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짬뽕 □
"지난 몇 달의 학교생활, 제 학교 작업실이 저에겐 제 20년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성취이자,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업실 풍경을 그렸습니다."
매일 10시간씩.
노력 상점의 아이템을 풀로 사용해서, 나를 갈아 넣어서 이 그림을 완성했다.
내가 그린 그림은 새벽 작업실 풍경.
새벽 시간이라 작업실에 있는 사람은 유나뿐이었다.
이젤에 발을 얹고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유나.
그리고 유나 뒤로는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미대 작업실.
'난 유나를 그리고 싶었지만, 실력이 부족했지.'
하지만 고민하던 내게 해답이 보였다.
바로 김태민의 테라코타 자소상.
김태민은 자기 마음대로 얼굴의 반을 잘라서 흙을 파냈다.
처음엔 괴상했지만, 계속 보자 의문이 생겼다.
'얼굴을 자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었나?'
얼굴 역시 신체의 일부일 뿐이었다.
'나는 유나의 얼굴을 그리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었지. 하지만 얼굴 전부를 잘라버린다면?'
안과 밖의 건물 사진을 찍었던 김동윤 사진작가도 그랬다.
인물의 손이나 신체의 일부만으로도 한 인물을 담아낼 수 있다고.
'나는 어차피 사람을 작업실을 구성하는 하나의 사물로만 쓸 생각이었어.'
그래서 유나를 그리되 유나의 얼굴은 캔버스 위쪽으로 잘려나가도록 배치했다.
얼굴이 잘려나간 인물화.
일부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무 살 대학생.
'가끔 말이 안 되는 일을 해도 괜찮잖아?'
단순히 작업실을 그리는 것만으로는 '1년 돌아보기'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내가 1년간 배운 모든 것을 이 그림에 넣어보자.'
유나의 이젤 옆에는 보조 탁자가 있었다.
거기엔 유나가 쓰는 구겨진 알루미늄 물감 튜브들이 있었다.
'반짝 거리는 것들.'
나는 서진석 교수의 수업시간에 포토리얼리즘을 배우며 반짝이는 소재들을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
반짝이는 대상들은 그리는 자체만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그리고 공기.'
나는 어항 안의 금붕어를 그리며 물로 가득 찬 공간을 그리는 방법도 연습했다.
'만일 작업실의 공기를 기체가 아니라 액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더 눅눅하고, 존재감 있고, 숨 막히고, 그림 속 모든 사물들이 공기에 녹아서 흔들릴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나는 내가 그림 그리며 배운 것을 전부 써먹기로 했다.
'에드워드 호퍼는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기 위해 과감히 사물들을 단순화 시켰지. 이준성 교수도 그랬어.'
[ 화가라면 세상을 재정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
나는 익숙한 작업실의 풍경을 내 마음대로 단순화하고 재구성했다.
그래서 분명 작업실을 그리면서도 작업실이 아닌 새로운 곳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김태민.'
이준성 교수나 서진석 교수 못지않게 내 1학년 최고의 스승은 바로 김태민이었다.
'검은 용의 비늘.'
김태민은 작은 붓으로 치밀하게 비늘 하나하나를 그려 넣었다.
그러자 마법이 생겨났다.
판타지속 드래곤이 생명을 갖고 살아난 것이었다.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얼굴이 잘린 유나는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다.
나는 드래곤의 비늘을 그리듯, 세필로 정교하게 유나의 남방 무늬를 따라 그렸다.
그리고 최근에 배운 임파스토까지.
그림 곳곳에 진한 물감으로 터치를 남겨서 강조점을 만들었다.
그림이 훨씬 터프하고, 생동감 있게 변했다.
'이만하면 정말 1년 짬뽕이지.'
물론 다음 그림은 이 그림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이 작업실 풍경이 이제까지 내가 그린 최고의 그림이었다.
크리틱의 승패와 상관없이 나는 후회 없는 그림을 그려냈다.
'이 그림이 바로 내 지금이야. 지금 내 자화상이고, 나 자신이야.'
이젠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제 그림의 제목은 '새벽 작업실'입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의견을 기다렸다.
먼저 윤혜원이 손을 들었다.
"와, 정말 대단해요. 유나씨 그림보고도 놀랐는데, 진짜 두 분다 능력자네요. 그림이 너무 예쁘면서도 특별해보여요."
윤혜원은 이 크리틱이 전시가 걸린 경쟁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았다.
이영조가 손을 들었다.
"사람을 그리면서 얼굴을 뺀다는 건 너무 안일한 것 아닌가요? 인물화가 아니라 정물화가 되어 버렸네요. 얼굴을 뺀 이유가 뭐죠? 설마 그리기 힘들어서 생략한 것은 아니겠죠?"
정답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정물화였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라면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나의 얼굴은 아직 내게 무리.
내가 대답하려는 찰나, 유나가 대신 손을 들었다.
"전 반대예요. 인물의 얼굴이 없기 때문에 그림 전체에 시선이 골고루 나눠진다고 생각해요. 여러 사물을 그린 군상극 같은 그림이에요. 만약 얼굴이 그려졌다면 그림의 매력이 반감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인물의 얼굴을 잘라내서 오히려 관객들의 관념에 도전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나의 서포트.
괜찮은 대답 같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유나야. 얼굴 그리기 힘들어서 안 그린 거 맞아.'
하지만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림이 참 예쁜 것 같아요. 한국대는 장식성을 중요시하나 봐요. 유나씨 그림도 그렇고. 나도 예쁜 그림을 좋아해서 두 사람 그림이 좋아요."
강주희도 의견을 말했다.
칭찬 같으면서도 말 속에서 가시가 느껴졌다.
그리고 드디어 상조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궁금했다.
'대체 뭐라고 할까?'
전생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언제나 나를 비웃고, 몰아가던 그 입.
전생에서는 늘 회피했었다.
'2년만 참고 지내면 끝날 줄 알았지.'
하지만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상조를 더 이상 만날 일이 없게 된 후에도 상조의 입과 시선은 늘 나를 따라다녔다.
마치 내 안에 각인된 것처럼.
'하지만 아니었어. 각인된 것은 상조의 비난이 아니라, 나의 비겁함이었어.'
이젠 피하지 않는다.
나는 상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발언을 기다렸다.
"제가 보기엔 그림이 엉망인 것 같습니다. 잠시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는데요. 너무 많은 사물을 그려서 그런 게 아닐까요? 얼핏 보면 괜찮은 그림 같아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점이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이젤 옆 협탁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선으로 그렸고, 목이 잘린 인물은 옆에서 보는 각도로 그렸고, 배경의 이젤들도 전부 제각각입니다. 이 그림은 말도 안 되는 조합, 추상화도 정물도 아닌 존재하지 않는 공간, 어설픈 거짓말 덩어리입니다."
상조가 날카롭게 나를 비난했다.
이영조가 내 그림에 얼굴을 들이댔다.
그리고 상조의 의견에 감탄하듯 대답했다.
"어? 진짜 그러네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모르고 지나갔는데, 상조씨 말대로 다시 보니까, 그림의 시점이 제각각이에요. 소실점도 여러 개고. 상조씨 분석이 예리한데요?"
"저, 제 생각엔..."
그러자 윤혜원이 손을 들고 조심스레 발언을 시작하려 했다.
나는 살짝 웃었다.
'겨우 이 정도였나.'
상조의 분석은 그저 비난을 위한 비난일 뿐이었다.
'내가 상조를 너무 높게 평가한 걸까? 어쩌면 지난 생 내내 나를 괴롭혔던 것은 상조가 아니라, 그냥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을까?'
"네, 말씀하세요."
나는 상조의 의견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먼저 윤혜원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저...그게 일부러 그런 것 아닌가요? 폴 세잔의 정물화처럼. 각각의 대상들이 가장 매력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여러 시점을 섞어 놓은 거죠. 저는 그래서 더 좋아보였어요. 마치 옛날 그림들을 탐구하는 미대생 그림 같아서요. 이 그림은 볼수록 훌륭해요. 상조가 말했듯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영조 오빠가 말했듯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요. 저는 그게 바로 이 그림의 가치라고 생각해요."
윤혜원이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을 대신해버렸다.
이 정도면 극찬이었다.
내가 부연 설명했다.
상조를 향해 여유롭게 미소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네, 맞습니다. 너무 많은 사물을 그리면 어지러울 것 같아서, 일부러 여러 개의 시점을 공존시켰습니다. 그랬더니 훨씬 정돈된 느낌이었습니다. 실험이 성공한 것 같아서 그림을 완성하고 무척 기뻤습니다."
나와 윤혜원의 대답을 듣고 상조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상조는 항상 거만한 무표정이었는데, 모처럼 표정이 생겼다.
대신 이영조가 대답했다.
"일부러 이랬다고요? 만약 입시 때 이렇게 그렸으면 떨어졌을걸요?"
나는 다시 웃었다.
이 유치한 양반아.
언제까지 입시 미술이나 할래?
나는 이영조와 상조를 향해 산뜻하게 대답했다.
"이건 입시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우리 입시는 예전에 끝났잖아요."
마지막으로 유나가 내 그림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내 차례는 마무리 되었다.
"전 작업실에서 이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고 있었는데요. 사람의 얼굴을 잘라내 버린 게 너무 좋았어요. 어떤 사람일지, 어떤 표정일지 궁금하게 만드니까요. 그리고 얼굴을 잘라낸 이유도 궁금하니까요. 관객을 궁금하게 하는 것도 괜찮은 그림의 조건이잖아요."
그려진 사람은 자기 자신인데 궁금하다고 하다니.
유나도 은근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내 다음 차례는 강주희였다.
강주희는 24살, 3학년.
군대에 간 시간이 없었으니 이곳에 모인 사람 중 가장 긴 시간을 꾸준히 그림에 할애했을 것이다.
'아크릴이군.'
강주희는 아크릴을 썼다.
지극히 아크릴다운 얕고 가벼운 그림.
"저는 사실 첫 전시가 아니에요. 몇 번의 전시 경험이 있습니다. 전시 말고도 꾸준히 책 표지나 상업 일러스트 작업도 하고 있고요."
강주희가 그린 것은 도시 풍경.
정말 예쁜 그림.
예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냥 인터넷에 아크릴 일러스트라고 검색하면 주르륵 나올 것 같은 그림들.'
나는 그래도 참을성을 갖고 한 번 더 그림의 장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예쁜 것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약간의 세련됨.
어린 여자의 미묘한 감정.
서울이라는 도시의 인공미.
도시의 거리 풍경이라는 점에서 유나의 그림과 소재가 겹쳤다.
그래서 더 불행했던 것 같다.
'미안한데, 스무 살 유나의 그림이 몇 배는 더 원숙해.'
유나 쪽이 더 다양한 감정과 더 다양한 색, 더 깊은 여운이 있었다.
'정말 이준성 교수의 말대로 자연을 보고 자라서 그런 걸까?'
유나의 그림이 제주도 바닷가 풍경이라면 강주희의 그림은 아스팔트 거리 옆의 화장품 가게 같았다.
"강주희씨의 그림은 포털 사이트의 신인 작가 코너에 소개되기도 했고, 미술 잡지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시대를 반영한 현대적이고 세련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학교 이영조가 노골적인 편들기 의견을 내어놓았다.
나는 솔직하게 강주희의 그림을 채점했다.
이제 마지막.
드디어 김상조의 차례였다.
우르르.
상조는 한 개의 그림을 가져온 게 아니었다.
1학기와 여름 방학동안 꽤 열심히 작업했는지, 이것저것 그림들을 늘어놓는 것에만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상조가 목소리를 깔고 느리게 말했다.
"전 작업량이 꽤 많고, 지금 당장 전시해도 제 몫의 벽면을 다 채울 수 있습니다."
역시 자신감 넘치는 발언.
"저는 학교에 입학한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오늘 가져온 작품은 그 결심을 충실히 지켜온 증거입니다."
상조는 두 개의 이젤을 펼쳐두고 두 점의 유화를 얹었다.
그리고 하나의 탁자를 가져와서 자신의 드로잉들을 늘어놓았다.
가끔 작은 그림이나 드로잉들을 여러 장 같이 걸어 전시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상조가 탁자 위에 늘어놓은 드로잉은 전부 열다섯 장.
"제 드로잉 연작의 제목은 '지하철 일기'라고 지었습니다."
"앞에 나가서 봐도 될까요?"
이영조가 질문하자 상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천히 살펴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그림을 크리틱할 때는 거만하게 굴던 상조가 자기 그림을 공개할 땐 한없이 공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