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해외여행 □
"자, 다시 과제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준성 교수는 칠판에다 커다랗게 '포스터'라고 적었다.
굳이 그 세 글자를 칠판에 저렇게 적을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튼.
"자, 내가 포스터는 보는 이의 공감을 얻기에 유리한 양식이라고 말했다. 왜 그럴까? 포스터는 목적이 있는 그림이다. 영화나 공연을 알리려고. 물건을 팔려고. 목적이 있으면 그림과 관객 사이가 방해 받는 게 아닐까? 그럼 오히려 제약이 생기는 게 아닐까? 누가 의견을 말해볼까?"
"제가 말해보겠습니다."
이발소 반장 김대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대성 역시 교수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무척 노력 중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라서 세상에 광고와 포스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보는 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이준성 교수가 피식 웃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자본주의 사회라...반장아, 너는 매일 한 시간씩, 아니 삼십분이라도 정해두고 책을 좀 읽어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놈들이 무식한 예술가들이다. 알겠나? 넌 군대에서 병장 달고 뭐 했냐? 부하들 괴롭히고 축구만 했냐?"
김대성이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번엔 남동민이 손을 들었다.
"그래. 늙은 놈."
"비슷한 영화나 상품을 이미 겪어봤으니까, 포스터를 보고 쉽게 자신의 기억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뭐, 그것도 일리는 있는 말이다. 포스터의 목적이 그런 거겠지. 유사한 체험을 떠올리게 하는 것.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다."
나는 나의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벌써 백여 개가 넘는 웹사이트를 디자인해서 팔았다.
웹사이트를 디자인해서 팔 때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었다.
'당연하지. 웹 사이트는 돈을 받고, 예쁜 디자인을 판매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림의 경우엔 달랐다.
이번엔 내가 손을 들었다.
"포스터는 원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그 목적 뒤에 숨을 수 있습니다. 보통의 그림이라면 화가는 자기가 드러나는 것을 고민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포스터라면 화가가 자신을 배제하고 그릴 수 있습니다."
이준성 교수가 씨익, 징그럽게 웃었다.
"그래.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그게 내가 원하던 답이다. 포스터는 노골적이다. 당당하게 자기 목적을 드러내는 그림이고, 보는 이들은 그 목적을 이미 납득하고 포스터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포스터와 관객 사이에는 구차한 중간 단계가 필요 없는 것이다. 원래 그림은 연애와 비슷하다. 고상한척 하는 내숭쟁이보다, 솔직한 속물이 여자의 마음을 먼저 얻는 것과 비슷하지."
이준성 교수는 말도 함부로 하고, 술도 강요하는 전형적인 예술 꼰대였다.
하지만 가끔 생각할 주제를 던져주기도 했다.
그래도 딱 이 정도 거리감이 적당할 것 같았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과는 너무 가까워지면 피곤했다.
"다만 너희들은 미대생일 뿐이다. 그러니까 정말 포스터를 그리라는 게 아니라, 포스터 비슷한 그림을 그려오라는 것이다. 자, 과제를 정리해주마. 영화나 공연, 상품 광고도 괜찮다. 포스터를 그려 와라. 맘에 드는 영화나 상품이 없다면 너희들이 가상의 것을 만들고 그 포스터를 그려도 괜찮다."
그리고 이준성은 인터넷을 뒤져서 몇 장의 옛날식 포스터들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아무거나 그려 와도 된다는 말이다. 어떤 식이든 보는 이들이 갖고 싶은 그림을 그려 와라.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몰래 뜯어서 집에 가져가고 싶은 그런 포스터를 그려 와라. 이상이다."
그렇게 기초 서양화2의 두 번째 과제가 주어졌다.
서진석 교수는 상품을 걸고 학생들간의 경쟁을 유도했다.
하지만 이준성 교수는 과제를 제대로 안하면 거침없이 욕을 퍼부었다.
두 교수의 방식은 달랐지만, 어쨌거나 우린 2학기에도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 했다.
* * *
수업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
유나와 학식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유나가 몹시 싱글거리고 있었다.
"포스터 그리기에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거야?"
"아니, 하나도 생각 안나."
"그런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나 있지, 멋진 계획이 떠올랐어."
"뭔데?"
유나는 반찬으로 나온 고등어조림의 뼈를 젓가락으로 발라내며 들뜬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있잖아. 나랑 동생이랑 연년생이잖아. 그래서 우리 엄마, 아빠가 2년 동안 고생했거든. 고 3을 두 번이나 겪었으니까."
대학에 가는 일이 인생에서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학생만큼이나 부모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래서 우리 엄마 아빠가 유미 수능 끝나면 잠시 여행 다녀오시기로 했거든. 만약 내가 그림을 팔아서 경비를 보태드리면 어떨까? 두 분 정말 좋아하시겠지?"
"와아."
자식을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큰딸이 이렇게까지 챙겨준다면 정말 뿌듯할 것 같았다.
유나는 정말 가족에게 헌신적이었다.
큰딸은 살림밑천, 정확히 해당되는 사례였다.
'유나 같은 딸을 가지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잠깐 고민이 될 정도였다.
유나는 나와 같이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하이 유나는 아직 제대로 된 수익이 나지 않았다.
일단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 태민이까지 월급을 줘야 했고, 또 옷을 포장하는 아주머니 한 분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하고 있었다.
원래 하이 유나 정도의 규모나 매출이라면 옷 포장부터 사소한 일까지, 사장이 직접 움직여서 인건비를 최대한 줄이는 게 맞았다.
'하지만 하이 유나는 내 취미 같은 거라서...'
나는 아예 수익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나와 선배들이 공부에 방해받지 않고 즐겁게 일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유나 역시 최저 시급에 준하는 월급을 받아가고 있었는데, 그건 내가 살짝 장부를 조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만 해도...'
자체 생산한 상품도 무리 없이 팔리고 있었고, 특별한 광고 없이 사이트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하루에 수백 개의 쇼핑몰이 생겨나고, 그 중 대부분이 몇 달을 못 넘기고 망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이 유나는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겨울이 다가 오고 있었다.
'원래 옷장사는 겨울에 최고의 이익이 발생하지.'
그러니 하이 유나는 버티기만 해도 성공인 게임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유나는 이준성 교수의 전시참여를 꼭 따내서 그림을 팔아볼 계획이었다.
"멋진 생각인데?"
"그치?"
유나는 도전할 목표가 생겼다는 사실에 벌써 흥분하고 있었다.
'어, 잠깐?'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어머니가 감자탕집을 관두실 것이다.
'어머니도 해외여행 가보신 적이 없지.'
지난 생, 이번 생 다 합쳐도 해외여행은커녕 국내여행도 제대로 가보신 적이 없을 것이다.
포항에 사시니까 경주랑 불국사는 몇 번 가보셨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는? 서울은?'
가보셨다해도 아마도 손에 꼽을 정도였을 것이다.
'이래서 정말 아들은 안 되는 구나.'
어머니는 이제 십년 넘게 하던 일을 그만두시고, 새 일을 찾으셔야 한다.
그러니 여행을 다녀오기에 마침 적당한 시기였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내가 잘 알지.'
내가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어머니는 절대 스무 살 아들이 주는 돈으로 여행을 다녀올 분이 아니었다.
직접 번 돈으로는 더더욱 아니고.
'하지만 그림을 판 돈이라면?'
내가 처음으로 그림을 판 돈으로 여행을 보내드린다면 어머니도 기분 좋게 여행을 다녀오실 것이다.
'정말 괜찮은 생각이야.'
유나 덕분에 나까지 이준성의 전시에 꼭 참여해야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유나야, 고마워."
"뭐야? 내가 뭘 했지?"
"그냥 다."
"웃긴 놈."
유나가 이준성 교수를 흉내 내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태민도 그렇고, 유나도 그렇고 좋은 친구들은 그냥 가까이만 있어도 계속 새로운 것들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 같았다.
* * *
난 원래 모든 과제를 열심히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해외여행이 걸리자, 정말 머리에 쥐가 날 만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일단 영화부터 생각해보자.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가 뭐가 있지?'
단순히 재미있게 본 영화로는 부족했다.
이준성 교수의 말대로 공감이 중요했다.
'그러니 나도 재밌게 보고, 다른 사람들도 재미있게 본 영화여야 해. 게다가 그릴 소재도 풍부한 영화여야 하고.'
마침 생각나는 영화가 한 편 있었다.
바로 라라랜드.
LA의 젊은 배우와 재즈 음악가가 꿈을 이뤄가며 사랑도 하는 아름다운 뮤지컬 영화였다.
'내용도 그렇고, 장면들도 그렇고 그릴 소재가 풍부해. 포스터를 그리면 꽤 근사하게 나올 거야. 모두가 좋아하는 영화니까, 공감을 얻기도 쉽고.'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영화였다.
'회귀자도 불편한 게 있군.'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살펴봤다.
나는 주로 옛날식 흑백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럼 안 돼.'
모두가 잘 아는 영화가 아니라면 이준성 교수의 '잘 팔리는 그림'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영화가 아닌 공연 쪽은?'
나는 최근까지 가난한 촌놈이었다.
공연이라면 영화보다 더 몰랐다.
'책이나 상품 광고는 어떨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김태민이나 남동민을 이기려면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이것저것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났다.
그리고 크리스털 시네마의 신작 디자인을 맡은 이소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넵, 대표님."
"그 공포 영화 홈페이지 말인데요. 이번에는 좀 특이하게 가보는 게 어떨까요?"
"특이하게란 어떤 말씀이시죠?"
"웹툰이요."
"네?"
미래에서는 영화를 개봉하기 전에 종종 웹툰을 먼저 만들어 유포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웹툰을 좋아하니까, 흔한 예고편보다 훨씬 반응이 좋았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다보니 엉뚱하게 웹툰이 떠올랐다.
'게다가 마침 공포 영화야.'
나는 자세히 기억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몇년 후 쯤.
플래시를 이용한 공포 웹툰이 여름마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고, 뉴스에 나오는 걸 본 적도 있었다.
'마침 플래시는 우리 전문이야.'
나는 이소영에게 공포 웹툰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니까, 영화 홈페이지에 2~3개 정도의 공포 웹툰을 올리고, 플래시로 보는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는 겁니다. 소재는 도시 괴담이나, 여러 가지. 영화와 관련이 있으면 더 좋고요. 일단 화제만 끌어도 성공일 겁니다. 웹툰 작가들은 신인이라면 보수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이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은 생각 같아요. 확실히 영화는 입소문이 중요하니까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한 번 구체적으로 시안을 짜보겠습니다. 만약 성공한다면 크리스털 시네마의 영화도 대박일 테고, 우리 원 디자인도 엄청 유명해질지 몰라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웹툰을 이용한 영화 홍보는 잘 될 거란 확신이 있었다.
'미래에서 직접 보고 왔으니까.'
왜 과제를 고민할 땐 일에 관한 생각이 술술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포스터 그리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