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53화 (53/203)

■ 53. 수강신청 □

2학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팀 유나, 태민과 함께 수강신청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친구들과 같이 수업 듣기.'

쇼핑몰 창업의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

우린 여러 일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수업 일정을 잘 맞춰야 했다.

먼저 필수 과목.

기초 서양화2는 이번에 수업이 두 개나 있었다.

복학생이 많은 학기는 학생들이 쾌적하게 수업하도록 수업이 추가로 개설되기도 했다.

"음...이준성 교수는 어떤 사람이에요?"

"아...이준성."

다행히 정화 선배가 아는 교수였다.

"좀 진상이야. 그런데 그림은 잘 팔려."

미대 교수들은 멋있을 것 같지만, 진상도 많았다.

문제는 그런 진상들이 대부분 자기가 멋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원래 이렇게 사는 거야.'

그런 이상한 특권 의식.

그러고 보면 1학기 때의 서진석 교수나 김진기 교수는 상당히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어떻게 하길래 진상이에요?"

"일단 수업시간에 막말을 해. 특히 남학생들한테. 그리고 수업 끝나면 매일 술 마시러 가자고 하는데, 그런 걸 좋아하는 학생들도 있긴 해."

약간 상상이 갔다.

다른 과도 비슷하겠지만, 미대는 교수들과 친하게 지내려는 학생도 많았다.

교수와 친하게 지내면 배울 것도 많았고, 또 인맥이 중요한 업계라서 가끔 작은 끈이라도 붙잡히곤 했다.

"술자리는 안 가면 그만 아니에요?"

"안 가도 되는데, 친한 학생이랑 안 친한 학생을 수업 시간에 차별해. 그리고 술자리에서는 여학생들한테 자꾸 술을 먹여. 이상한 의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자꾸 술을 권해."

나랑 도저히 안 맞는 부류였다.

"그래도 그림은 꾸준히 잘 파는 화가야. 전시도 자주 하고. 그리고 도움 되는 지적도 잘 해줘. 그래서 좋아하는 학생도 많아."

"그건 아니다. 그냥 지적을 많이 하니까, 도움 되는 지적도 걸리는 거야."

옆에 있던 수진 선배가 끼어들었다.

"여기 있네. 이준성 교수의 최대 피해자."

정화 선배가 수진 선배를 가리켰다.

'이준성 교수의 피해자이기도 하겠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수진 선배는 그냥 대부분의 교수들의 타겟이 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유나야. 이준성 교수는 패스하자."

"안돼. 언니들이랑 수업시간을 맞추려면 이준성 밖에 없어. 그리고 막말은 남학생한테만 한다잖아."

"여학생한테는 술 먹인다잖아."

"난 이제 술 잘 마시니까, 문제없어."

소주 한잔 겨우 마시는 주제에.

유나는 교수보다는 일이 더 우선인 것 같았다.

결국 유나를 따라 이준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뭐, 그림은 잘 판다니까.'

경험삼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교양 필수 과목도 있었다.

[ 기초 도예, 기초 공예, 기초 디자인 ]

서양화과는 다른 전공의 과목들을 맛보기 과정을 필수로 하나씩 준비하고 있었다.

서양화과긴 하지만, 순수하게 그림만 그리는 작가는 드물기 때문에 다양하게 배우는 게 유리했다.

학교도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을 장려했고, 다른 과수업을 듣기 좋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정화 누나, 기초 도예는 어때요?"

"재밌대. 공예나 디자인은 너무 그쪽 수업 같은데, 기초도예는 서양화랑 엮이는 부분이 많대."

기초 도예는 흙으로 도자기를 빚는 수업이었다.

한 학기짜리니까 정말 기초만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공예나 디자인보다는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다.

유나도 동의했고, 우린 기초 도예를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 넷은 시간표를 공유했다.

"그런데 수진 선배는 왜 1학년 수업을 이렇게 많이 들어요?"

"왜겠어?"

정화 선배가 옆에서 대신 대답했다.

"반성하고 있거든?"

모범생이었던 수진 선배는 대학 합격 후 1년을 맘껏 즐긴 것 같았다.

그리고 김태민은 너무 당연하게 나와 유나와 똑같은 수업을 신청했다.

우리는 열심히 고민해서 시간표를 짰는데 옆에 앉아 있다가 날로 먹다니.

김태민은 요즘 하이 유나 직원이나 거의 마찬가지였다.

'이것 참...이젠 미안해서라도 정식 알바로 채용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좀 억울하긴 했다.

열정 페이는 들어봤지만, 이건 열정 채용 같았다.

그런데 김태민은 일도 잘했다.

옷 포장은 원래 잘했고, 손님 전화도 잘 받았다.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이면 손님들은 언제나 만족했다.

거기다 사진도 잘 찍었다.

가끔 수진 선배나 정화 선배를 찍은 사진을 보면 김태민은 둘의 예쁜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가까이서 지내니까 김태민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어쩌면 김태민 최고의 재능은...'

바로 김태민의 성격 같았다.

일단 사람이 순수했다.

'어쩌면 모든 걸 다 가져서 순수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아마 김태민은 자신의 성격 덕분에 지금보다 더 훌륭한 화가로 성장할 것 같았다.

그런 김태민에게 옷포장을 시켜야 하는 게 나의 딜레마였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일이니까.

'심지어 잘하니까...'

그렇게 수강신청도 마무리했다.

* * *

그리고 안과밖의 사무실.

오늘은 홈페이지의 시연이 있는 날이었다.

아직 일부 건물은 추가 촬영이 진행 중이지만, 홈페이지 제작은 마무리 되었다.

기획팀과 안영우 실장도 승인했고 내가 할 일은 사실 끝난 셈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옛날식으로 안동진 대표는 직원들 앞에서 내가 홈페이지를 시연해주길 바랐다.

'뭐 그 정도쯤이야.'

받은 것도 많고, 나 역시 이번 홈페이지에 자부심이 컸다.

그래서 김승희씨와 이소영을 데리고 안과밖 건축사무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안과밖의 임직원 앞에서 발표했다.

"건물을 완성하는 것은 누구일까요? 설계사? 시공업자? 저는 바로 그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부분의 건축사무소의 홈페이지들은 전부 건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건물에 집중하기 위해 사람들은 소거해버렸죠. 하지만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별도의 브리핑 자료는 준비하지 않았다.

대신 홈페이지를 그대로 화면에 띄웠다.

그만큼 자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안과밖의 건물에 살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표정까지 그대로 홈페이지에 담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저의 제안대로 김동윤 작가님이 사진을 촬영해주셨고, 대부분 기꺼이 촬영에 응해주셨습니다.

안과밖의 역사가 긴 만큼, 다양한 건물과 사람들을 홈페이지에 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줄이고 프레임을 걷어내 이미지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제이쿼리를 이용해, 산만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직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발표는 길지 않았다.

"안과밖의 자부심과 사람들의 온기를 담아내, 차별화된 홈페이지를 완성했다고 자부합니다."

직원들의 박수가 터졌고, 안동진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 주었네. 아마 이 홈페이지에 제일 많이 접속하는 사람은 바로 나일 것 같아. 은퇴하고 집에서 심심할 때마다 매일 들여다 볼 것 같군. 무엇보다 똑똑한 후배를 알게 돼서 정말 기쁘다네."

은퇴를 앞둔 대표와 이사에게 인정받아 다행이었다.

안영우 실장도 무척 만족했다.

이 홈페이지로 원 디자인 역시 작은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칼 같은 잔금 입금은 덤.

2학기를 앞두고 벌려둔 일들이 하나씩 마무리 되고 있었다.

* * *

'유미는 왜 태민이를 나라고 했을까?'

여러 이유가 추측 가능했지만, 우리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유나도, 유미도, 나도.

그 안에 감춰진 진실을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유미는 유나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야무지게 생겼다.

둘이 닮아서 유미도 꽤 예뻤다.

보는 사람에 따라 유미가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듯 했다.

막내 유현은 키가 크고 서글서글한 인상.

깐깐한 누나들 사이에서 고생 좀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옷이 반값이라며!"

유미가 외쳤다.

이제 익숙한 대사였다.

우린 방학의 종료를 앞두고 대규모 업데이트를 계획 중이었다.

우리의 자체 제작 의류도 나오고, 마침 가을 옷도 본격적으로 풀리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내 비장의 무기 풀 빌라 펜션까지.

펜션 예약 소식에, 모두들 의욕이 넘쳐서 미쳐 날뛰며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 여자를 기쁘게 하는 요령이 조금 생겼다.

"유미야. 서울 온 김에 모델 한 번 해 볼래?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널 그냥 보내기엔 너무 아까워."

"진짜요? 뭐, 재미로 한 번 해보죠."

"옷 입는 센스도 있어 보이는데, 이번 신상도 언니랑 같이 직접 골라줄래?"

"하긴 옷 보는 안목은 제가 언니보다 낫다고 많이들 그래요. 옷발도 솔직히 내가 낫죠. 언니보다 키도 더 크고."

키는 더 클지 몰라도 유나보다 훨씬 단순한 것 같았다.

시작은 씁쓸했지만, 유미와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팀 유나, 의욕 넘치는 유미, 태민과 유현까지 우리 일곱은 내 카니발을 타고 동대문에 도착했다.

'아무리 내가 단련되었지만...'

여자 넷과 동대문을 쇼핑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 난 태민이 데리고 유현이 옷 좀 사줄게. 네 사람은 느긋하게 쇼핑해요."

유나는 뭔가 불안한 눈빛.

"그래. 유현아, 형들 말 잘 들어. 태민아, 옷은 네가 골라. 알겠지? 주원이랑, 유현이 말은 절대 들으면 안돼."

그렇게 남자 셋만 남게 되었다.

후우...

다행이라는 듯 김태민이 긴 숨을 뱉었다.

중학생 유현이는 자기가 방금 어떤 시련에서 벗어난 것인지 짐작도 못 할 것이다.

"형들, 안심하세요. 전 누나들이랑 달라요."

다행히 중학생 유현이는 우리 과였다.

동대문의 여러 도매 건물 중 대부분은 여성의류였다.

그 많은 건물 중 남자 옷은 몇 층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 상가들만 돌아봐도 꼼꼼히 잡으면 하룻밤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우리에겐 간단했다.

띠잉.

우린 도매 건물 4층에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 가게에 들어가 말했다.

"저 옷, 저 옷, 저 옷 다섯 벌씩 주세요. 한 벌은 한 사이즈 큰 걸로 주세요."

마치 백화점 VIP가 된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도매상에 온 김에 한철이와 형원 선배 옷까지 같이 샀다.

다섯 명의 옷이 겹치긴 하겠지만 우리는 예술가.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우린 삼십분도 안 되어서 사입 가방을 가득 채웠다.

'중학생 유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뭘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우린 근처의 PC방으로 갔다.

새벽 시간이지만, 유현이는 키도 컸고, 사입 가방까지 매고 있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왜 김태민이 더 좋아하는 것 같지?'

그리고 우린 게임을 시작했다.

이번 생은 아직 경험이 없지만, 전생에서는 나도 게임을 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워낙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내게는...

'노력상점이 있지.'

물론 이러라고 생긴 능력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유나의 남동생은 나름 내게 중요했다.

나는 노력 코인을 아끼지 않고, [잡생각 제거]를 쓰고 [숲 속 산책]까지 사용했다.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밝은 눈]까지.

내 눈은 빛나고, 모니터 안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게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내 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시! 유현아, 세시 저글링 빈집! 김태민! 질럿 발업 언제 되는 거야?"

나의 노련한 컨트롤과 작전 지휘로 우린 3: 3 헌터전에서 연승을 거뒀다.

스타크래프트가 지겨우면 우리는 잠시 서든 어택을 했다.

"전방 수류탄! 유현이는 나를 엄호해!"

그리고 나는 두 명에게 탄산음료와 오다리, 등등 무한 간식을 제공했다.

"유현아. 내가 이런 거 사줬다고 누나한테 말하면 안 된다."

"당연하죠. 우린 PC방 온 적이 없는 걸요."

역시 우리 과.

우리 셋은 패배를 몰랐다.

그림 천재 김태민.

중년 회귀자 이주원.

제주도 중학생 한유현.

오늘 우리 셋은 무패의 전쟁광이었다.

유현이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주원이 형, 최고의 여름방학이에요."

유나의 동생에게 인정받다니, 노력 코인이 아깝지 않았다.

"주원아. 최고의 여름방학이야."

나는 어쩌면 한국 미술계를 몇 년 쯤 퇴보시킨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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