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지하의 크리틱 □
카페는 1, 2층을 카페로 썼다.
2층은 카페와 전시장이 섞여 있었고, 3층은 순수한 전시장.
지하도 있었는데, 지하는 주로 전시를 위한 준비 공간.
혹은 대형 입체 작품이 있는 경우 전시장으로 제공했다.
그래서 우린 카페 지하에 각자 그림을 가져와서 크리틱을 준비했다.
참여 인원은 6명.
이준성 교수의 제자인 한국대생 나와 유나.
서명길 교수의 지도 동아리 소속인 한국 정보대생 윤혜원과 김상조.
오선우 교수의 L대 제자들 이영조와 강주희.
"조심하세요! 우리 그림은 아직 안 말랐어요."
유나가 그림 앞에 서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제지했다.
"오호, 한국대 두 분은 일주일 동안 새로 그려오셨군요. 기대되는 데요?"
이영조가 견제하듯 말했다.
유나뿐만 아니라 모두 민감했다.
사실 별 것 아닌 전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조의 말대로 화가는 전시 욕심은 가져도 된다고 배운다.
오늘 이곳은 모두 욕심쟁이들.
그러니 어떻게 보면 기분 좋은 긴장감이었다.
"자, 길어질 지도 모르니까 어서 시작하죠."
이영조가 크리틱을 이끌었다.
"순서는 제비뽑기로 결정해요. 제가 만들게요."
역시 혜원 선배.
윤혜원은 자질구레한 잡일에 언제나 직접 나서는 타입이었다.
"제가 도울게요."
"아뇨, 별 일도 아닌걸요."
전생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서 사소한 일이지만 윤혜원을 거들었다.
'어쩌면 전생에서도 좋은 사람과 친해질 수 있었던 기회는 늘 있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어차피 지난 이야기다.
전생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나를 상조가 팔짱을 끼고 노려보고 있었다.
'참 한결같이 거만한 놈.'
지난 생 내내, 상조는 나보다 잘난 사람이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 거만하게 굴 땐, 뭐라 해야 하나 답이 없었다.
그는 거만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나는 비참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경우, 아마 나의 비참함을 지워줄 수 있는 것은 나의 노력뿐일 것이다.
'과연 오늘까지의 내 노력은 충분했을까?'
어서 이 크리틱의 끝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우린 윤혜원의 필통에서 쪽지를 뽑았다.
발표 순서가 결정되었다.
순서대로 이영조, 윤혜원, 한유나, 나, 강주희, 김상조.
점수는 자기 그림을 제외하고 1에서 10점까지 매긴 후, 크리틱이 끝난 후 같이 집계하기로 했다.
'내가 심사위원이라니...'
이런 방식은 처음이라 솔직히 재미있기도 했다.
* * *
더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크리틱을 시작했다.
우린 모두 한 장씩 채점표를 손에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영조가 먼저 자신의 그림을 앞에 걸었다.
"저는 제 그림의 제목을 회색의 자화상이라고 지었습니다. 제대 후, 복학해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또 미대를 졸업하면 어떻게 될 지를 고민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그때의 혼란과 불안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합니다."
'회색의 자화상'이라는 제목대로 흑백으로 그린 자화상이었다.
아마도 수업 시간의 과제였던 것 같았다.
그림 속에서 이영조는 청바지만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부터 상반신까지 붓은 거칠게 놀렸지만, 세세하게 근육이나 뼈의 묘사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혼란보다는 약간 자기 자랑처럼 보여.'
첫째는 몸 자랑.
군 생활동안 다져진 몸을 잘 묘사했다.
둘째는 솜씨 자랑.
마치 자기가 인체 해부를 제대로 배웠다는 걸 자랑하려는 것 같았다.
이영조는 그림 속에서 자신을 짧은 머리의 단단한 몸을 가진 생기 넘치는 20대로 그렸다.
하지만 세세한 육체의 묘사와는 달리 표정과 감정은 무채색의 과감한 붓질로 표현했다.
이영조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그림을 바라봤다.
'자기 그림에 꽤 만족하나 보군.'
하지만 그 자부심에 공감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림은 조금 아쉬웠다.
'남동민의 그림을 자주 봐서 그런가.'
미안하지만 별 감흥이 오지 않았다.
약간 남동민의 열화판 같은 느낌.
절대 못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동민처럼 특출 나지도 않으면서 그림 속에 자부심이 지나치게 넘치고 있었다.
'불안? 혼란?'
붓질만 거칠게 쓰고, 색을 강하게 대비시킨다고 해서 불안이 담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림 안에 감정을 담아내는 일은 나도 잘 못하겠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하니까.
어쩌면 내가 김태민이나 유나의 그림을 하도 많이 봐서 쓸데없이 눈만 높아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영조의 그림은 적어도 내겐 그랬다.
놀랄 이유가 전혀 없는 그림.
착실하게 배우고 연습했지만, 배운 것을 벗어나지는 않는 그림.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리고 곧 잊어버릴 것 같은, 그냥 좀 그리는 대학생의 그림이었다.
'잔인하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이영조의 담당 교수가 그를 추천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다른 학교 학생들의 그림을 좀 보고 반성하라는 뜻일까?'
그게 다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이영조의 그림이 받아야 할 정당한 점수를 채점했다.
한 번에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림엔 굳이 질문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상조가 손을 들고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인체를 잘 그리셨네요."
"감사합니다."
상조가 마치 아랫사람을 칭찬하듯 건조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영조는 넙죽 그 인사를 고맙다고 받았다.
나는 그래도 상조를 잘 안다.
몇 년이나 겪었고, 또 입시도 같이 했으니까.
절대 순수한 칭찬이 아니었다.
상조는 원래 남을 잘 칭찬하지 않는다.
'네가 이 정도라서 다행이다. 넌 제외다.'
칭찬이라기보다는 그런 선포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나도 동의했다.
'이영조는 안 되겠군.'
그에게 왕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이영조가 내 그림의 운명을 결정하게 둘 순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윤혜원의 차례가 되었다.
윤혜원은 두 점의 그림을 가져와 앞에 걸었다.
크기는 50호.
둘 다 작지 않은 그림이었다.
"전 이 그림들의 제목을 '여름의 인상'이라고 지었어요. 제목대로 여름방학동안 그렸습니다. 하나는 여름의 오전을, 하나는 여름의 저녁, 해가 지고 나서도 밝은 시간을 그렸습니다. 형태를 지우고 순전히 여름 어느 날의 빛의 인상만을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추상화였다.
추상화는 말 그대로 실재하지 않는 것을 그리는 그림.
그래서 어린 대학생의 경우, 완성도 있는 추상화는 드물었다.
혜원 선배의 그림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여러 개의 사각형이 교차하고 있었다.
'약간 마크 로스코의 그림 같기도 해.'
하지만 로스코의 유명한 그림들보다 훨씬 번잡했다.
나쁜 의미의 번잡함이 아니라, 생기 있는 번잡함.
로스코가 중후한 대가라면 윤혜원의 그림은 발랄한 소녀 같았다.
'밝게 빛나는 사각형들은.'
아마도 물감을 여러 겹 발라서 그런 효과를 얻었을 것이다.
사각형들에 물감을 채워가며, 변해가는 색의 탐구 과정 같은 그림이었다.
'하나는 오전, 하나는 저녁이라고 했지?'
혜원 선배의 그림은 정말 여름의 하루처럼 환하고 경쾌했다.
'군더더기 묘사나 감정이 배제해서 오히려 그림의 색에 집중할 수 있어.'
그림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복잡한 인체를 그린 이영조의 그림이 더 나아보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직접 그림을 그려봤다.
그래서 윤혜원의 그림이 훨씬 그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추상화, 특히 이렇게 시간을 들이는 추상화는...'
한 순간, 한 순간, 색의 의미와 효과를 고민하며 조심스레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빛의 인상인 만큼, 모호한 대상의 느낌을 붙잡고 구체화하기 위해 수없이 시도했을 것이다.
보고 그릴 대상이 있는 그림과는 달리, 추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결과를 모르는 불안과 싸워서 완성해야 한다.
'불안을 그렸다는 이영조의 그림보다 오히려 훨씬 불안해. 감정이 있는 대상은 없지만,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어.'
나는 기뻤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옛 친구가 근사한 그림을 그려서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혜원 선배가 자신의 그림을 잘 그리고 있는게 반갑고 고마웠다.
'혹시 내가 혜원 선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마움 때문에 그림을 실제보다 더 좋게 보는 것은 아닐까?'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손을 들고 질문했다.
"이런 색면 추상은 이미 세상에 많습니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차별되는 점이 있을까요?"
질문만 들으면 마치 내가 그림을 공격하는 것처럼 여겨질지도 몰랐다.
뜻밖에 윤혜원은 내 질문을 듣고 환하게 웃었다.
"차별점이요? 어쩌면 없을 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여름들이 서로 비슷한 것처럼 말입니다. 애초에 이 그림은 차별점을 갖고, 나만의 미학을 완성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 아닙니다. 스물세 살 대학생이 어느 날 마주친 빛의 인상을 그림에 담아내려 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차별점이나 철학적인 색의 사유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그림의 목적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혜원 선배의 대답을 듣고 미소가 지어졌다.
'멋진 대답인데.'
정말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라면 목적을 충실히 달성한 것 같았다.
'이준성 교수의 말대로라면 충분히 공감을 사고, 잘 팔릴 그림이야. 추상화라는 메리트도 있고. 장식성도 충분해.'
그림은 두 점이지만, 당연히 점수칸은 하나다.
나는 윤혜원의 그림이 받아야 할 정당한 점수를 매겼다.
그리고 드디어 유나의 차례였다.
'떨지 마.'
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 모양으로 작게 말했다.
'안 떨어 이 바보야. 내가 넌 줄 아냐.'
유나는 대답하지 않고, 휙 지나쳤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대답했을 것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유나는 아직 덜 마른 자기 그림을 앞에 걸었다.
유나는 가볍게 한 번 웃었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 그림의 제목은 '거리의 촬영'입니다. 사실 저는 의류 쇼핑몰 피팅 모델로 일하고 있습니다."
"역시."
유나의 발표 도중에 이영조가 크게 중얼거리며 한 번 흐름을 끊었다.
유나는 개의치 않고 다시 발표를 이었다.
"저희 쇼핑몰은 거리에서 파파라치 컷처럼 촬영합니다. 지금은 많이 익숙해졌는데, 처음엔 힘들 때도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예쁜 척 포즈를 취해야 하고, 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덤덤한 척 연기하지만,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비웃지는 않을까 무섭고 걱정될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무심한 바보였군.'
나는 그저 유나가 강철 멘탈이라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 시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저는 카메라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세상에 나와 카메라 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거리 한 복판에서 같은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마치 혼자 있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혼자라는 착각은 외롭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하고, 또 그 착각이 거짓인 것 같아 다시 무섭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상황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유나는 무늬가 들어간 청록색 원피스를 입고 거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젊은 남자가 카메라로 얼굴을 가리고 유나 앞에 서 있었다.
'아마도 나겠지.'
유나의 그림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살짝 즐거웠다.
그리고 유나와 카메라맨 주위를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있었다.
'이준성 교수가 유나는 빛과 색을 잘 다룬다고 했지.'
거리 위의 사람들은 저마다 선명한 색의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거리의 가로수나, 장식 타일, 그림자까지 선명한 색을 가졌다.
그리고 거리 위 여러 방향에서 빛이 쏟아져 튀어 다니고 있었다.
사물들의 투명한 그림자가 빛을 따라 춤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까지 본 유나의 그림 중에 최고야.'
그림을 그릴 때마다 발전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유나 역시 매순간 성장하고 있었다.
무척 복잡하고 역설적인 그림이었다.
환한 밝은 낮.
선명하고 경쾌한 사람들.
하지만 그림 전체에 외로움과 우울이 잔잔하게 전해졌다.
'어쩌면 유나도 김태민 못지않게 천재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놀란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다.
"저기요, 1학년이라고 했죠? 1학년 맞는 거죠?"
이영조가 확인하듯 물었다.
"그림 너무 예뻐요."
윤혜원이 앉은 자리에서 웃으며 말했다.
크리틱 의견이라기보다는 그냥 감탄사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상조도 손을 들었다.
"유나씨. 좋은 그림을 잘 봤네요. 밝은 낮을 배경으로 빛의 반사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새롭네요."
상조가 느끼하게 유나씨라고 불렀다.
칭찬은 분명 칭찬이었다.
다만 느릿느릿, 낮게 내리깐 목소리.
마치.
'유나씨 정도라면 내 전시 파트너로 적당하겠네요.'
이렇게 들렸다.
그래서 조금 씁쓸했다.
'이거 크리틱에서 지면, 전시 기회도 뺏기고 유나도 뺏기는 거 아닌가.'
그런 장난스런 생각도 들었다.
유나의 그림이 훌륭해서 좋았다.
공정하게 심사하면서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 곁에 배우고 존경할 수 있는 든든한 동료가 있다는 사실도 무척 좋았다.
'잘했어.'
내가 입술 모양으로 칭찬하자,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내 차례였다.
나는 유나의 점수를 채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대단한 그림 뒤에 내 그림을 걸기는 좀 떨리지만.'
그래도 순서는 이미 정해졌다.
나는 앞으로 나가 내 그림을 걸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훑어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대성도 데려올 걸.'
내 자신감 보조 배터리 김대성.
내가 김대성을 그리워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리고 발표를 시작했다.
"저는 이번 전시가 교수님들이 1년을 돌아보는 자리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1년을 돌아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