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54화 (54/203)

■ 54. 방학 마무리 □

방학이 끝나기 전 할 일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바로 포항에 다녀오기.

하루 2시간씩 자며 일하느라 포항에 다녀올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큼지막한 일들도 해결했고, 학기가 시작되면 더 바빠질 지도 모른다.

그러니 늦기 전에 포항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이틀 정도 다녀올게. 펜션 촬영 준비 잘 부탁해."

"느긋하게 다녀와. 여기 일은 맡겨두고."

내 가장 듬직한 아군.

그리고 유나는 내게 우리의 유나 재킷을 내밀었다.

동대문의 옷이 세계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동대문의 옷 제작 시스템은 세계 최고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옷에 관한 센스와 약간의 지식.

그리고 한국어 구사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옷을 만들 수 있었다.

덕분에 팀 유나 역시 꽤 괜찮은 재킷을 만들어냈다.

셋 다 자신 있었고, 유미까지도 인정했다.

옷을 잘 모르는 내 눈에도 괜찮아 보였고, 가격과 품질은 확실히 뛰어났으니 승산이 있을 것이다.

유나는 그런 우리의 재킷을 내게 내밀었다.

"이 옷도 가져가."

"예쁜 옷인 건 알겠는데, 우리 엄마가 입기에는 옷이 너무 어리지 않아?"

"바보야. 입으시라고 가져가라는 게 아니잖아. 아들이 처음으로 만든 옷인데 어머니 보여드리고 자랑하라고. 엄청 좋아하실 걸?"

아...

그런 용도가 있는지는 생각도 못했다.

확실히 아들의 효도는 한계가 있었다.

"다녀올게."

"형, 다녀오세요."

유현이가 오피스텔 입구까지 따라 나와서 꾸벅 인사했다.

대체 무슨 마법을 썼냐는 의혹의 눈초리로 유나가 나를 바라봤다.

* * *

그리고 오랜만에 내려온 포항.

먼저 부동산에 갔다.

어머니와 나는 낡은 주택의 2층에 월세로 살고 있었다.

처음엔 방값이 싸서 살았고, 나중에는 이사를 가기 힘들어 그냥 살았다.

보증금도 싸고, 월세도 저렴해 별 부담은 없었지만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당분간 어머니 혼자 살아야 하니까 너무 넓은 집도 필요 없지.'

나는 근처의 집을 알아보고 시세를 조사했다.

아직 내 잔고가 충분한 것은 아니고, 또 사업은 한 치 앞날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전세에 몇 천을 묶어두는 것은 사실 부담이었다.

하지만 월세라면 충분히 내가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미리 쓸모없는 짐들을 조금 버렸다.

그리고 어머니의 퇴근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마중 나갔다.

"엄마."

"왔으면 집에 가서 쉬고 있지. 뭐 하러 여긴 또 나왔어."

"엄마 빨리 보고 싶어서."

"싱겁기는."

미대도 다니고, 쇼핑몰도 하다 보니 이제 슬슬 오글거리는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유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가는 주먹으로 어깨를 맞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의외로 잘 먹혔다.

포항은 지방이지만, 밤까지 환한 도시였다.

집에 가는 길에 떡볶이와 순대를 샀고, 막걸리도 한 병 샀다.

그리고 집에 와서 작은 술판을 벌였다.

"엄마, 먼저 보여드릴 게 있어요."

나는 내 통장을 어머니께 내밀었다.

전생의 나라면, 아무리 가족이라도 통장은 함부로 공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머니를 믿는다.

나를 돌보기 위해 십 몇 년을 식당에서 일하신 분인데, 굳이 불필요한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설득하려면 통장을 보여드려야 했다.

내 통장엔 오천만원 가까운 돈이 예치되어 있었다.

원래는 잠시 육천만원을 넘겼지만 최근 유나 재킷을 자체 생산한다고 거금이 빠져나갔다.

내 통장을 본 어머니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이게 대체 웬 돈이야?"

"웹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일을 잘 한다고 소문나서, 큰 건을 몇 개 받았어요. 그리고 친구랑 쇼핑몰도 만들었는데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에요."

잠시 후, 생각을 추스린 어머니는 일단 내 걱정부터 하셨다.

"네가 사업이라니. 생각도 못했네. 장사가 잘 된다고 함부로 돈 쓰지 말고.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랑도 의 상하지 않도록 언제나 조심하고."

어머니야 원래 아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

"엄마, 사업도 사업이지만 이제 돈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난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이에요. 입시 강사만 해도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요. 난 엄마가 이제 식당 일을 그만뒀으면 좋겠어요."

사실 어머니는 지금쯤 꽤 큰 저축을 가지고 있었다.

전생에서 등록금부터, 취업 초기까지 필요할 때마다 틈틈이 어머니에게 손을 벌렸으니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거의 쉬지 않고 일하셨으니 내가 돈을 까먹지 않는 이상 저축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어머니는 그 돈을 당신을 위해 쓰진 않으셨다.

"식당일을 그만두면 어떡하라고. 그만큼 돈을 주는 곳이..."

"일을 안 해도 괜찮아요. 일을 하더라도 엄마가 원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오래오래 건강해서 내가 자리 잡고, 결혼하는 이후까지 계속 지켜봐줬으면 해요."

그리고 어머니와 여러 이야기를 했다.

이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제법 긴 설득 끝에 어머니는 이사에 동의하셨다.

식당을 그만두는 것도 결국 설득해냈다.

"그래 식당도 관둘게. 대신 오랫동안 우리 챙겨준 분들이니까 당장은 아니고, 다른 사람 구해질 때까지만 일할게."

그리고 어머니는 막걸리도 한 잔 들이키셨다.

"그럼 이제 뭘 하지?"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그런 고민하는 것도 재미있잖아요."

어머니는 어색하게 웃으셨다.

"내 인생에 이런 고민을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어머니의 기쁨을 더 완벽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엄마. 잠깐 일어나서 저기 옷장 한 번 열어봐요."

"응? 또 뭐야. 이제 좀 불안하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에 다가가셨다.

그리고 옷장을 열고는 소리 내 웃으셨다.

옷장 안에는 유나가 챙겨준 가을옷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21살 선배들이나, 여고생 유미나, 나이든 어머니나 여자들은 다 똑같은 것 같았다.

예쁜 옷만 보면 행복한 표정을 짓고,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몸에 대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옷만 골랐니. 여름에 사준 옷도 아직 반도 못 입었는데. 식당에서 일하니까 입을 일이 있어야지."

"이제 이 옷들을 입을 수 있는 일을 고르세요."

그리고 우리가 만든 유나 재킷도 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어때요?"

어머니는 꼼꼼하게 옷의 모양과 박음질, 단추까지 살펴보셨다.

"여자애구나."

"네?"

"네 뒤에 여자애가 있었구나. 그러면 그렇지. 내가 널 20년을 길렀는데, 네가 내 옷을 고르는 게 말이 안 되지."

어머니는 유나 재킷을 직접 입어보기까지 하셨다.

"어쩜 이렇게 옷도 야무지고 예쁘게 잘 만들었을까. 고맙기도 하지. 하긴 이주원이 옷장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걔한테 항상 잘 하고, 사이좋게 지내. 알겠지?"

이런.

어머니까지 이렇게 말씀할 정도면 대체 나의 패션 센스는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다음 날.

일부러 어머니 쉬는 날에 맞춰서 내려온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가 이사할 집을 계약했다.

내려온 김에 이삿짐센터와도 계약하고, 살던 집도 같이 짐을 정리했다.

"엄마. 그럼 이삿날 다시 내려올게요."

"바쁘면 안 와도 괜찮아. 짐도 얼마 없는데."

"아니에요. 식당도 빨리 그만둬요. 알겠죠?"

그렇게 어머니에게 약속도 받아내고, 맘 편하게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하나씩, 하나씩 내 숙제들을 해결하고 있었다.

* * *

형원 선배가 고른 곳은 서해가 보이는 풀 빌라 펜션.

실내 장식도 고급스럽고, 주변도 예뻐서 촬영하기에 적당했다.

인원이 많아서 방을 세 개나 빌려야 했는데, 대신 촬영을 고려해 입실 시간을 당겼다.

야외 촬영은 햇빛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린 아침 일찍 출발했다.

원 디자인 직원이 나 빼고 다섯 명.

거기에 승희씨는 어린 아들까지 데려왔다.

승희씨가 아들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바닷가 야유회라니! 진짜 꿈꾸는 것 같아요!"

전부 안동진 대표 덕분이었다.

내 돈이었다면 이렇게 순수하게 즐기진 못했을 것이다.

하이 유나쪽에서는 팀 유나 세 명과 유나 동생 두 명, 태민, 한철, 형원 선배까지.

덕분에 내 카니발 외에도 차를 한 대 더 렌트해야 했다.

차에는 짐도 많았다.

촬영용 신상만 사입 가방 세 개.

거기에 코디용 옷은 더 많고.

메이크업 세트와 촬영 장비까지 더하면 그것도 짐이 많았다.

거기에 고기와 야채들, 술까지 넉넉하게 챙겼다.

포항에 미리 다녀온 덕분에 나도 오늘은 맘 편히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촬영부터 끝내면.'

그것도 노력이니까, 하루 6시간 노력 상점의 제약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일하러 가는 게 이렇게 즐겁다니.'

전생의 나는 회사로 출근하는 매일 아침이 죽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은 너무 달랐다.

유나는 운전하는 내 옆에 앉았다.

"촬영 힘들텐데, 눈이라도 좀 붙여 둬."

"지금 잠이 올 것 같아?"

그리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우린 노래를 따라 부르며 신나게 달렸다.

8월말인데도 펜션엔 우리 말고 손님이 있었다.

하지만 거리 촬영에도 익숙해서 팀 유나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촬영을 준비했다.

시간이 돈이라는 말, 우리에게 정확히 해당되었다.

특히 모델들은 촬영 중에는 배불리 먹지도 못하기 때문에, 서둘러 촬영을 끝내고 즐겁게 놀아야 했다.

촬영은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이미 손발이 잘 맞는 팀 유나는 각자 알아서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입었고, 친구가 포즈를 취하면 서로를 촬영했다.

나와 김태민, 그리고 디자이너인 이소영까지 달려들어 여러 각도에서 모델들을 촬영했다.

"모델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소영씨도 해봐요. 잘하실 것 같은데. 카메라 내려놓고 옷 갈아입어요."

"싫어요. 저 세 사람 옆에 섰다가는 조금 남은 자신감마저 다 사라질걸요?"

팀 유나는 이미 꽤 능숙한 모델이었는데, 여고생 유미가 지지 않으려고 온갖 포즈를 열심히 취하는 게 귀여웠다.

"태민아, 유미 촬영은 네가 담당해."

"엉?"

유미가 더 즐겁게 촬영하도록 작은 배려였다.

나는 풀장 옆 호스로 물을 뿌리며 뮤직 비디오 같은 장면도 연출해봤다.

"끼약!"

유나 등등은 물방울에 소리를 지르면서도 끝까지 포즈를 취했다.

이제 꽤 진짜 모델 같은 근성이 느껴졌다.

"자, 모델님들. 여기 주목! 칵테일 한잔씩 손에 쥐고 포즈 취하세요!"

역시 형원 선배.

쇼핑몰 촬영에는 폭탄주보다는 알록달록한 칵테일이 잘 어울렸다.

부지런한 형원 선배는 스크루 드라이버부터 마가리타까지 색이 예쁜 칵테일을 미리 조사해서 만드는 방법을 알아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모델들에게 한 잔씩 건넸다.

알코올이 조금씩 들어간 팀 유나가 더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한 것은 생각지 못한 효과였다.

한철이가 커다란 스피커를 연결하고 음악을 틀자, 팀 유나는 더 흥겹게 촬영했다.

'춤은 넷 다 못 추는 군.'

하지만 사진으로 찍으면 아무도 모르니까.

"무슨 촬영하나 봐."

"연예인들인가? 엄청 예쁘네."

다른 손님들의 부러움과 호기심 섞인 시선은 덤.

나는 괜히 뿌듯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승희씨는 아이와 풀장에서 놀고, 나머지 사람들은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촬영 담당 외에는 바쁠게 없어서 모두 한가롭게 움직였다.

한철이는 불을 피우고 바비큐를 준비했고, 유현이는 풀장 옆 비치베드에 앉아 모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재밌어?"

한철이가 먼저 구워진 소시지와 콜라를 유현에게 건넸다.

"최고의 여름방학이에요."

"나도 그래."

"이런 게 인생이죠."

"그러게 말이야."

깨달음을 얻은 유현과 한철이는 같이 콜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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