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64화 (64/203)

■ 64. 여고생 □

공포 웹툰의 초안이 나왔다.

웹툰 전체는 아니고, 플래시로 어떤 장면이 연출 가능한지 테스트였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의 얼굴이 180도 뒤로 돌아가며 입에서 피를 뿜으며 모니터에 얼굴을 들이대는 장면이었다.

시간은 오후 5시.

사무실에는 디자이너 이소영과 플래시 프로그래머 한철이, 크리스털 시네마의 안수정 대표와 나, 넷이서 회의중이었다.

"괜찮은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스케치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켜봤더니 얼마나 무서운지 감이 잘 안 와요."

안수정 대표가 말하자, 이소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안심하시죠. 이제 곧 테스트할 사람들이 올 겁니다."

팀 유나와 김태민이 곧 오피스텔에 올 것이다.

네 명을 놀라게 할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쇼핑몰 시작하셨다더니, 예쁜 옷들이 참 많네요. 이 대표님이 여자 옷을 팔다니 완전 뜻밖인데요."

대체 사람들은 평소에 나의 패션 감각을 어떻게 생각한 것일까.

안수정 대표는 사무실 안의 옷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안수정 대표는 원 디자인의 가장 큰 VIP 고객이었다.

그래서 이미 유나 재킷을 비롯한 몇몇 옷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선물을 받고 무척 좋아했었다.

"맘에 드는 옷 있으면 또 골라보세요."

어차피 도매가로 가져오는 옷들이라 가성비 선물이었다.

"그럴 순 없죠. 대신."

"대신?"

"저도 동대문에 데려가주시면 안 될까요? 궁금해요. 어떤 곳인지. 옷이 반값이라면서요?"

큰일 날 소리.

팀 유나 세 명만 해도 힘들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해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태민이었다.

김태민을 보고 안수정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남자 옷 쇼핑몰도 하세요? 저 분은 모델인가요?"

"그럴 리가요. 우리 쇼핑몰 보조입니다."

하이 유나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

김태민 정도의 얼굴은 그냥 옷 포장이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하이 유나의 사장이었다.

아무튼.

잠시 후.

"으어억."

웹툰 초안을 본 김태민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저앉았다.

안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이 좋군요."

"아니요. 아직 더 봐야 합니다."

김태민은 너무 순수한 영혼이라 김태민의 반응은 믿을 수 없었다.

유나나 정화 선배의 반응을 봐야 했다.

잠시 후.

"나 왔어."

산뜻한 목소리와 함께 유나가 들어왔다.

내가 김태민에게 눈짓을 보내자, 김태민이 울상을 지으며 유나에게 말했다.

"유나야, 재미있는 거 보여줄게."

유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니 김태민에게 대신 시키는 것이 안전했다.

"응? 뭔데 그래?"

내가 그랬다면 눈치 빠른 유나가 의심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태민에겐 감쪽같이 넘어갔다.

화면엔 교복을 입은 여고생의 뒷모습이 있었다.

유나는 방심하고 스크롤을 내렸다.

드드득. 드드득.

여고생의 목이 돌아가고 여고생이 모니터를 향해 붉은 피를 뿜었다.

"으아악. 야이, 나쁜 놈들아!"

유나는 먼저 김태민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네가 시켰지! 다 알아!"

그리고 달려와서 내 옆구리에도 주먹을 찔러 넣었다.

유나는 우리에게 당한 게 억울한지 계속 씩씩 거렸다.

"나 왔다!"

그리고 수진 선배가 도착했다.

그러자 김태민이 다시 해맑은 얼굴로 다가갔다.

"누나, 보여줄게 있어요."

"엉? 뭔데?"

유나는 자기가 당할 땐 분했지만, 남이 당하는 것은 궁금한지 잠자코 있었다.

잠시 후.

"으허헝. 어엉."

수진 선배는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 미안해요."

유나가 수진 선배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프로젝트 대박이 보이는군요."

"역시 원 디자인. 믿고 맡기길 잘했네요."

잠시 후.

딸랑.

문이 열리고 정화 선배가 들어왔다.

그러자 수진 선배는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화야. 재미있는 걸 보여줄게. 이리 앉아봐."

"뭔지 몰라도 안 속아, 이것아. 눈 화장이나 고쳐, 이 바보야."

역시 정화 선배는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원 디자인 팀은 퇴근하고, 하이 유나 팀만 남아서 일하고 있었다.

Q&A에 답글도 달아야 했고, 배송 준비부터 상품 사진 보정까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10시를 넘어서, 오피스텔에 형원 선배가 찾아왔다.

양손에는 치킨, 보쌈과 맥주, 소주를 가득 들고 있었다.

우리는 뜻밖의 야식 등장에 형원 선배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형, 웬일이세요? 갑자기?"

"전에 네가 조언해준 SF 공모전 말이야. 나 대상 먹었어. 일주일 후에 시상식 참여해달란 연락 받았어."

"와아! 오빠 대단해요!"

대상이라니.

뜬금없지만, 역시 신춘문예 등단자 다웠다.

그리고 우린 갑작스런 술판을 벌였다.

형원 선배는 마치 무용담을 털어 놓듯, 내 조언과 심사평을 함께 이야기했다.

"주원이가 그때 그랬거든. 남들처럼 쓰지 말고 반대로 해보라고. 그래서 SF 공모전인데 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썼어. 그리고 끝에 몇 줄, 사실은 남자가 사이보그였다고 적어뒀어. 그랬더니 심사평에 뭐라고 적힌 줄 알아? '소설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다른 응모작과 달리 대상 수상작만 그 점을 잊지 않았다.' 그 말을 읽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 주원이가 조언해 준 전략 그대로였거든. 주원이 넌 진짜 괴물이야.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했지?"

"에이. 형이 글을 잘 쓰니까 가능한 거죠."

편하게 한 조언에 좋은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었다.

정화 선배가 형원 선배를 놀렸다.

"나는 그것보다 오빠가 사랑 이야기를 썼다는 게 더 놀라운 걸요?"

"그러니까 공상과학소설이지."

형원 선배는 닭다리를 뜯고는 비장하게 말했다.

"나 신문사 안 들어갈 거야.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는 중이야. 돈은 그냥 생활비 정도만 벌면 되니까, 그리고 소설가에 도전해 볼 생각이야."

형원 선배는 어린 나이에 벌써 몇 개의 단편 공모전에서 상을 탔다.

하지만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전업 소설가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심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나는 나이도 어리고 사회 경험도 없으니까 직장을 다니며 글을 쓰는 게 맞을지 몰라. 하지만 당분간은 글만 생각하고 싶어."

"형은 잘 하실 거예요."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는 일은 무섭고 불안한 것 같아. 그래서 너희들 얼굴 보면서 웃고 떠들고 싶었어."

"그래요. 잘 오셨어요."

그때 정화 선배가 형원 선배의 손목을 붙잡았다.

"오빠. 오빠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잠시만 따라올래요?"

"응? 나한테?"

잠시 진지했던 형원 선배의 얼굴에 환한 희망이 차올랐다.

그리고 형원 선배는 정화 선배를 따라서 오피스텔의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으어어억!"

겁에 질린 형원 선배가 안쪽 방에서 뛰쳐나왔다.

정화 선배가 들고 있는 노트북에는 목 돌아간 여고생이 피를 뿜으며 웃고 있었다.

우리의 공포 영화 홍보는 성공할 게 분명했다.

* * *

시간은 여고생의 목처럼 빠르게 돌아갔다.

드디어 결전의 날.

서진석 교수의 크리틱 날에는 두근거리는 설레임이 있었는데, 이준성 교수의 크리틱은 진짜 전쟁같은 비장함이 흘렀다.

우린 각자 그린 포스터를 가지고 강의실에 입성했다.

쿵, 쿵,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늘도 이준성 교수가 등장했다.

"자, 나는 쓰레기들을 짓밟고, 너희들은 악착같이 버틴다. 그게 우리의 역할이다. 나는 보리밟기를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나한테 짓밟히는 게 기분 나쁘겠지만, 버텨낸 놈은 더 강한 뿌리를 내릴지도 모른다. 물론 기분만 나쁘고 끝일 수도 있다. 기분 나쁘면 나한테 덤비고, 항의해라. 자기 그림을 편들고, 변호하고, 아껴라. 나를 무서워하지 말고, 너희들의 나약한 근성을 무서워해라. 어쨌든 오늘도 시작하자. 자, 처음 쓰레기는 누구냐."

오늘의 과제는 포스터 그리기.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장르였다.

그리고 오늘의 상품은 컸다.

잘 하면 교수들과 같이 전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대단한 전시는 아니더라도 미대생에게 전시는 언제나 설레는 일이었다.

"자, 첫 쓰레기는 누구지?"

벌떡.

김대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너냐? 항상 시시한 쓰레기만 가져오는 주제에, 근성 하나는 인정해주마. 그래, 그림을 걸어봐라."

김대성은 당당하게 자신의 그림을 이젤에 걸었다.

"포스터. 공감. 포스터의 기능. 저는 2주 전,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필사적으로 고민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저는 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제일 잘 아는 것. 나의 확신이 다른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의 김대성은 평소와 달랐다.

자신감이 넘쳐났다.

"제가 잘 아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지난 6월에 제대했습니다. 제가 잘 아는 것은 바로 군대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들은 군대에 다녀옵니다. 그러니 한국인의 절반은 이 포스터로 말미암아 자신의 체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이 가장 많은 깨달음을 얻는 시기는 언제일까요? 바로 군대입니다."

"그만."

이준성 교수가 김대성의 발표를 도중에 막았다.

김대성의 포스터에는 한 무리 군인들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는 경례하는 젊은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텍스트도 적혀 있었다.

[ 젊음을 완성하는 곳, 당신을 환영합니다. ]

그림 자체는 약간 입시미술의 느낌이 들었다.

잘 그리려고 무척 애쓴 느낌.

이준성 교수가 씨익 웃었다.

"너,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거냐?"

"네?"

"날 웃기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면 네 근성은 인정해주마."

"네?"

김대성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준성 교수는 강의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미필들 손 들어봐."

그러자 나와 김태민을 비롯한 몇몇이 손을 들었다.

"야, 잘생긴 놈. 넌 이 그림 보니까 어떠냐? 어서 군대에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드냐?"

절레절레.

김태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야, 늙은 놈. 넌 어떠냐?"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남동민도 단호했다.

이준성은 웃음을 머금고 김대성을 놀렸다.

"그래.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군대에 집착하는 건 인정해주마. 하지만 이걸 왜 그린 거냐? 정말 사람들이 이 포스터를 보고 군대로 달려갈 거라고 생각한 거냐?"

이준성 교수는 징그럽게 웃었다.

"그리고 이 그림과 별개로 화가가 정치나 군대에 대해 그릴 땐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예술가들은 자칫하면 세상에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그런 악몽 같은 기억이 한 둘이 아니지. 예술은 언제나 양날의 칼이다. 그러니 언제나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그림은 종종 세상을 선동하거나, 사상을 홍보하기 위해 쓰이기도 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화가는 그만큼 책임감도 지녀야했다.

"그림에 대해 말하자면 촌스럽다. 그것도 많이. 기술을 익히듯 감각도 익힐 수 있다. 전시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봐라. 어쨌든 이 쓰레기를 어서 내 눈앞에서 치워라."

그렇게 김대성은 오늘도 실패했다.

지난 학기 남동민은 계속 다투면서도 뭔가 정이 갔었는데, 김대성은 아무리 불쌍해도 영 정이 안 갔다.

아무튼.

"자, 다음 쓰레기."

유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 그림을 앞에 걸었다.

유나는 항상 의욕에 넘쳤지만, 오늘은 더 그런 것 같았다.

유나는 한 가족의 모습을 그렸다.

옛날식 텔레비전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고, 잠옷을 입은 한 가족이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여자 아이 둘, 어린 남자 아이 하나.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에게 안겨 있었다.

만화식으로 그려진 인물들에, 따뜻한 색감을 가진 그림이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나온 빛이 가족의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

가족들은 환하게 웃으며 텔레비전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텍스트는 적혀 있지 않았다.

"전 어린 시절 제 경험을 그렸습니다. 일요일 아침이면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만화 영화를 보려고 모두 일찍 일어났습니다. 우린 부모님께 안겨서 정신없이 만화를 봤습니다. 그땐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한 시간 동안 부모님은 조금 지루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렸던 저는 제가 좋아하는 만화를 형제들과 부모님과 함께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만화 영화의 포스터를 그려보았습니다."

음.

나뿐만 아니라 강의실의 전부가 신중해졌다.

분명 멋진 그림이었다.

하지만 단번에 평가하기엔 조금 어려웠다.

한참 만에 이준성 교수가 입을 열었다.

"재밌군."

이준성 교수는 턱을 만지며 한참 더 그림을 바라보았다.

"텍스트도 없고, 만화 영화를 보고 있다는 어떤 설명도 없다. 하지만 나도 이 그림을 보고 곧바로 만화 영화를 떠올렸다. 아마 인물과 색을 만화처럼 썼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어렸을 때 텔레비전 만화를 본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경험이니 자연스럽게 연상되기도 하고. 텍스트를 넣지 않은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나?"

"처음엔 적당한 텍스트가 떠오르지 않아서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엔 있어봤자 방해만 될 것 같아서 넣지 않았습니다."

유나는 당당히 대답했다.

"음. 텍스트도 없고, 그림의 의도를 곧바로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미완성의 포스터는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엔 오히려 그림의 의도가 뭔지 궁금해 하며 계속 보게 되었다. 그건 네가 워낙 잘 그렸기 때문이겠지. 넌 몇 살이냐?"

"스무 살입니다."

"그래? 너도 참 열심히 그리는 놈이구나. 저번 그림도 그러더니, 너는 빛과 색을 참 잘 쓰는군. 혹시 시골에서 자랐나?"

"네? 맞습니다. 제주도에서 자랐습니다."

그러자 이준성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연을 보고 자란 촌놈들이 색감이 좋아."

이준성은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유나의 그림을 바라봤다.

나도 이준성의 분석에 동의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처음 그림을 걸었을 때보다 유나의 그림이 훨씬 많이 좋아보였다.

이번 유나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더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이 그림의 값은 일단 유보다. 쉽게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잘 그렸다. 포스터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포스터일 필욘 없겠지."

이준성 교수의 칭찬을 실컷 받고 유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전시에 참여해 그림을 팔겠다는 목표에 한 걸음 접근한 것 같아 유나가 대견했다.

학생들이 손을 들고 크리틱을 가장한 칭찬들을 늘어놓았다.

잠깐 강의실에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런 꼴을 못 보겠다는 듯 이준성 교수가 소리쳤다.

"자! 다음 쓰레기, 나와!"

김태민, 잘생긴 쓰레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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