군대에서 골키퍼 봤습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았는데 김대성이 알아서 대답했다.
남동민이 우리 셋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제발 두 시간만 뛰어주라. 어쩌면 대학 와서 마지막 축구 경기일 지도 모르는데, 한 번만 이기게 해주라."
입학 후 처음이자 곧바로 마지막 경기.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예, 형."
나와 김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 맡겨만 주세요. 제 별명이 대성 병지입니다."
김대성 역시 의욕이 넘쳤다.
그리고 오후의 축구 시합.
서양화과는 원래 사회성이 없다.
그리고 3, 4학년은 각자 작업으로 바쁘다.
덕분에 선수도 없지만, 응원단도 없다.
거기에 비하면 디자인과는 거의 군대.
단합이 잘 된다.
일찌감치 운동장에서 11명의 선수와 응원담당 여학생들까지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양화과의 오랜 친구 동양화과에서 3명의 용병을 파견해줘서 겨우 11명을 채웠다.
우리가 운동장에 도착하자,
"하하하, 동민이형. 11명을 못 채워서 싱겁게 이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선수들을 맞춰왔군요."
디자인과 1학년 과대가 남동민을 약올렸다.
"후후. 우리는 선수 중 무려 5명이 예비역이다. 군대 축구를 무시하지 마라."
서양화과는 나이가 들쑥날쑥이니 당연히 예비역이 많다.
"하하하. 예비역 형님들. 무리하다 쓰러지지나 마십시오."
디자인과 과대가 우리를 비웃었다.
"디자인과 파이팅!"
"디자인과의 단결을 보여줘!"
그리고 디자인과 여학생들이 벤치에 앉아 소리쳤다.
"동민이형. 우린 응원단도 있습니다. 서양화과는 응원단은커녕 후보 선수도 없죠?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런데 그때였다.
"서양화과 파이팅!"
"동민오빠 파이팅!"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 유나가 나타났다.
단 세 명이지만 그 세 사람은 일당백의 특급미녀.
디자인과 선수들의 얼굴에 당혹과 부러움이 흘렀다.
특히 수진 선배는 미대 전체를 제패한 최강 미녀였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세 명이 다가 아니었다.
"태민아, 파이팅!"
이혜란을 비롯한 서양화과 1학년 여학생들.
"태민아! 주원아! 우리도 왔다!"
오랜만에 등장한 조소과 누님들.
"동양화과 파이팅! 태민이도 파이팅!"
3명의 동양화과 용병을 응원하겠다는 핑계로 김태민을 보러온 동양화과 여학생들.
이번에는 선수보다 응원단이 더 많았다.
서양화과 최근 10년 이내, 가장 많은 응원단이었다.
"후후후. 이게 우리 서양화과의 클라스다."
기여도 제로인 김대성이 제일 당당하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