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왕게임 □
'자신이 없냐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다행히 얼굴로 티를 내진 않았다.
상조는 계속 말했다.
"그림 한 점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한 점을 걸어서 한 점을 파는 것도 힘들고요. 그리고 여섯 명이 손발을 맞춰, 의미가 통하는 전시를 하는 것도 힘들고요. 그러니 주목받을 기회를 여섯이서 나누지 말고, 두 명을 뽑아서 그 둘이 네 점씩 걸게 하는 게 어떨까요? 원래 화가는 전시 욕심을 내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우르르 몰려나가 그림 한 점 걸고 끝내는 것보다, 한 명이라도 제대로 주목받는 게 교수님들에게도 이득이 아닐까요?"
상조가 강하게 나가자 몇몇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이영조가 말했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투표로 결정하죠."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고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했다.
머리를 차갑게 하고, 기분을 진정시켰다.
'이번 생은 더 이상 상조에게 휘둘리지 않겠어.'
그리고 지저분한 기억과 감정들은 놓아주기로 했다.
'이번 생에 집중하자.'
화장실에서 나오자 유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
"응. 좀 피곤했나봐."
여유를 찾은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 느끼한 짧은 머리 아는 사람이야?"
느끼한 짧은 머리는 당연히 상조였다.
'음.."
뭐든지 유나에게 털어놓으면 기분이 편해지곤 했었다.
하지만 전부 사실대로 말하긴 힘들었다.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다.
"응, 미술학원에서 만났는데 나를 왕따시키던 녀석이야."
"너를 왕따시켰다고? 왜?"
"그림을 못 그려서?"
"헐."
내 대답을 듣자 유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제 다 끝난 이야기.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1층에 내려가서 음료 주문하고 올게. 뭐 마실래?"
나는 유나와 내 몫의 새 커피를 받아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아직 몇은 자리에 오지 않았는데, 상조는 맞은편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유나가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유나가 갑자기 내 팔짱을 꼈다.
"자기야. 우리 회의 마치고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자. 뭐 먹지?"
'얘가 왜 이럴까?'
유나답지 않게 어설픈 연기였다.
10초 정도 혼란스러웠지만 곧 적응했다.
'설마 이렇게 상조를 약 올리자는 건가?'
그런데 찌릿.
나를 노려보는 상조의 시선이 느껴졌다.
허술한 유나의 계획이 곧바로 먹힌 것 같았다.
유나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나는 조금 웃겼다.
'그나저나 유나와 팔짱을 끼면 이런 기분이었구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상조 따위에게 복수하는 것보다, 유나와 팔짱 낀 게 더 즐거웠다.
"둘은 사이가 좋네요?"
윤혜원이 자리에 앉으며 웃었다.
사람들이 오자 유나는 후다닥 팔짱을 풀었다.
"자, 그럼 표결을 시작하죠."
이영조가 말했다.
"먼저, 각자 한 점씩 걸고, 두 사람만 두 점 걸기. 찬성하는 사람?"
나, 유나, 윤혜원이 손을 들었다.
엥?
처음 이 의견을 냈던 이영조 조차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럼 두 사람을 뽑아서 둘이 네 점씩 걸자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
상조, 이영조, 강주희, 셋이 손을 들었다.
"저도 의견을 바꿨어요. 이런 전시 기회는 아무래도 자주 오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다른 대학교 학생들이랑 제대로 겨뤄보고 싶기도 하고요."
이영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3:3인데 어떡하죠?"
저마다 의견을 말하긴 했지만 별로 쓸모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유나가 손을 들었다.
"왕게임을 하는 거예요."
"왕게임이요?"
유나의 발언에 윤혜원이 궁금증을 표했다.
"어차피 둘을 몰아주든, 여섯이서 나눠서 전시하든, 우린 크리틱을 하고 1, 2등 두 명은 뽑아야 하잖아요?"
여섯 명이 전시를 나눠서하더라도, 한 점씩 더 그림을 거는 두 명은 뽑아야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끼리 크리틱을 해서 제일 높은 평가를 받는 1등이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여섯이 전시를 하든, 둘이서 전시를 하든 1등의 뜻에 따라. 왕게임처럼요."
"그럼 우리끼리 평가는 어떻게 하죠? 자기가 높은 등수를 갖고 싶어서 멋대로 점수를 매길 수도 있잖아요."
윤혜원이 말하자 이영조가 끼어들었다.
"우린 어차피 예술가 지망생이니까 서로의 작가적 자존심을 믿으면..."
그때 유나가 이영조의 말을 짜르고 대신 대답했다.
"그건 간단해요. 우리가 서로의 점수를 매기되, 스포츠 경기처럼 가장 높은 점수와 가장 낮은 점수를 제외하면 돼요. 그럼 비교적 공정한 심사가 될 거예요."
윤혜원과 이영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크리틱은 해야 하고, 두 명은 뽑아야 했다.
'왕게임이라...'
괜찮은 생각 같았다.
그런데 유나는 술도 마시지 못하는데 어떻게 왕게임을 아는 걸까?
그나저나 유나와 왕게임을 하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양말 벗어.'
혼자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느끼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은 생각인데요? 그렇게 하죠. 저는 찬성입니다."
상조였다.
원래 남의 의견에 좀처럼 찬성하지 않는 놈인데, 왕이 될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나씨 의견이 옳은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낭비할 시간은 없고, 우린 크리틱은 해야 하니까, 왕게임으로 결정하자. 좋은 생각입니다."
유나씨라고 함부로 부르다니.
상조까지 동의하자 만장일치였다.
참고로, 교수들은 전시 리플릿은 각자 간단하게 따로 만드는 모양이었다.
우리 역시 교수들처럼 여러 절차를 줄이면 그림만 제대로 준비한다면 일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1주일 뒤, 각자 그림을 가지고 여기서 모이죠. 그날 크리틱을 하고, 전시 인원부터 컨셉까지 1위가 다 정하는 겁니다."
상조가 마치 진행자처럼 말했다.
기분은 나빴지만, 우리 모두 상조의 의견에 찬성했다.
1주일 뒤, 카페의 크리틱.
나는 그날 상조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있을까?
* * *
세 편의 공포 웹툰이 완성되었다.
웹툰 작가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고, 웹툰이 완성되자 벌써 준비된 홈페이지에 싣기만 하면 끝이었다.
이번엔 크리스털 시네마의 전작과는 달랐다.
전작의 홈페이지는 영화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흥행을 위한 필사적이고 강렬한 홍보가 목적이었다.
"소포모어 징크스라고 알죠? 첫 작에 히트한 신인이 두 번째는 실패한다는 징크스요. 이 업계 사람들 절반이 내 실패를 기다리고 있어요."
안수정 대표는 비장했다.
다행히 크리스털 시네마는 전작의 성공으로 자금이 풍부했다.
그래서 곧바로 검색 사이트 배너 광고부터 걸어버렸다.
[ 잊혀지지 않을 공포를 감당할 수 있다면 클릭하세요. ]
배너 광고의 위력은 대단했다.
광고를 걸자마자 사이트 방문자 수는 5천, 1만, 2만을 순식간에 지나쳐버렸다.
전작의 홈페이지 댓글은 영화의 특성을 따라 잔잔했다.
[ 잘보고 갑니다.]
[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나네요.]
하지만 공포 웹툰이 실린 이번 홈페이지는 댓글부터 강렬했다.
[ 왓 더...]
[ 엄마야, XXXX ]
물론 이런 사기꾼도 있었다.
[ 와, 여고생의 풋풋함과 설레임이 전해지는 감동의 웹툰입니다. 모두 꼭 보세요! 강추입니다! 천재 웹툰 작가의 탄생입니다. ]
[ 마음이 훈훈해지는 웹툰이네요. ]
따르르릉.
이제는 익숙한 안수정 대표의 호들갑스런 목소리.
"사이트 방문자 수 보셨어요? 이번 영화 대박나면 어떡하죠?"
"대박나면 좋은 거죠."
영화 홍보도 순조로왔지만, 여기저기서 벌써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본토 미국에서 개봉 첫 주부터 박스오피스 탑 10에 들더니 2주째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공포 영화는 미국의 흥행을 그대로 답습하진 않으니까.'
물론 수입가가 비싸지 않아 손해를 보긴 힘들었다.
하지만 크리스털 시네마의 명성을 이어가려면 대박이 필요했다.
* * *
유나와 나는 동대문 사입 대행을 쓰고 있었다.
동대문 사입 대행이란, 우리가 매일 동대문에 가지 않더라도 옷을 대신 구매해서 우리 사무실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말했다.
그래서 매일 동대문에 가지 않고, 1주일에 한 번 정도 신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만 방문했다.
1주일에 한 번 동대문에 가는 날 팀 유나 세 명은 무척 들뜬다.
'진정한 일과 놀이의 결합.'
그리고 심지어 이 날은 회사 돈으로 무제한 간식을 제공하는 날이었다.
나는 발광하는 비글 세 마리를 동대문에 풀어놓고 따로 동대문 순례를 다닌다.
'주로 큰 거래처 위주로.'
나야 옷을 봐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큰 거래처는 직접 눈도장을 찍을 필요가 있다.
얼굴 보고 인사하고, 커피 한 잔 얻어먹고, 가끔 다른 사이트 소식도 듣고.
이런 게 도움이 될 거라 믿는 아재식 영업 방식이었다.
그리고 동대문에는 여러 가지 부자재도 많이 판다.
포장용 폴리백부터 사은품용 문구, 양말 같은 것들.
나는 유나 등등이 신상을 둘러보는 사이에 그런 부자재를 구입해 차에 싣는다.
'세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보다 이런 잡일이 훨씬 편해.'
그리고 은성사를 방문했다.
은성사 사장님이 찾아오라고 문자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어, 이 사장 왔나? 친구들은?"
"곧 이리 올 겁니다."
이제 은성사 사장님 부부도 팀 유나 세 명을 다 알았다.
세 명이 동대문 올 때마다 인사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은성사 사장님 부부가 우리 사이트를 자주 모니터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장이 참 복이 많아."
"제가요?"
"그렇게 예쁜 모델을 한 명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세 명이나 구했잖아."
그건 진짜 운이 좋았다.
"딱 봐도 여자 복이 많게 생겼잖아요. 서글서글하니."
"제가요?"
은성사 사모님이 내 얼굴을 칭찬하셨다.
전생에서도 종종 칭찬을 듣긴 했었는데, 학교에 들어온 이후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전부 김태민 때문이었다.
참고로 은성사 사장님 부부는 팀 유나 세 명을 모두 귀여워했다.
셋 다 예쁘고 착하니까, 당연한 이야기.
세 명이 도착하면 식혜부터 냉커피까지 온갖 간식들을 아낌없이 배달시킨다.
그래서 팀 유나 세 명도 은성사를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사장님. 오늘 왜 보자고 하셨어요?"
내가 묻자 은성사 사장님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는 동대문 상인.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순식간에 상인으로 변하곤 했다.
"보여줄게 있어. 이걸 좀 봐."
그리고 상가 안의 대봉을 뒤지더니 검은색 레깅스 두 벌을 꺼냈다.
'난 쇼핑몰을 하기 전에는 레깅스라는 옷이 있는 지도 몰랐지.'
지금은 레깅스를 아주 잘 안다.
꾸준히 팔리는 아이템이니까.
레깅스는 스타킹이나 타이즈 비슷하게 생긴 여성용 속바지 같은 옷이었다.
내 눈에 레깅스는 다 똑같이 생겼는데 여자들은 그 디자인 차이도 구별했다.
'내겐 그저 신기할 뿐.'
나는 사장님이 건넨 레깅스를 만져보았다.
디자인은 잘 몰랐지만 원단이 매우 우수했다.
은성사는 중국에서 대량으로 옷을 수입하곤 했다.
중국산 옷은 품질이 나쁘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가끔 이렇게 품질이 우수한 상품도 있었다.
인건비가 싸고, 생산의 규모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단이 참 좋네요."
"맞아. 이 사장이 많이 늘었군."
"그래도 디자인은 유나가 와서 봐야 알아요."
"그렇지. 여자 말은 잘 들어야 해."
그리고 은성사 사장님이 내게 물었다.
"이 사장, 자체 생산한 옷은 어떻게 되었지?"
"유나 재킷은 4백벌 추가 생산 들어갔습니다. 레이어드 티는 반응이 좋아서 벌써 다 팔렸고, 원단을 두껍게 해서 1000장 추가 주문 넣었고요."
"잘했어. 원래 자체 생산은 두 번째부터 진짜 이익이 남는 거야. 첫 생산부터 다 팔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잘했네."
"예쁜이 세 명이 고생했죠."
예쁜이 세 명이란 은성사 사장님이 팀 유나를 부르는 말이었다.
"이 레깅스 말이야. 중국인들이 값을 참 특이하게 매겨."
"네?"
"내가 이 레깅스를 매년 5천장씩 수입해서 팔아. 그 동안 꾸준하게 잘 팔아왔지. 그런데 중국인들이 만장을 주문하면 만 3천장을 준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사장이 어떻게든 인터넷으로 5천장만 소화해주면 나는 레깅스 3천장이 공짜로 생기는 거지."
"제가 5천장이요?"
레깅스는 꾸준히 팔린다.
가격이 좋고, 품질만 좋다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양이었다.
아마도 은성사 사장님들이 이제까지 우리에게 잘 해준 것은 바로 이런 경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 저희가 5천장을 구매해야 하나요?"
은성사 사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이제까지 하던 대로 주문 들어온 만큼만 가져가. 값도 싸게 줄게. 대신 싸게 많이 팔기만 해."
좋은 기회였다.
은성사 사장님 말대로라면, 윈윈이었다.
은성사는 3천장의 레깅스가 공짜로 생기고, 우리는 5천장의 레깅스를 저렴하게 공급받는다.
물론 옷에 관한 최종 결정자는 유나와 예쁜이들이었다.
하지만 은성사는 믿을 만한 거래처고 이번에도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잠시 후.
세 예쁜이가 도착해서 은성사의 레깅스를 살펴봤다.
"좋은 것 같아요! 원단도 짱짱하고 핏도 당겨주고."
"맞아. 저렴한 레깅스는 몇 번만 세탁해도 늘어나고, 보풀도 생기는데, 이건 오래 입을 것 같아요."
세 명이 동시에 칭찬했다.
거기에 값도 싸게 준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이것 받아요."
그리고 은성사 사장님은 세 예쁜이에게 가방을 하나씩 선물했다.
"샘플로 나온 건데, 가방이 참하더라고. 예쁜이들 생각나서 두 개 더 받아왔지."
"어머, 정말 저희 주시는 거예요?"
"그래요. 대신 레깅스 코디 잘해서 많이만 팔아줘요."
이러니 팀 유나가 동대문을 싫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
"이 레깅스를 미끼 상품으로 풀면 쇼핑몰 매출이 또 한 번 크게 오르겠지?"
유나도 이제 사업가가 다 되었다.
"언니들, 유나 재킷이 순항중이예요. 그러니 슬슬 다음 자체 생산을 알아보면 어떨까요?"
"음...나도 오늘 동대문에 와보니 눈이 가는 옷이 많더라고."
정화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레깅스를 모든 신상 코디에 끼워 넣어야 해."
수진 선배까지.
셋 다 이제 노련한 프로 쇼핑몰 운영자가 되었다.
셋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동대문에서도 착실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