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자체 생산 □
자체 생산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옷 장사는 원래 계산한 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대기업 출신 디자이너들이 함께 만든 쇼핑몰이 6개월을 못 버티는 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여고생이 만든 쇼핑몰이 수십억 매출을 찍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다니는 도매시장만 해도, 전업 주부였던 사람이 무작정 시작해서 몇 억 짜리 매장을 셋이나 경영하는 것을 매일 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할 수 있었으면 우리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각자 입고 싶은 옷을 찾으면 돼요."
동대문 옷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기 보다는 기존의 옷들을 재창조하는 경우가 자연스러웠다.
기존의 옷이란 명품 의류일 수도 있었고, 몇 년 전 인기 상품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디자이너가 구상했던 옷이 공장이나 재료의 사정으로 중간에 변경되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그런 유연함은 어려움이기도 했고, 장점이기도 했다.
나는 내 계획을 설명했다.
"세 사람이 할 일은 쇼핑이에요. 지금부터 백화점이든 시장이든 느긋하게 돌아다니면서 세 사람이 정말 갖고 싶은 옷을 찾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다예요. 그리고 그 옷의 장단점을 찾아서 더 좋은 옷을 만들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다행히 세 사람은 서양화과 학생.
생각한 것을 손으로 그릴 수 있었다.
"공장은 내가 책임지고 찾아낼게요. 말이 통하고 일 잘하는 사람으로. 옷을 정하면, 공장이랑 의논해서 샘플을 만들고, 원자재를 골라서 공장으로 보내주면 그게 다예요."
세 명이 겁먹을 까봐 일부러 단순하게 줄여서 말했다.
다행히 겁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팀 유나는 눈을 반짝거렸다.
옷을 만든다는 일은 여자들의 로망 같았다.
지금은 어쩌면 꿈이 실현되는 순간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수진 선배가 입을 열었다.
"백화점을 쇼핑하는 게 우리 일이란 말이지?"
"넵. 식대와 교통비, 날이 더우니까 커피 값도 제공할게요."
"그렇군. 커피까지란 말이지."
이왕 꿈의 직장이 된 김에 더 쓰기로 했다.
"커피도 마시고 조각 케이크도 드세요."
옆에 있던 김태민도 의욕을 불태웠다.
"누나, 내일부터 당장 시작하죠."
"태민아, 넌 나랑 같이 공장 찾아야지."
* * *
그리고 우린 정신없이 일했다.
원 부동산과 원 디자인은 문제없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안과밖 건축사무소와 하이 유나의 공장 섭외였다.
먼저 안과밖.
"처음엔 홈페이지 만들면서 무슨 재촬영까지 하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 대표님이랑 같이 일 해보니 너무 당연한 일 같아요."
정말 그렇게 느낀 건지, 안동진 대표의 강력한 지원 때문인지, 기획팀 직원들은 성실히 나를 도왔다.
거의 대부분 건물들의 재촬영이 이뤄졌는데, 김동윤 작가가 갈 수 없는 곳엔 김 작가의 문하생들이 촬영했다.
'화려하게 플래시를 바르진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바스크립트를 이용해 다수의 이미지를 보기 편하게 정리했다.
그러니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꽤 완성도 있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의류 공장 섭외.
공장 섭외는 은성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은성사는 공장 운영은 하지 않고, 중국산 의류를 수입하는 가게였다.
하지만 역시 25년 짬밥.
동대문을 훤히 꿰고 있었다.
"옷 공장들이 다 모인 사이트가 있어요. 거기에서 옷 종류별로 공장을 찾아야 해.
아마 큰 공장은 지금처럼 작은 주문은 상대해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일일이 만나보고, 작은 공장 중에 잘하는 곳을 직접 찾아야 해. 결국 발품이지."
그림도 공장도 홈페이지도 결국 발로 뛰어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은성사 사장은 맞은편 도매상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김사장! 민혜야! 이리 와 봐!"
은성사 사장은 직접 공장을 돌리는 도매 사장들을 불러서 내게 소개해줬다.
그들은 자기들 옷을 보여주며 불량이 나는 곳, 공장의 실력을 알 수 있는 부위 등등을 자세히 가르쳐줬다.
"공장 찾으면 곧바로 계약하지 말고, 공장 이름을 나한테 보내 봐요. 혹시 아는 곳일 수도 있으니까."
"거참, 그런데 진짜 스무 살 맞아요? 은성사가 예뻐할 만 하네."
도매상 사장들은 가게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기도 했다.
"여기 여자친구를 못 봐서 그래. 이 친구보다 더 해. 얼마나 똑부러지는지."
은성사 사장은 자리에 없는 유나까지 칭찬했다.
'여자친구라니...'
역시 동대문 상인이라 말을 참 듣기 좋게 하는 것 같았다.
* * *
요즘은 대부분 외근이었다.
외근을 마치고 오피스텔에 와서 안쪽 방의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안.
내 소파베드에 머리를 기대고 유나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피곤했는지, 내가 들어와도 눈만 껌벅일 뿐 별 말도 없었다.
나는 유나 옆에 똑같은 자세로 누웠다.
"요즘 많이 힘들지?"
"많이는 아니고 약간."
잠시 후, 유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입시 할 때 생각나.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가 미대 입시 준비할 때였거든. 요즘도 그때만큼 바쁘게 사는 것 같아."
난 유나가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려서 무엇이든 뚝딱 다 해치운 줄 알았다.
하지만 유나도 힘든 시기가 있었다니.
"하지만 입시 때는 항상 혼자 같았거든. 아빠, 엄마 앞에서는 걱정할까봐 티를 내면 안 됐고. 입시 결과는 전부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그래서 그땐 가끔 무서웠어."
"지금은 안 무서워?"
"응. 자기 일처럼 나서주는 친구들도 있고. 그리고 네가 흔들리지 않고 척척 일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안심이 돼.
일은 힘들어서 오히려 다행이야. 힘든 만큼 잘 돼가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네가 아니었으면 아마 평생 직접 옷을 만들어볼 생각은 못했을 거야. 몸은 힘들어도 그만큼 신나."
"진짜?"
"어."
유나의 말을 들으니까 외근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유나 상점도 노력 상점 못지않은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쇼핑몰 시작하고, 처음엔 이랬거든. 와 진짜 일 많다. 나 혼자 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어."
"어떻게?"
"내가 언제 쇼핑몰을 시작했더라도, 날 혼자 버려두지는 않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문득 회귀자도 사실은 별거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인생이든, 두 번째 인생이든 결국 이런 사소한 칭찬이 행복한 것이었다.
그래서 약간 허세도 부렸다.
"이제 학교 시작하잖아. 이번 자체 생산만 마무리 되면 쇼핑몰이 재미있을 만큼만 일 해. 나머지는 내가 다 해결할게."
"고마워."
유나의 말을 듣고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정말 고맙다면.'
장난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오늘은 계속 든든한 남자로 남고 싶었다.
"아, 맞다. 부탁할 게 있어."
유나가 생각난 듯 말했다.
"내 동생이 고 3이랬잖아. 8월에 보충 수업 끝나면 일주일 정도 서울에 놀러오겠다는데, 남동생 녀석이랑."
그 까탈스럽다는 여동생.
"내 방에 수진 언니도 같이 있잖아. 남동생을 여기서 며칠만 지내게 해도 될까?"
그 정도야 뭐, 얼마든지.
그렇게 한동안.
오랜만에 방해받지 않고, 유나와의 잡담을 충전했다.
* * *
다시 여러 날이 지났다.
우리는 자체 생산을 할 옷을 정하고 샘플단계까지 들어갔다.
하나는 재킷.
일단 재킷은 여러 면에서 적당했다.
너무 저렴한 옷은 자체 생산을 해봤자 이익이 남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 생산 의류나 다른 도매상의 옷과 차별점을 두려면 재킷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옷이 좋았다.
가을로 넘어가는 시즌이라 재킷이 딱 적당했다.
'게다가 기준도 있으니까.'
3년째 대박중이라는 동대문 재킷을 봤으니까 그 옷보다만 잘 만들면 된다.
유나, 정화, 수진 셋은 무척 열심이었다.
안감부터 마감, 단추까지.
'처음 만드는 옷이라 그런가...'
세 명이 신나게 매달려서 고치고 바꾸고 난리도 아니었다.
"기대해도 좋아! 이번 수진 재킷은 역대급으로 예쁘게 나올 거야."
"유나 재킷이거든요. 언니?"
셋이 공을 들이는 만큼 꽤 잘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레이어드용 티셔츠.
4계절 꾸준히 팔리는 기본 아이템이었다.
우린 도매상에서 4000원에 구입해 8000원에 팔았는데 다른 옷들과 함께 끼워 파는 상품으로 잘 나갔다.
'하지만...'
디자인은 괜찮았지만, 몇 번 세탁하면 옷이 망가졌다.
그냥 한두 달 입고 버리게 되는 중국산 옷이었다.
'하지만 국내 생산을 하면...'
훨씬 좋은 품질로 도매가와 비슷한 값에 제작할 수 있었다.
우린 새로운 레이어드 티셔츠를 디자인했다.
디자인과 핏도 크게 나아졌다.
마진은 크지 않겠지만 손님 유인용 상품으로 괜찮을 것이다.
* * *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계획이 있었다.
'이대로 옷이 잘 나온다면?'
그렇다면 촬영까지 신경 써야 한다.
옷이 좋은 만큼, 사진까지 신경 써서 두고두고 많이 팔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그 사람을 찾아갔다.
이쪽 방면의 전문가가 있었다.
바로 형원 선배.
"잘 지내셨어요?"
형원 선배는 10월 달에 있을 장편 소설 공모전을 준비 중이었다.
졸업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을 불사를 생각인 듯 했다.
하지만 글도 쉬어가면서 써야 하는 법.
"형의 도움이 필요해요."
"내가 뭘 도우면 되지?"
"쇼핑몰을 시작했어요."
"들었어. 유나랑, 수진이랑, 정화가 모델이라며?"
"셋 다 예쁘죠."
"그래. 셋 다 예쁘지."
"그 세 사람이 마음껏 포즈를 취할 수 있는 멋진 풀 빌라 펜션을 빌리면 어떨까요?"
마침 안동진 대표가 회식비로 준 200만원이 있었다.
그 돈은 어차피 직원들을 위해 써야 한다.
그렇다면 고생한 직원들의 야유회와 촬영을 한 번에 해결한다면?
그리고 때마침 유나의 동생들이 서울에 놀러온다고 했다.
어쩌면 유능한 오빠로 점수를 딸 좋은 기회일 지도 몰랐다.
'굳이 점수를 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왠지 잘 보이고 싶었다.
아무튼.
"풀 빌라 펜션에서 쇼핑몰 촬영이라...."
형원 선배가 내손을 붙잡았다.
"최선을 다해서 장소를 찾아볼게."
"형만 믿을게요."
그렇게 착착 자체 생산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 * *
8월의 끝자락.
유나 등등은 공장과 원단 시장으로 바쁘게 외근 중이었다.
그때 내 전화기가 울렸다.
유나였다.
"내 동생들!"
"그래."
"지금 도착했대. 내 자취방은 찾기 힘들까봐 오피스텔 주소 가르쳐줬어! 곧 그리 갈 거야."
맡겨두라고.
드디어 문이 열리고 그들이 들어왔다.
유나의 여동생과 남동생.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유나의 여동생은 사무실을 둘러보고는 곧장 김태민에게 걸어갔다.
"오빠가 주원 오빠죠? 언니가 뻥치는 줄 알았는데 진짜였네요. 안녕하세요, 한유미입니다."
김태민이 쪽가위를 들고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뒤에서는 뭐가 그리 좋은지 유나의 남동생이 싱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