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드래곤과 스트립댄서들 □
김태민은 앞으로 나가서 자신의 그림을 걸었다.
그리고 그림에 대해 설명했다.
"저는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는 배웠지만, 잘하지는 못해서 친구들이나 모르는 사람들한테 욕을 먹기가 일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내가 게임을 싫어했던 게 아니라, 지는 걸 싫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게임을 잘하는 친구와 편을 먹었더니 게임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 게임을 잘하는 친구가 바로 나였다.
내가 김태민을 게임의 세계로 이끈 것이었다.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그래서 게임을 다시 보게 되었고, 게임도 여러 가지가 있고, 게임에 따라 게임 미술도 다양하고 흥미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게임의 포스터를 그려보았습니다."
김태민이 그린 것은 검은 색 용이었다.
번쩍거리는 검푸른 비늘이 가득 달린 거대한 검은 용이 검은 입김을 뿜으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검은 용 주위에는 용이 짓밟아 죽인 은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의 시체가 수없이 뒹굴고 있었다.
텍스트는 따로 없었고, 그림은 꽤 진지했다.
그래서 게임 광고 포스터라기보다는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문제는 김태민이 그린 검은 용이었다.
'태민이는 원래 적당히 생략하면서 그리는 타입인데...'
생략하면서 그린다고 대강 그리는 것은 아니었다.
대상을 간략화 하면서도 그림이 완성된 느낌을 주는 것은 숙련된 경험이 필요한 고도의 테크닉이었다.
하지만 오늘 김태민의 그림은 달랐다.
검은 용은 정교했고, 유화가 아니라 마치 컴퓨터 그래픽을 그대로 옮겨놓은 느낌이었다.
마치 '나 이런 느낌도 잘 그려.' 라고 자랑하는 것처럼.
'저 녀석 정말 맘대로 놀면서 그리는구나.'
난 이번에 꼭 김태민을 이겨보고 싶었다.
그리고 전시의 기회도 꼭 따내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괜찮은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고, 또 의미 있는 포스터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김태민은.
'히히, 이번엔 색다르게 용을 그려봐야지.'
그렇게 결심하고 맘껏 즐긴 것 같았다.
문제는.
'그렇게 즐긴 그림이 저 정도라는 거야.'
나는 이준성 교수의 평가는 신경 쓰지 않고, 그냥 김태민의 그림에 몰두했다.
내가 과몰입한 건지, 나는 정말 거대한 용 앞에 서 있는 병사가 된 기분이었다.
나를 비웃고 나를 죽이려는 용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내가 저런 용을 그릴 수 있을까?'
반짝이는 비늘들.
비늘에 튕겨지는 빛.
용 주위의 검은 배색들.
그 발자국 주위에 비참하게 뒹구는 시체들.
'그린다 하더라도 2주로는 턱없이 부족해. 그리고 김태민의 그림에 비해 한없이 조악할 거야.'
더 대단한 것은 김태민의 상상력이었다.
나는 그림 하나를 그리려면 먼저 인터넷으로 검색부터 했다.
사진을 찾고, 그 사진을 스케치하고, 요소들을 배치해 캔버스 위의 구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김태민이 그랬을까?'
나는 몇 달 째 김태민과 붙어 지내느라 김태민을 잘 알고 있었다.
김태민의 특성상, 그냥 쓱쓱 스케치해서 곧바로 그렸을 게 분명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완패야. 그냥 완패. 이번에도 이길 수 없구나.'
이번엔 유나의 그림도 워낙 대단했다.
그리고 김태민은 김태민이고.
남동민 역시 이번엔 칼을 갈았을 것이다.
'어쩌면 전시에는 뽑히지 못할 수도 있겠군.'
김태민이나 유나의 그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분하기도 했었다.
'나는 노력 상점도 있는데...'
혼자 치트키까지 쓰고도 김태민을 따라 잡을 수 없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한참 만에 이준성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 중에 게임 회사에 아트 디렉터로 일하는 놈이 있지. 내가 그 놈을 무지하게 놀렸었다. 예술을 전공한 놈이 이상한 그림이나 그린다고. 그런데 이 그림을 보고나니 그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는 그 친구를 놀린 게 미안할 정도다."
이준성 교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김태민의 그림을 단 한 마디로 요약했다.
"넌 진짜 그림을 잘 그리는 놈이구나."
그리고 이준성 교수는 김태민의 그림을 훑어보며 다시 김태민을 추궁했다.
"텍스트를 넣지 않은 이유는 있나?"
유나의 그림도 텍스트는 따로 없었다.
하지만 유나의 그림은 광고 포스터의 느낌이 제대로 났었다.
김태민의 그림에서 굳이 흠을 찾는다면 별로 포스터 같지 않다는 정도.
그건 김태민의 특성이기도 했다.
1학기 때도 김태민은 언제나 과제랑 상관없이 항상 자기 그림을 그렸다.
"그게...텍스트를 넣으려고는 해봤는데..."
"해봤는데?"
"다른 차원의 용이 지구 말을 쓰는 것 같아서...이상해서 뺐습니다."
김태민의 대답에 이준성 교수가 피식 웃었다.
사납고 막말을 퍼붓는 이준성 교수지만, 잘 그린 그림 앞에서는 한없이 온화해졌다.
"이 그림은 텍스트가 있었어도 괜찮을 뻔 했다. 그럼 조금 더 그림이 싸 보였을 테고, 상업 포스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뜬금없이 튀어나온 잘 그린 삽화 같은 느낌이다. 때론 그림 자체보다 그림의 문맥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이준성 교수는 얼굴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했다.
"이 그림도 그림 값은 유보다. 이런 그림은 값을 어떻게 매겨야 하는 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잘 그렸다."
학생들이 잇따라 손을 들고 김태민의 그림을 칭찬했다.
잠시 동안 이준성 교수의 수업이 맞나 싶을 만큼 훈훈한 분위기였다.
"자, 다음."
이번 차례는 남동민이었다.
'남동민도 참 대단하군.'
보통은 너무 잘 그린 그림 뒤에는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남동민은 당당하게 나가서 자신의 그림을 앞에 걸었다.
"전 영화의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정말 영화의 포스터.
딱 이준성 교수가 내 준 과제 그대로였다.
어떻게든 1등을 먹어보겠다는 남동민의 강한 의지가 전해졌다.
"제가 포스터를 그린 영화는 영국의 코미디 영화 '풀 몬티'입니다. 불황으로 직업을 잃은 중년 남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스트립쇼를 공연한다는 내용입니다. 상도 많이 타고,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라서 아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나 역시 오래 전에 케이블 티비에서 잠깐 본 기억이 있었다.
실직으로 삶의 의미를 잃은 남자들이 스트립쇼를 준비하며 희망을 찾는다는 이야기.
뮤지컬로도 공연될 만큼 세계적으로 성공한 영화였다.
너무 흔한 영화는 그림으로 그리기엔 아쉽고, 너무 알려지지 않은 영화는 그림으로 그리기엔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풀 몬티라는 영화는 미대 과제용으로 참 적당해 보였다.
영화 선정부터 남동민이 꽤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다.
"초라한 몸매를 가진 평범한 아저씨들이 동네 주민들 앞에서 스트립쇼를 공연하는 상황이 많이 공감이 갔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한 그림이라도, 화가를 선택한 이상 언제나 사람들 앞에 나가 그림을 걸어야 합니다. 어쩌면 화가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는 시점에서 타인들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 풀 몬티의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남동민이 자신의 포스터를 설명했다.
'이번엔 그림 뒤의 스토리도 좋군.'
남동민의 기교는 언제나 뛰어났다.
하지만 남동민은 늘 그림 뒤의 맥락이 부족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무리하게 새로운 스토리를 찾는 것보다 적당한 영화를 가져와서, 자신의 스토리를 덧입혔다.
그래서 남동민의 빈약하던 스토리가 풍부해졌다.
'게다가 남동민은 인체를 잘 그리지.'
그의 포스터에는 반라의 모습으로 몇 명의 남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역시 세련되게 잘 그렸다.
남동민은 영리하게 자신의 장점을 살리고, 부족한 스토리는 영화에서 차용했다.
거기에 텍스트 디자인도 알맞게 골랐다.
흥겨운 장면에 걸맞는 흥겨운 모양의 글자들.
그림도 글자도 모두 음악이 느껴졌다.
꽤 멋들어진 포스터였다.
"역시."
이준성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 모두 봐라. 이놈은 원래 기술이 뛰어난 놈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좀 굴리니까 갑자기 그림이 좋아졌다. 너희들은 모두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이다. 그 말은 전부 다 기본은 되어있단 뜻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할 수 있단 말이다. 이 늙은 놈을 봐라. 나한테 한 번 욕을 먹더니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내가 이 맛에 너희를 욕하는 것이다."
역시 이준성 교수는 기승전 자기 자랑이었다.
이번에도 이준성 교수는 분명 남동민을 칭찬한 것 같긴 했는데, 과연 어디에서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지 애매한 칭찬이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이준성 교수가 학생들을 향해 물었다.
평소라면 나도 손을 들고 발표했을 것이다.
하지만 곧 내 그림이 걸린다.
그리고 나는 남동민을 꼭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들고 의견을 말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대신 유나가 손을 들었다.
"그래, 제주도 촌놈. 말해 봐라."
"일단 멋있는 포스터인 것 같습니다. 전 풀 몬티라는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그 영화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럼 포스터로서의 기능은 충분히 수행했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유나의 칭찬에 남동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나는 역시 반전이 있는 여자였다.
남동민 역시 긴장하고 유나의 입을 바라봤다.
"교수님은 항상 팔리는 그림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길에서 뜯어서 집에 가져가고 싶은 포스터를 그리라고 하셨고요."
"그랬지."
이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 포스터는 딱히 가지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벌거벗은 중년 남자들이 춤을 추는 장면을 딱히 제가 돈을 지불하고 제 방에 걸어둬야 할 이유가 있을 까요?"
"그...그건....전 풀 몬티라는 영화를 감동 깊게 봐서...분명 저처럼 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동민의 대답에 이준성 교수가 히죽 웃었다.
"제주도 촌놈. 좋은 지적이다. 그래, 늙은 놈이 이번에 그려온 포스터는 꽤 잘 그렸다. 하지만 중년 남자들이 나오는 군상극. 게다가 실패자들이 나오는 코미디 영화다. 영화의 감동이나 포스터의 완성도와는 상관없다. 그림을 보는 관객이 그림을 구매하려면, 자신을 이입시킬 어딘가를 그림에서 발견해야 한다. 추상화든, 인물화든 정물화든 상관없다. 그래서 그림을 파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늙은 놈아. 다음부터는 한 번 더 그림 구매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도록."
"알겠습니다."
남동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다. 일단 이 녀석의 그림 값도 유보다. 오늘은 애매한 놈들이 많군."
전시라는 큰 상품이 걸려서 그런지 과연 오늘은 모두 그림이 우수했다.
이준성 교수도 오늘은 함부로 '쓰레기'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몹시 근질거리는 모양.
그리고 이제 드디어 내 차례였다.
"자, 다음은 누구지?"
"제가 하겠습니다."
"그래, 네 놈이군."
벼르고 있었다는 듯, 이준성 교수가 징그럽게 웃었다.
이준성 교수는 어서 빨리 한 놈 붙잡고 시원하게 욕을 퍼붓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침 웃긴 놈이 걸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2등 안에 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자, 맘이 홀가분해졌다.
그래서 당당하게 걸어 나가서 내 그림을 걸었다.
과연 오늘의 좋은 분위기를 내가 이어갈지, 아니면 내가 깨뜨릴지 나도 궁금했다.
"저는 일단 포스터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상품을 알리거나, 정보를 전하려고 벽에 붙이기 위해 그리는 그림. 사람들을 모으고, 관심을 끌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저는 반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