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56화 (56/203)

■ 56. 테라코타 □

학교에서 점심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틈틈이 작업실로 찾아가 그림을 그리고, 자료를 조사했다.

'임파스토 기법이라...'

쉽게 말하면 물감을 듬뿍 바르는 기법.

임파스토는 물감을 두껍게 바르니까 단순히 색 말고도, 붓자국부터 물감의 발라진 모양까지 여러 방면에서 고민해야 했다.

'가끔 임파스토의 붓자국을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연히 좋은 자국이 나오면 다행이다.

하지만 캔버스 위에 더 많은 우연을 허용할수록 그만큼 화가의 권한이 줄어드는 것이다.

화가들은 캔버스를 지배하길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임파스토는 주로 유화나 아크릴 물감의 기법이었다.

그리고 두 물감은 각기 장단점이 있었다.

유화 물감은 느리게 마르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다.

그리고 오일에 섞어서 사용하면 물감들이 깊이 있는 색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유화는 중후하고 감정이 다양했다.

그리고 아크릴 물감.

일단 아크릴은 유화보다 많이 저렴했다.

그리고 물감이 금방 굳었다.

그래서 아크릴로 임파스토를 하면, 플라스틱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수정이 힘들었다.

'입시 때 아크릴 물감을 몇 번 써 본 적은 있었지만.'

겨우 그 정도로 아크릴을 안다고 하기엔 부족했다.

'그럼 이번에는 아크릴로 하자.'

일단 2주라는 기간.

2주라면 유화를 제대로 말리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연습을 해 볼 생각이었다.

나는 내 재능보다 노력과 연습을 신뢰했다.

그래서 캔버스 위에 직접 과제를 그리기 전에 종이 위에 미리 여러 번 붓자국과 혼색을 연습해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화 보다 아크릴이 적당했다.

'무엇보다 이준성 교수.'

이준성 교수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교수 말대로 내 그림이 아직 정말 쓰레기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부정해보고 싶었다.

나는 호크니, 고흐, 모네 등등 인기 작가들의 그림을 인쇄해서 스케치북 위에 따라 그려 보았다.

'쉽지가 않네.'

그들에 비하면 나의 임파스토는 자연스럽지도 않았고, 싸구려 느낌이었다.

'물감을 두껍게 쓰면, 얇게 바를 때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잃을 수도 있어. 하지만 대가들은 과격하게 터치하면서도 섬세한 정서까지 놓치지 않았어.'

그냥 눈으로만 볼 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직접 따라서 그려보자 그들의 솜씨가 숨이 막힐 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아크릴 화는 빨리 그리는 만큼, 그 속도감이 그림 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서툰 아크릴화는 더 얄팍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 지금 내 그림처럼.'

하지만 아크릴화의 대가들은 그런 가벼운 느낌마저, 그림의 주제를 살리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잡생각 제거], [밝은 눈]

원래 1학기 후반부터는 그림을 그릴 땐 [잡생각 제거]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사소한 잡념들마저 그림의 일부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크릴 임파스토에서는 달랐다.

망설임 없이 빠르게 붓을 놀려야 했다.

한 장, 한 장.

계속 그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 * *

며칠 전.

유미와 유현이 제주도로 돌아가기 전날이었다.

유현이가 내게 심각한 얼굴로 질문했다.

"형, 그런데 형은 하루 몇 시간 자는 거예요?"

보통 두 시간.

길어도 세 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김태민도 나와 같이 생활했지만, 김태민은 원래 세상을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내 수면 시간에 대해 따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생 유현은 내가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원래 잠을 적게 체질이야. 누나한테는 말 하지마. 잔소리하니까."

"알죠. 그 잔소리. 그런데 형."

"응?"

"일도 좋지만 건강도 챙겼으면 좋겠어요. 우리 누나 괜찮은 사람이에요. 실패나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그냥 최선을 다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형이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 걱정 돼서요."

둘 중 하나는 확실히 내 편으로 만든 것 같아 뿌듯했다.

그리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생긴 것도 고마웠다.

"형, 엄마한테는 누나가 좋은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있다고 보고할게요. 대신."

"대신?"

"겨울 방학 촬영이랑 내년 여름 촬영에도 꼭 불러주세요."

"약속할게."

그렇게 유현이와 성공적인 동맹까지 맺었다.

그리고 야유회에서 돌아와서도 정신없이 일했다.

촬영한 양이 많았기 때문에 보정할 사진도 많았다.

또 가을 상품이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시즌이라 시장 조사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하이 유나와 C마켓에 유나 재킷을 필두로 우리의 가을 상품들을 업로드했다.

우리가 자체 생산한 양은 유나 재킷 600벌, 레이어드 티셔츠 800벌.

돈으로는 천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으으...긴장된다."

유나가 주먹을 쥐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사실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중간 유통을 없앤 만큼 마진이 컸기 때문에 생산한 옷의 삼분의 이만 판매해도 수익이 발생했다.

재킷의 생산원가는 28000원.

수량도 적은 편이고, 원단에도 신경을 썼더니 단가가 오르고 말았다.

그리고 판매가는 49000.

5만원 이상 무료 배송이 있기 때문에 5만원 이하로 끊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동대문 재킷이 도매가 37000원에서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강력한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

그리고 옷의 품질 역시 신경 쓴 만큼 훌륭하게 나왔다.

만약 그러고도 처분하지 못한 옷이 발생한다면 은성사 매장에서 대신 팔아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은성사도 도매상이니 괜찮은 옷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첫날의 주문 확인을 클릭했다.

물론 첫날부터 주문이 급격히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 재킷이 14벌이나 팔렸어!"

분명 좋은 스타트.

레이어드 티셔츠는 더 팔렸다.

가격이 싼만큼 5만원을 채우기 위해 한두 벌 고민없이 장바구니에 담는 듯 했다.

티셔츠 역시 품질에 자신이 있어 꾸준히 팔릴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유나의 팬클럽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문의가 달렸다.

[ 와, 이번 사진들 전부 너무 예뻐요! 화보 같아요! ]

[ 촬영 어디서 했어요? 너무 부러워요, 영화 같아요.]

[ 재킷 가격 진짜에요? 바로 주문했어요. 받자마자 입어보고 후기 올릴 게요. ]

[ 우리 진언니! 진언니는 사랑입니다! ]

쇼핑몰에 간략한 모델 소개도 덧붙였는데 수진 선배의 애칭은 JIN이었다.

[ 헐, 이번엔 모델이 4명! 그래도 역시 유나 언니가 제일 예뻐요!]

등등등.

사진과 신상이 반응이 뜨거웠다.

"봤지? 내가 제일 예쁘대."

유나도 참 칭찬을 좋아했다.

어쨌든 자체 생산은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이만하면, 하이 유나의 강력한 성장 동력이 되어 줄 게 확실했다.

* * *

"자, 내가 지난 주 말했던 준비물은 다 가져왔지요?"

김미숙 교수가 우리를 향해 외쳤다.

이번 수업은 기초 도예.

우리의 준비물은 분무기와 탁상 거울과 책상을 덮을만한 천 조각.

"와, 여기 세 사람은 쓰지 않는 천을 가져 오랬더니 번쩍번쩍한 새 천을 가져왔네요. 이 원단은 대체 뭐죠?"

강의실을 둘러보던 김미숙 교수가 나와 유나, 김태민의 준비물을 보고 감탄했다.

도예 수업에 쓰는 찰흙은 마르면서 부피가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천이나 비닐을 깔아두지 않으면 작업대와 접촉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수축의 속도가 달라져서 작품이 깨질 수가 있었다.

그러니 입지 않는 얇은 티셔츠 정도를 밑에 깔아주면 충분했다.

'하지만 우리 셋은...'

유나 재킷 안감으로 쓰고 남은 실크 원단을 잘라왔다.

참고로 유나 재킷은 지금 이 순간도 잘 팔리고 있었다.

"자, 우리가 이번 과제에 쓰는 흙은 옹기토입니다. 자,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흙으로 만든 후 초벌 구이한 작품을 뭐라고 부르는 지 아는 사람?"

"테라코타입니다!"

유나가 손을 들고 외쳤다.

"잘했어요. 맞습니다. 테라코타입니다. 테라코타는 말 그대로 구운 흙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도자기이기도 하죠. 참고로 흙을 구울 때, 흙 사이에 공기가 들어있거나, 틈새가 있으면 깨지게 됩니다. 자기 작품만 깨지면 상관없는데, 가마 안에서 옆에 있는 작품까지 같이 깨지는 경우도 있으니 모두 조심하기 바랍니다. 작품이 없으면 점수도 없다. 이 사실을 명심하세요."

뭔가 살벌한 수업이었다.

운이 없으면 열심히 만들고도 0점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 긴장이 흘렀다.

"자, 첫 과제는 거울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자기 얼굴 만들기입니다. 도예든, 그림이든 사람의 얼굴은 언제나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소재였습니다. 특히 자기 얼굴은 항상 가까이 있으면서도 자주 잊고 지내게 되는 재미있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 강의실에서 자기 얼굴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 겁니다. 우린 모두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요."

얼굴이란 소재를 듣자 학생들은 반사적으로 모두 강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나도 마찬가지.

어?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바로 복학생 김대성이었다.

남동민은 없었다.

다른 기초 수업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살짝 찝찝하긴 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선배의 실력은 어느 정도 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 2주 드리겠습니다. 시간을 더 줄 수도 있지만, 가마에 구우려면 일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건조 시간까지 생각해 서둘러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도예 수업입니다. 채점은 불에 구워져 나온 작품으로만 하겠습니다. 간단히 방법을 설명하겠습니다."

강의실 구석에는 우리가 단체 구매한 옹기토가 놓여 있었다.

김미숙 교수는 흙덩이를 잘라서 몇 가지 요령을 설명했다.

"일단 자소상을 완성한 후에, 반건조 시킵니다. 그리고 자소상을 뒤집어서 안쪽 흙을 파내야 합니다. 이때 가능한 일정한 두께로 얇게 파내야 합니다. 도자기를 생각하면 됩니다. 너무 두꺼운 도자기는 무겁기도 하고, 불에 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완성본은 속이 텅 빈 자기 얼굴이 되겠지요? 테라코타 작품인만큼 나중에 뒤집어서 화분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화분으로 쓸 사람은 정수리에 미리 구멍을 뚫어주면 됩니다. 자, 그럼 서둘러 주세요!"

자기 얼굴이라.

자소상은 자신 있었다.

그림이야 평면 안에 대상을 담아내는 기술.

다만 캔버스와 나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자소상의 흙덩이는 내 두 손 사이에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충분히 내가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요!"

김미숙 교수가 외쳤다.

"아마 자소상을 만들기 시작하면 조소과가 아닌 학생들은 얼마안가 전부 좌절하게 될 겁니다. 그 이유는 직접 겪어보라고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자소상을 만들다가 좌절하면 친구의 작품을 확인하세요. 예술은 원래 인생이랑 비슷하잖아요. 앞이 안 보일 땐 친구들에게 물어가세요."

그렇게 기초 도예도 시작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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