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작업실 □
"여름 풀꽃이라고?"
그 말을 들은 김태민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는 풀꽃을 그리면서 나보곤 고양이를 그렸다고 뭐라 그래?"
성격 좋은 김태민이 화 비슷한 걸 내는 건 거의 처음 본다.
물론 진짜 화낸 것은 아니었다.
"나 이거 소문 낼 거야."
"그러자."
이준성 교수의 전시 제목이 여름 풀꽃이란 사실은 남동민은 물론 김대성, 정화 선배, 수진 선배까지 모두 알아야 했다.
아무튼 그랬다.
"그래서 새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응."
미리 그려둔 그림 중에서 하나를 가져가도 된다.
일주일은 유화물감이 마르기에도 부족한 시간.
속성 건조제를 사용하면 조금 빨리 마르긴 하지만, 나중에 크랙이나 미묘한 색감의 차이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실력이 늘고 있었다.
그러니 그림을 새로 그릴 생각이었다.
'특히 이번에 상조를 완전히 떨쳐내기 위해서는...'
"뭘 그리려고?"
"너."
"나?"
김태민이 되물었다.
교수들의 전시는 1년을 되돌아보는 의미였다.
그래서 나도 올 한 해, 아직 가을이지만, 1년을 되돌아보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올해 나는 많은 것을 이뤘다.
'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이 작업실.
그리고 같이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김태민과 유나를 그려보고 싶었다.
'솔직히 유나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더 크지만.'
뜬금없이 유나를 그리겠다고 하면 어색할 것이다.
유나가 허락해줄 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김태민도 그리고, 유나도 그리기로 했다.
지저분한 작업실.
미완성의 캔버스.
창밖의 시간은 푸르스름한 새벽.
뒹구는 물감 튜브.
오일 통에 담긴 붓들.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인물도 그릴 생각이었다.
김태민이야 결심만 하면 무엇이든 쓱싹 그릴 수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리기 전 촬영을 하고, 스케치북에 여러 번 스케치하고, 수채물감으로 미리 그려본 후에 작업한다.
"나를 그리겠다고?"
김태민이 다시 물었다.
"어. 네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그리고 싶어. 그러니까 나 보지 말고, 어서 그림 그려."
찰칵. 찰칵.
나는 그림 그리는 김태민의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하면 돼? 턱을 조금 더 들까? 가르마는 괜찮아? 나 반곱슬이라서 가르마 반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아오...
그냥 좀 닥치고 그림이나 그리라고.
나는 일주일에 몇 천 컷 쇼핑몰 사진을 찍는다.
작은 표정 하나에도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포즈를 수십 컷 찍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김태민 사진 찍는 게 그것보다 열배는 더 힘들었다.
'내가 부탁한 입장에 화도 못 내겠고...'
"태민아, 괜찮으니까 그냥 그림 그려. 내가 알아서 찍을게."
"응. 나 음악 들으면서 그릴 때도 있는데 이어폰 끼울까?"
"맘대로 해."
"검정색 앞치마도 있는데, 그거 입어볼까?"
"편한 대로 해."
"나 이젤에 발 올려놓고 그리기도 하는데, 운동화로 갈아 신을까?"
슬리퍼보다 끈 운동화가 그린 후에 간지이긴 했다.
하지만 제발.
"종이 팔레트 말고 나무 팔레트 들고 있을게. 그게 낫겠지?"
태민아, 제발. 제발!!
어쨌든 김태민의 촬영은 끝났다.
힘들었다.
김태민 인물화는 이번에 그리고 남은 평생 다시는 그리지 않을 것이다.
반면 유나의 촬영은 쉽게 끝났다.
"작업실이랑 친구들을 그린다고? 이렇게 하면 돼?"
유나는 가볍게 포즈를 취했다.
찰칵, 찰칵.
그렇게 유나의 촬영은 끝났다.
하긴 유나는 거의 프로 모델이니까 촬영에 익숙했다.
사진을 확인한 후, 유나가 웃으면서 경고했다.
"너, 제대로 그려라."
"최선을 다할게. 그런데 너도 다시 그리는 거야?"
"응."
유나의 그림이라면 그냥 그려둔 것 중 하나를 가져가도 괜찮을 텐데.
하지만 유나 역시 매번 최선을 다 하는 스타일이었다.
"전에 이준성 교수가 나보고 빛이랑 색을 잘 쓴다고 했잖아. 흘려서 한 말 같은데 생각해보니까 그게 내 장점이 맞는 것 같아서. 빛이랑 색을 강조해서 새로 그려볼까 싶어."
이준성 교수가 입이 험해서 그렇지 그림 보는 눈은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 유나의 기교는 거의 완성형이라 빛이랑 색 말고도 문제 삼을 곳이 없었다.
유나도 나처럼 크로키북을 꺼내 이것저것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유나도 크로키북이 여러 권 있었고, 나는 그 중 하나를 맘대로 펼쳐서 살펴보았다.
유나의 낙서와 드로잉들이 가득 차 있었다.
'훌륭한 솜씨, 재미있는 상상력들.'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도 있었고, 일기 같은 메모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꽤 친해서 내가 마음대로 크로키북을 뒤져도 유나는 별 말이 없었다.
가끔 김태민의 그림을 보면, 숨이 막히거나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물론 세상엔 김태민보다 대단한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김태민은 내 옆에서 살아 숨 쉬고 있고, 또 같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김태민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보고 김태민이나 유나의 그림 중 하나를 가질 수 있게 해준다면?'
나는 유나의 그림을 택할 것이다.
김태민처럼 압도적인 느낌은 없지만, 훨씬 상냥하고 따뜻하고 편안하다.
방에 걸어두고 차 한 잔 마시며 휴식을 취하기에는 유나의 그림 쪽이 훨씬 좋았다.
나는 유나가 화가가 되기를 바랐고, 어떻게든 그 과정을 돕고 싶었다.
그리고 화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아무튼, 나는 유나의 크로키북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럼 파이팅."
"너도 파이팅!"
* * *
'먼저 김태민부터.'
김태민으로 인물화를 연습하고, 그 다음 유나를 제대로 그려볼 생각이었다.
물론 일주일 동안 두 개의 인물화를 그릴 순 없다.
이것저것 연습부터 해보고, 이번엔 둘 중 한 사람만 그려낼 생각이었다.
나는 노트북 화면에 김태민의 사진을 띄우고 김태민을 스케치했다.
그림을 그리면 비로소 다시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린다는 일은 사물을 관찰하는 가장 진지한 방법일 것이다.
'젠장.'
김태민은 직접 그려보니 더 잘생긴 것 같았다.
늘씬한 기럭지.
세상에 무관심한 눈빛.
그리고 김태민은 무척 그리기 쉬웠다.
원래 이쪽에는 잘생긴 사람이 그리기 쉽다는 통념이 있었다.
이목구비도 큼지막하고, 좌우대칭도 잘 맞고.
'어쩌면 반대일 지도 몰라. 잘생긴 사람이 그리기 쉬운 게 아니라, 그리기 쉬운 사람을 잘생겼다고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잘생긴 사람을 솜씨 없는 화가가 잘못 그리면 개성이 없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었다.
아무튼.
김태민은 몇 번 그리니까 감이 왔다.
'인물은 내 그림의 일부일 뿐이야.'
나는 어디까지나 지금 내가 성취한 장소.
미대의 작업실을 그려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고 인물은 그 작업실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렇게 김태민은 정리하고, 유나를 스케치해보았다.
솔직히 유나를 더 그려보고 싶었다.
'응? 이런...'
그런데 유나는 생각만큼 그리기기가 쉽지 않았다.
유나 역시 굉장한 미녀였다.
'그럼 그리기가 쉬워야 하는데?'
하지만 어려웠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내 사심 때문이었다.
그리기 위한 대상으로 순수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얼굴에 담긴 미묘한 차이나 의미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보는 유나는 언제나 여러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세심한 변화와 색상을 일주일짜리 그림에 담아내기에는 내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아직은 유나를 그리지 못하겠군.'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대강 뭘 그릴지 결정했다.
그런데 그때.
새벽이라 작업실에 혼자 있었는데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헐...깜짝이야.'
안 그래도 요즘 여고생 공포 웹툰을 만드느라 유령이나 귀신 이야기를 많이 읽었다.
게다가 한국대 건물이 낡아서 꼭 유령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가 느낀 인기척은 바로 김태민의 화분이었다.
'하아...이번에도 김태민...'
김태민이 자기의 얼굴을 잘라 만든 화분에 허브를 심어서 창가에 올려둔 것이었다.
* * *
그리고 며칠을 정신없이 보냈다.
쇼핑몰 일도 바쁘고, 원 디자인 일도 바빴지만, 이번 그림은 중요했다.
'첫 전시, 첫 그림 판매, 어머니의 여행, 게다가 전생의 악몽과의 결별.'
그래서 바쁜 게 더 즐거웠다.
새벽이든, 쉬는 시간이든 틈만 날 때마다 작업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노력 코인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잡생각제거]
[전신스트레칭]
[숲 속 산책]
그렇게 정신없이 그림에 매달리고 있다 보면, 어느새 작업실에 유나도 와서 새벽까지 같이 그리고 있었다.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공간.
같이 숨쉬고, 같이 고민하고, 같이 그림 그리고.
유나는 분명 지난 1년간의 내 가장 큰 성취였다.
"으, 어깨 아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중노동이다.
불편한 의자에, 이젤 앞에 꼿꼿이 앉아서 몇 시간 동안 팔을 들어 붓을 놀려야 했다.
나야 원래 체력이 좋은 편이고, [ 전신 스트레칭] 같은 치트키도 있었지만, 유나는 어린 여자의 몸으로 일과 그림까지 감당하느라 나보다 몇 배는 힘들 것이다.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어깨라도 주물러 줄까?"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왔다.
김태민이었다.
우리 둘이 열심히 그리자 괜히 김태민까지 자극받아서 새벽에 작업실에 온 것이었다.
'저 자식. 전시도 없으면서...'
내 속마음도 모르고 김태민은 해맑게 웃었다.
"너희들 참 열심히 하는구나. 쉬어가면서 해. 아, 그래. 내 얼굴 화분 옆에 가져다 두고 해. 테라핀이랑 물감 냄새 때문에 머리 아플텐데, 허브가 머리를 맑게 해 줄 거야."
그리고 김태민은 유나에게는 자기 이마를, 내게는 자기 턱 화분을 가져다 뒀다.
김태민은 잠깐 그림 그리는 시늉을 하더니 금방 작업실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태민아. 잠은 오피스텔 가서 편하게 자."
"싫어. 여기도 편해. 나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은 하던 대로 그림 그려."
이 얄미운 녀석.
편하기는 뭐가 편해.
하던 대로 그림을 그리라고?
그리고 잠귀는 얼마나 얕은지.
우리가 사소한 잡담만 나눠도 어느새 일어나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배고프지 않아? 24시간 중국집에 밥 시킬까?"
"그럼 난 볶음밥."
자는 줄 알았던 김태민이 어느새 자기 메뉴를 추가하고 다시 잠들었다.
"유나야, 태민이 얼굴 화분 도움이 되긴 해?"
"아니, 옆에서 노려보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그러다 문득 내 노력 상점의 기능들을 남에게 전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 미대의 과제는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튼 시간은 김태민처럼 빠르게 흘러서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자신 있어?"
"응. 자신 있어. 넌?"
"나도."
결과와 상관없이 우린 최선을 다했다.
우린 아직 덜 마른 그림을 조심스럽게 카니발에 실었다.
유나는 뒷자리에 앉아 행여 덜 마른 그림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림을 감시했다.
그리고 결전의 장소로 출발했다.
입시 이후, 최고의 결전.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오늘의 싸움 상대는 어쩌면 상조가 아닐지도 모른다.
무기력하고 패배에 찌들었던, 전생의 나 자신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반드시 이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