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개강 □
낮동안 시끌벅적한 촬영도 끝나고, 유나와 나는 노트북을 켜두고 촬영한 사진들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잘 나왔다."
"빠진 옷들은 없어?"
"가을 남방 두 벌 정도만 내일 아침에 촬영하면 될 것 같아. 이건 너랑 나 둘이서 바닷가 나가서 촬영하자."
"그래."
"이제 밥 먹자. 배고프겠다."
"죽을 것 같아."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이미 거하게 술판, 고기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나가자 모두들 박수까지 치며 환영했다.
"대표님! 한 말씀 하시죠!"
아, 이런 거였구나.
회식같은 자리에서 사장님 한 말씀을 외치는 임원들이 그렇게 재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막상 대표가 되어보니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많이 드시고, 푹 쉬세요!"
하지만 나는 젊은 사장답게 연설은 짧게 끝냈다.
그리고 유나의 팔을 붙잡았다.
"너도 한 마디 해."
하이 유나는 유나의 이름을 걸고 만든 쇼핑몰이니까.
유나는 사양하지 않았다.
"언니들, 그리고 친구들 모두 도와줘서 고마워요! 우리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재밌게 일해요!"
유나까지 말하자 모두 열광적으로 박수쳤다.
그리고 모두 원 없이 고기를 먹었다.
* * *
여름 밤.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았다.
"내일 촬영할 곳, 미리 살펴보자."
"그래."
처음 만난 날부터 유나는 원래 바다에 집착했다.
제주도 출신이란 것에 자부심도 강했다.
유나는 샌들을 벗고 맨발로 해변을 걸었다.
"바다는 역시 밤바다지."
바다 한유나 선생이 전문가처럼 말했다.
확실히 밤은 조용하니까 파도 소리도 듣기 좋고, 밤안개까지 일면 더 신비로웠다.
"신기하다. 방학 시작할 때에는 냇가였는데, 지금은 바다가 됐어. 그리고 쇼핑몰도 하나 생기고."
유나가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야 열심히 사는 것을 의무처럼 여기는 회귀자지만, 유나는 미안할만큼 열심히 일했다.
"수고했어. 유나야.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방학 두 달을 선물 받은 기분이야. 동생들도 잘 챙겨줘서 고마워. 맞다. 유현이."
"유현이가 왜?"
유나가 주먹을 쥐고 내 어깨를 한 대 때렸다.
"너 포항 내려간 동안 한철이랑 태민이랑 같이 PC방에 갔나봐. 그런데 돌아와서는 역시 주원이 형이 없으면 안 된다던데. 너 게임도 하는 거야? 그럴 시간은 있었냐?"
"난 그냥 무슨 일이든 다 잘하는 것 같아."
'내가 없으면 안 된다라...'
꽤 기분 좋은 말이었다.
나는 늘 이런 소속감을 가지고 싶었다.
이제 유현이가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유미가..."
"유미가?"
"원래 유미는 제주대가 목표였어. 수의사가 되고 싶어했거든."
"잘 어울리네."
"그런데 서울에서 며칠 지내더니 서울에 있는 학교로 오는 것도 재미있겠대."
그럼 모델도 한 명 늘어날지 모른다.
하이유나에게는 좋은 일일 지도.
하지만 유나의 자취방은 영영 내 인생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까탈스런 감시자가 한 명 생기는 것이었다.
"맞다. 엄마가 너한테 잘 하래. 골라준 옷들도 무척 좋아하셨어. 유나 재킷도 잘 만들었다고 많이 칭찬하셨어."
"다음에 포항가면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말씀드려."
쇼핑몰은 슬슬 일의 윤곽이 보였다.
당분간 전화 응대는 하지 않고, 댓글로만 고객을 상대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주문이 늘면 옷 포장 아르바이트를 고용할 생각이었다.
그 외에는 팀 유나와 김태민이 일을 맡으면 쇼핑몰은 무리 없이 돌아갈 것 같았다.
이제 2학기 수업을 들을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으으...그림 그리고 싶어. 내가 미친 것 같아. 입시 때 그렇게 질리도록 그렸는데 두 달 쉬었다고 손이 근질근질 해."
유나의 말을 듣자 웃음이 났다.
실은 나도 똑같았다.
"맞아. 나도 어서 학교에 가고 싶어. 학교에 가고 싶은 학생이라니. 내가 정말 이상해진 것 같아."
밤바다는 선선하고 밤새도록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우리는 내일 촬영도 해야 하니 슬슬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유미가 엄마한테 이상한 고자질을 할지도 몰라."
그렇게 우린 밤바다를 남겨두고 펜션으로 돌아갔다.
펜션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멈춰서 우리가 걸어온 밤길을 돌아보았다.
모두 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 * *
드디어 개강했다.
먼저 우리의 필수 과목인 기초 서양화2.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유나, 김태민은 당연하고 남동민까지 있었다.
'이번 학기도 심심하지 않겠군.'
"형, 안녕하세요."
난 반갑게 인사했다.
그런데 수업을 시작하기 전, 못 보던 얼굴이 강의실 앞으로 나갔다.
"난 김대성이다. 늦게 입학해서 입학하자마자 군대 다녀왔고, 나이는 스물다섯이다. 너희들보다 두 학번이나 위고 내가 제일 연장자인 걸로 알고 있다."
'뭐야? 저 녀석.'
나의 설레는 개학을 엉뚱한 녀석의 연설로 시작하자 살짝 기분이 안 좋았다.
하지만 김대성은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앞에 나온 이유는 미리 한 마디 해두려고 하는 거다. 이번 학번이 굉장히 단합도 안 되고 멋 대로라고 들었다. 원래 서양화과가 그런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번 학번은 더 심하다던데, 사실이냐? 너희들 아직 엠티도 안 갔다며?"
김대성은 우리가 심각한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아마 너희들이 어리고 군대도 안가서 그런 것 같은데, 대학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잖아. 사회생활도 배우는 곳이다. 학교 행사도 가능한 빠지지 말고, 선배들한테 인사도 잘하자. 그리고 이준성 교수님은 수업 시간 외의 친목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니까, 교수님 기분 상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나도 미술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지만 이 수업 듣는 날은 미리 빼둘 생각이니까 괜히 알바 핑계 대지 말고. 알아서 잘 하자."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의욕 넘치는 선배에게 일일이 반응하기도 귀찮았다.
물론 당연히 이준성 교수의 술자리에 참석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김대성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야, 너희들 중에 혹시 김태민이라고 있냐?"
학생들 몇이 김태민을 가리켰다.
그러자 김대성이 김태민을 보고 씨익 웃었다.
"네가 그렇게 유명하다며? 수업도 맘대로 빠지고, 선배들 보고도 모른척하고. 미대생이 그림이 전부가 아니잖아? 앞으로 이 수업시간엔 그러지 말자."
이런.
김태민에 대한 소문은 대부분 오해였다.
1학기 초에 수업을 많이 빠지긴 했지만, 그 이후에는 정말 열심히 다녔다.
물론 마음에 안 드는 수업은 끝까지 안 나간 모양이었지만, 그건 불성실한 게 아니라 그냥 김태민 스타일이었다.
그때 김태민이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저, 그런데 저는 중요한 알바가 있어서 수업 끝나고 모임에는..."
"야, 너 내가 한말은 귓등으로 들었냐? 나도 알바 있지만 참석한다고. 넌 학생이 학교가 중요해, 알바가 중요해?"
어떻게든 김태민을 돕고 싶어 머리를 굴렸다.
무엇보다 나도 같이 빠질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바로 김태민의 고용주였다.
그런데 그때 나보다 먼저 남동민이 손을 들었다.
"또 뭐?"
김대성이 짜증난다는 얼굴로 남동민에게 말했다.
"야, 넌 김태민 이름만 듣고 남동민은 못 들어봤냐?"
"?"
남동민이 반말로 강하게 치고 들어가자 김대성이 당황했다.
"난 스물여섯이고 J대에서 2학년까지 다니고 왔다. 나도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고, 게다가 난 전임이다. 넌 무슨 강사로 일하는데?"
"그...그게..."
"언제 제대했는데?"
"6월말에...."
김대성은 말끝을 흐렸다.
"사회 나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네. 그럼 보조 강사냐? 보조 강사로 몇 달 일했으면서 사회생활을 운운해? 그리고 태민이 누구보다 학교 열심히 다닌다. 지난 학기동안 우리 모두 다 봤지.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라, 저래라야?"
"그게...소문이...제가 걱정이 돼서..."
"태민이가 너한테 자기 걱정해 달래?"
김대성은 대답도 못하고 얼굴이 벌개졌다.
"사회생활도 좋고, 학교 선후배도 좋다 이거야. 교수님이랑 친목도 중요하고. 그런데 여기 있는 학생들 다 성인이고, 전부 예술가 지망생이다. 그러니까 나이나 학번을 떠나서 모두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말 알아듣겠지?"
"예...예."
김대성은 대강 대답을 얼버무리고는 도망치듯 자리에 들어가 버렸다.
아, 남동민이 이렇게 멋있었다니.
남동민의 재발견이었다.
자기도 일을 빠지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1학년을 지키고 싶어서 그랬는지 아무튼 남동민을 향해 감동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수업시간에 자주 부딪히긴 했지만, 남동민이 나이 가지고 어른 행세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남동민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내 옆에 앉아있던 유나도 남동민을 향해 입모양으로 말했다.
'오빠, 최고예요.'
그러자 남동민이 어깨를 펴고 굉장히 뿌듯해했다.
그리고 드르륵.
문이 열리고 드디어 이준성 교수가 들어왔다.
짧은 스포츠머리.
햇볕에 그을린 얼굴.
화가라기 보다는 건강한 군인이나 육체노동자 같은 느낌이었다.
타앙.
이준성은 교탁을 두드리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준성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이름 가지고 검색해보면 안다. 일학년 수업은 유치해서 원래 싫어하지만, 학교에서 갑자기 부탁해 수락하게 되었다. 내가 크리틱을 심하게 몰아붙여서 울고불고 하는 선배들도 많았다. 그러니까 자신 없는 놈들은 빨리 다른 수업으로 옮겨라."
학생들에게 반말하는 교수들도 많았지만, 서진석 교수의 수업을 듣다가 이런 말투를 들으니까 충격이 두 배였다.
"난 그림을 팔아서 먹고 산다. 대한민국에서 그건 대단한 일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수업시간에도 팔리는 그림을 그리라고 말한다. 팔리지 않는 그림은 물감 발라진 쓰레기일 뿐이다. 난 학생들 상대로 사탕발림을 하지 않는다. 쓰레기는 쓰레기라고 말할 거다. 그리고 너희들 대부분이 쓰레기를 그릴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딱히 이준성 교수의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는데 강렬한 짜증이 밀려왔다.
김대성에 이어 이준성까지.
기초 서양화2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서진석 교수가 그리웠다.
'하지만 뭐.'
그림은 잘 파는 작가라고 했으니까, 그림만 배울 수 있다면 이 정도 짜증은 감수할 수 있었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 후, 이준성은 첫 번째 과제를 칠판에 적었다.
[임파스토]
"너희들의 가장 큰 문제는 모두 똑같이 그린다는 것이다. 입시 미술을 달달 외워서 시험을 쳤지. 그래서 유화도 꼭 수채화, 그것도 입시 수채화처럼 그린다. 역겨울 정도다. 그래서 너희들의 첫 과제는 임파스토다."
임파스토는 유화나 아크릴의 기교 중 하나였다.
물감을 진득하게 두텁게 발라서 그리는 방식으로 강렬한 인상이나, 때로는 입체감까지 줄 수 있었다.
가장 유화스러운 기법이라 할 수 있었다.
고흐의 그림이 가장 대표적인 임파스토 기법의 사례였다.
"2주 주겠다. 임파스토는 원래 빠르게 그려진다. 기법은 각자 알아서 조사하고. 아크릴이나 유화나 상관없다. 욕먹기 싫으면 제대로 그려오도록. 이상이다. 아, 그리고."
이준성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원래 그림이든 인생이든, 진짜 대화는 술자리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특별히 내가 사겠다. 하지만 매번 내가 살 수는 없다는 걸 미리 알아두도록. 가능한 많이 참석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도록 하자. 혹시 모르지. 내가 기분이 좋으면 그림에 관해 여러 조언을 더 줄지도."
그렇게 말하고 이준성은 먼저 나가 버렸다.
그리고 반대표로 자원한 김대성이 술집을 예약하고 참석자를 조사했다.
나와 유나, 김태민 그리고 남동민까지 우리 넷은 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일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굳이 이준성 교수와 술 마시고 싶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