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돌아온 파이터 □
우리들은 앞에 나가서 상조의 드로잉과 유화를 감상했다.
먼저 드로잉부터.
제목 '지하철 일기'처럼 지하철의 풍경이었다.
모든 드로잉 아래에는 상조가 손 글씨로 그림을 그린 후의 생각과 감정을 적어두었다.
정말 그림일기 같은 구성이었다.
그림은 가지각색.
지하철 내부뿐만 아니라, 지하철 역과 등하교 풍경까지.
자기는 언제나 그리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이 드로잉 연작의 컨셉인 것 같았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서 꼼꼼히 살펴봤다.
'상조도 그동안 정말 많이 노력했구나.'
드로잉은 훌륭했다.
무엇보다 지우고 고친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의 손놀림만으로 대상을 빠르게 표현했다.
'이런 건 재능뿐만 아니라 노력도 필요하지. 이 한 장을 그리기 위해 수백 장 연습했을 거야.'
나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내가 상조를 처음 만난 것은 3학년 1학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상조의 소문은 전부터 들었다.
상조는 2학년 때부터 이미 선배들을 제치고 회화 동아리의 대표였고, 각종 공모전에서도 성과를 내고 있었다.
'1학년 때부터 꾸준히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구나. 입시 때도 상위권이었는데, 그때보다 훨씬 실력이 늘었어.'
나는 그림 밑의 손글씨도 읽어보았다.
[ 보잘 것 없는 대학생인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오직 그림 그리는 일만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어서, 나는 그 날 이후 매일 등교하는 지하철에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
[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하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그림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틀렸다고 말해주기 위해서, 나는 매일 매일 그림을 그려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다. ]
뭐 이런 식의 글들.
나는 눈을 돌려 이젤에 걸린 두 점의 유화를 살폈다.
"이 그림은 저희 아버지의 초상화입니다. 제목은 나의 운명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제가 시작되었고, 시간이 지난 후에 나 역시 아버지의 얼굴로 늙게 되리라는 점을..."
상조가 자기의 그림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꽤 잘 그린 그림.'
마치 수채화처럼 투명한 유화였다.
앞의 드로잉처럼 최소한의 터치만으로 사진처럼 아버지의 얼굴을 그렸다.
'입시 때 이렇게 했으면 한국대 붙었을 텐데.'
아마 상조는 아주 조금의 차이로 불합격 한 게 분명했다.
자기 수능점수가 높다고 자랑까지 했으니까.
원래 갖지 못하는 떡이 원망스러운 법.
'상조 녀석, 한국대를 증오할만 하네.'
그리고 마지막 그림은 한국 정보대 안에 있는 인공 연못의 풍경이었다.
'풍경화라...'
연못 주위를 걷는 학생들.
연못의 검은 수면과 주위의 정원을 그린 그림이었다.
'옛날 생각나네.'
난 상조의 풍경화는 마음에 들었다.
'정작 학교를 다닐 땐, 이 풍경을 지나쳤지. 상조의 그림 덕분에 좋은 기억이 떠오를 때도 있구나.'
이 그림은 고개를 끄덕여지게 했다.
상조의 그림도 분명 인정할 부분이 존재했다.
'우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세상의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하고 그것을 알리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화가들이 추한 감정으로 서로 싸우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지난 생의 상조가 내게 가혹하게 굴긴 했지만.'
이번 생이 훨씬 중요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열등감의 치료제는, 상대를 인정해주는 게 아닐까?'
나는 어느새 잘난 상조를 보고도 비참하지 않을 만큼 성장한 것이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상조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상조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상조를 놔줄 때가 된 것이었다.
상조의 그림에서 오히려 성장한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오늘 이곳은 크리틱의 현장.
서로의 그림을 비평하고, 지적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서진석 교수가 말했지.'
[ 크리틱은 원래 물고 뜯는 겁니다.]
'이준성 교수도 그랬지.'
[ 나는 보리밟기를 하는 것이다. 내게 밟힐수록 너희는 더 깊이 뿌리 내릴 것이다.]
상조를 놔줄 때 놔주더라도 마지막 선물 정도는 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전부 상조를 위해서야.'
우린 모두 자리로 돌아갔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상조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다섯에게 물었다.
먼저 이영조.
"요즘 1학년들이 무섭군요. 최고였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초상화는 마치 사진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정교한 그림을 수정 없는 붓터치로 표현하다니, 진짜 대단한 실력입니다."
그리고 강주희의 의견.
"저는 지하철 드로잉이 제일 맘에 들었어요. 드로잉 실력도 탁월하고, 그림도 예뻤어요. 또 매일 그림을 그린다는 드로잉의 주제가 1년 돌아보기라는 전시에도 잘 맞다고 생각해요."
윤혜원은 짧게 의견을 말했다.
"상조가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내 차례였다.
"으흠."
일단 바람잡이용 헛기침 한 번 해주고.
"이건 그냥 크리틱일 뿐이니까, 생각나는 걸 편하게 말해도 되죠?"
"얼마든지. 뭐든지 말해봐."
나는 높임말을 했는데, 상조는 반말을 썼다.
'이 자식이.'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부터 나의 높임말이 너의 반말보다 훨씬 잔인할 테니까.
"먼저 이 드로잉부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로잉 작업을 널어둔 테이블에 다가갔다.
"주희 선배님은 이 드로잉이 맘에 들었다고 했는데, 혹시 이 드로잉 밑에 적힌 글귀도 다 읽어보셨습니까?"
"네?"
"이 드로잉들은 단순한 드로잉이 아니라, 밑의 글귀들과 같이 엮인 작업입니다. 그렇지, 상조야? 주희 선배는 다 읽어보셨습니까?"
강주희는 살짝 머뭇거렸다.
"그냥 훑어보기만 했어요. 다 읽진 않고, 몇 줄만. 볼게 많았으니까요."
"영조 선배는요? 다 읽어보셨습니까?"
"그냥 몇 줄만. 대강..."
"혜원 선배는요?"
"그...그게, 나도 몇 줄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의 일부인만큼, 글귀 역시 그림만큼 관객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왜 전부 이 드로잉의 글을 읽다 말았을까요?"
그리고 한 장의 드로잉 아래에 적힌 글을 소리 내 읽었다.
[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하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그림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틀렸다고 말해주기 위해서, 나는 매일 매일 그림을 그려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다. ]
"글에도 눈길을 붙잡는 기술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글들은 그냥 단어의 나열일 뿐입니다. 대체 한 문장 안에 몇 개의 주어와 술어가 있는 겁니까? 간결한 글쓰기는 중학교에서 배우지 않나요? 그림은 노력한 티가 나는데, 글은요? 그림 안에 적힌 글들은 필연적으로 곱씹어 읽게 됩니다. 이 글귀가 되풀이해서 읽을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 드로잉을 할 때의 제 솔직한 심정이며, 또 그림에 대한 제 열정을...문장의 미숙한 점은 고치면 됩니다!"
상조는 단호하게 말했다.
"문장만의 문제일까요? 이 전시의 관객을 한 번 생각해보죠. 45세 미대 교수의 친구들. 중견 화가의 그림을 구매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사람들, 혹은 이미 구매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전시를 연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대부분 평균 이상의 교육과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도 합당할 겁니다. 그들이 왜 스무살 미대생의 자의식 과잉 징징거림을 꼼꼼히 들여다볼 거라 생각하죠?"
"징징거림이라니!"
나의 과격한 단어에 상조가 소리치듯 대꾸했다.
하지만 나 역시 빠르게 응수했다.
아예 더 기분 나쁘라고 나도 반말을 사용했다.
"징징거림이 아니면 뭐지?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다? 네가 뭐가 되었길래? 그림 좀 그리는 인서울 미대생이 대단한 성취라고 생각해? 이 글귀를 자의식 과잉이 아니면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중년의 관객들이 과연 이 글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
상조는 얼굴이 벌개져서 대답을 못했다.
원래 크리틱에서는 화를 내면 지는 것이다.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더 심한 문구도 있어. 읽어볼까?"
[ 오늘도 지하철에서 주름진 얼굴과 휘어진 허리의 노인들이 좁은 경로석에 앉기 위해 경쟁하는 것을 보며, 나는 나의 젊음을 헛되이 쓰는 것은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연필을 쉬지 않는다.]
"이것 역시 너무 긴 문장이야. 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 예술가라고 모든 말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잖아? 자신의 결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인을 비하하는 것을 자의식 과잉 외에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지? 이 드로잉들을 전시에 걸면 불쾌감만 줄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그림은 빼면 되잖아! 그래 그 부분은 내가 틀렸다고 치자. 글은 고치면 되잖아! 어차피 드로잉은 많아! 나는 매일 쉬지 않고 그렸으니까!"
"글만의 문제라고 생각해?"
내 질문에 상조가 다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상조는 자기의 드로잉이 완벽하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실 상조 그림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상조는 졸업하고도 몇 년 동안, 꽤 잘 나갔으니까.'
상조의 그림은 전생에서 보고 또 봤다.
어린 시절엔 마냥 대단해보였지만, 나중엔 역시 상조의 약점도 보였다.
'상조의 약점은...'
모든 그림들이 지나치게 예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상조의 그림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게 상조의 예술가로서의 한계였다.
"글만의 문제가 아니면? 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야? 설마 내 드로잉이? 넌 나처럼 그리지도 못하면서 내 드로잉이 틀렸다고 말하는 거야?"
"분명 넌 잘 그려. 하지만 네 그림을 봐. 네 드로잉 연작의 제목은 '지하철 일기'야. 넌 분명 매일 본 등하교 풍경을 그렸다고 적어놨고. 하지만 봐. 지하철 안의 모든 사람들은 미남, 미녀고, 인체 비율은 정확해. 너도 나처럼 그림을 재구성한 거야? 아닐걸? 정말 지하철 풍경을 그린거야? 아니야. 넌 그냥 지하철에서 그렸을 뿐이야. 네 그림은 외워서 그리는 것과 보고 그리는 것 사이에 어중간하게 있어. 이건 지하철 일기가 아니라, 지하철 그림 연습이지. 이 예쁘기만한 드로잉이 정말 이 전시의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말문이 막힌 상조는 도움을 요청하듯 강주희를 바라봤다.
강주희는 조금 전까지 상조의 그림을 극찬했었다.
강주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그러네요. 처음 볼 땐 참 예쁜 드로잉이다 싶었어요. 그런데 주원씨의 지적을 듣고 보니까, 제목이나, 글귀와 드로잉이 다 따로 노는 느낌이에요. 특히 글귀들은 좀 고쳐야 할 것 같아요.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상조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아마도 상조 주위에는 듣기 싫은 말을 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다 너를 위해서야, 임마.'
이게 끝이 아니다.
'나는 원래 파이터.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이준성...'
난 상조의 두 번째 그림인 아버지의 초상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그림도 전시에 걸 생각이었어?"
"그래. 이 그림이 왜?"
"십만원. 아니, 오만원."
"뭐라고?"
상조는 아버지의 초상화에 자부심이 넘쳤다.
그만큼 분노도 컸다.
하지만 나는 상조의 분노를 못 본척하고 이 그림을 칭찬한 이영조에게 고개를 돌렸다.
"영조 선배는 돈이 충분하다면 이 그림을 얼마에 사겠습니까?"
"예? 그...그게.."
내 갑작스런 질문에 상조도 이영조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하지만 이영조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강주희를 바라봤다.
"주희 선배는요?"
"글쎄요."
강주희도 대답하지 못했다.
윤혜원은 너무 착해서 패스.
마지막으로 유나를 바라봤다.
"안 사요."
유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마 수업 시간에 그렸겠지. 동기랑 교수들한테 칭찬도 많이 받았을 테고. 아버지도 좋아하셨겠지. 너도 만족스러웠을테고. 그래서 이 전시에 걸어서 어서 자랑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상조야. 세상에서 이 그림이 필요한 사람은 너랑 네 가족뿐이야."
물론 세상에 비싸게 팔리는 인물화는 많았다.
하지만 인물화는 소개팅과 비슷했다.
그림 속에 그려진 사람이 궁금하고 말을 걸고 싶고, 가까이 두고 싶어야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상조는 자기 솜씨를 뽐내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림은 일방적인 자기 이야기가 아니야.'
그림은 대화였다.
먼저 관객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궁금해 하고, 그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하지만 상조의 그림은 오직 자기 이야기뿐이었다.
기교를 한껏 뽐낸 얄팍한 초상화 속 중년 남자.
하지만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도, 상조의 아버지는 소개팅 상대로는 실격이었다.
"상조야. 이 초상화가 가치를 갖는 방법은 네가 몇십 년 후에 유명한 화가가 되는 경우 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이 그림만으로 네 미래를 확신하는 관객이 얼마나 있을까? 이 초상화를 전시에 거는 것은 이 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뺏는 것에 지나지 않아. 전시는 수업시간 과제 평가가 아니잖아?"
내 말을 들은 상조는 거의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대꾸할 의지도 전부 증발한 것 같았다.
그냥 부들부들 떨며 겨우 서 있을 뿐이었다.
지하실의 대부분이 나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 같았다.
상조가 도움을 청하듯 쳐다봤지만, 모두들 묵묵히 시선을 피했다.
풍경화는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좋았다.
그래서 패스.
나는 돌아가서 자리에 앉았다.
"자...크리틱은 크리틱일 뿐이니까...분위기를 진정시키고...이제 채점해 주시죠."
이영조가 어색하게 크리틱을 진행했다.
넋이 나간 상조는 자기 그림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고,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유나는 미소를 감추고 내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잠시 후.
혜원 선배는 전화기를 꺼내 채점표를 집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