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한 방 □
"앉게."
안동진 대표는 내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홈페이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로 학교나 가족에 관한 질문이었다.
개인적인 질문이었지만, 별로 불편하진 않았다.
'아마 나도 안동진 대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짜증났을 거야.'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산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항상 호감이 갔다.
다만 가족에 관한 질문은 대강 얼버무렸다.
어머니와 단 둘이 자란 것을 남과 다르거나 불행하다고 여긴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쓸데없이 동정 받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깔끔하게 일로 평가받겠어.'
"그렇군. 캐물어서 미안하네. 요즘은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겠지만, 내가 일할 땐 좀 달랐다네. 건물 하나 따내려면 부지런히 접대하고 따라다니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들어야 했지.
그런 방식이 나쁜 점도 많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네. 그래도 사람이랑 일하는 기분이 들었거든."
"이해합니다. 저 역시 전화와 모니터로만 손님을 대할 때도 있어서 가끔 고객과 직접 마주하는 게 좋습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안동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집 짓는 기술자 취급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도 예술가라는 자부심이 있다네. 덕분에 예술 하는 친구들 만나면 무척 반갑기도 해. 그래서 이것저것 물어본 거야. 늙은이가 주책이라고 생각하진 말아주게. 하긴 주책이 맞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도 안과밖의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안 대표님이 많이 궁금했습니다."
안동진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물었다.
"요즘 참 덥지 않나?"
어려져서 좋은 건 여름이 견딜만해졌다는 것이다.
전생에서 내가 나이 들어 그런 건지, 아니면 세상이 더 더워진 건지 매년 여름이 힘들었다.
다시 태어난 이후 사는 게 여러모로 편리해졌다.
안동진 대표가 말을 이었다.
"옛날엔 말이야. 아 자꾸 옛날이야기를 하는군. 난 자네가 꼭 옛날 사람 같아서 그래.
요즘은 그러면 현장에서 기겁하겠지만, 내가 일을 배울 땐 말이야. 너무 덥거나, 추운 날에는 현장에 돼지고기랑 막걸리를 사갔어.
그리고 드럼통에 각목 넣고 구워서 인부들이랑 나눠먹었지. 그런 게 현장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안동진 대표는 책상에서 흰 봉투를 집어서 내게 건넸다.
"받게. 큰돈은 아니고, 직원들이랑 회식이나 하게."
"괜찮습니다. 이미 적지 않은 금액을..,"
"아니야. 그냥 받아두게. 시안 짜느라 고생했어. 끝까지 잘 완수해주게. 내 예의니까 받아주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별로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거래처 사장이 건네는 격려금보다는 친한 선배에게 밥한 끼 얻어먹는 느낌이었다.
안동진 대표가 고맙기도 하고 멋있기도 했다.
오피스텔로 돌아오는 길에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확인해봤다.
'와악..'
백만 원짜리 수표가 두 장이나 들어있었다.
'직원 다섯 명이라고 분명 말했는데.'
얼마나 비싼 회식을 하라는 건지.
원 디자인은 물론 팀 수진까지 다 불러서 먹여도, 몇 번은 회식해야 할 것 같았다.
동시에 부담되기도 했다.
'옛날 방식이라는 게 참 무섭구나.'
진짜 열심히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의욕이 강제로 팍팍 솟구쳤다.
* * *
정화, 수진 선배가 도와준 덕에 촬영이 수월하게 끝났다.
분명 촬영까지만 도와달라고 했는데, 사진 보정까지 알아서 도와줬다.
쇼핑몰에서 촬영한 사진을 그냥 쓸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옷의 색상부터, 모델 얼굴의 잡티까지 전부 손봐야 했다.
'그러니까 선배들은 순수하게 우릴 돕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자기 사진을 남에게 맡길 수 없었던 거겠지.'
아무튼 덕분에 일은 빨리 끝났다.
그리고 상품 사진들을 업로드한 저녁.
유나와 나는 노트북 앞에 나란히 앉았다.
반응이 어떨지 나도 꽤 궁금했다.
4500원 반값 스니커즈에, 다량의 상품들.
주문이 꽤 들어와 있을 지도 몰랐다.
"으으, 나 떨려."
주문이 많이 들어왔기를.
유나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판매자 관리 페이지를 클릭했다.
촤르르, 갱신되는 페이지.
그리고 유나가 외쳤다.
"어? 이 배신자들."
분명 주문은 꽤 늘어났다.
첫날치고 나쁘지 않은 액수.
하지만 문제는 상품 문의였다.
[ 헐, 이 언니들 누구예요? ]
[ 유나 언니랑 같은 소속사예요? ]
[ 난 이제까지 유나 언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어요. ]
[ 대체 어디가면 저런 언니들을 만날 수 있는 거죠? 왜 내 주위엔...]
"내가 이 녀석들 사탕이랑 양말, 얼마나 챙겨줬었는데!"
많지는 않았지만, 유나는 이미 자기 팬클럽을 거느리고 있었다.
대부분 중, 고등학생.
옷은 가끔 사고 후기만 길게 남기는 돈은 안 되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팬들이 일시에 분열되고 말았다.
나는 옆에서 피식 웃었다.
'길게 보면 모델의 반응이 좋은 게 옷의 반응이 좋은 거 보다 훨씬 나을 지도 몰라.'
옷은 계속 바뀌지만, 모델은 바뀌지 않으니까.
아무튼 두 선배 덕에 질문 게시판이 뜨거웠다.
그날 저녁.
나는 정화, 수진 선배에게 간이계약서를 내밀었다.
"우리랑 함께 일해주세요."
[ 하루 6시간, 근무 시간은 자유. 동대문 야간 사입, 모델 촬영은 별도 수당 지급. ]
방학이 끝나고 유나가 학교와 병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나는 쇼핑몰만큼이나 유나가 그림을 그리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또 부지런히 그려야지.'
사입 대행을 쓰면 유나가 매일 동대문에 갈 필요가 없어진다.
일주일에 한두 번 동대문의 신상을 확인하고, 촬영만 해주면 된다.
그리고 두 선배가 함께 해주면 그마저도 유나의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느리긴 하지만, 하이 유나도 조금씩 성장 중이라 돈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할게! 할래! 나 할래. 어차피 알바 찾고 있었거든!"
대답은 수진 선배가 먼저 했다.
"그래. 하자."
정화 선배도 찬성했다.
일단 우리가 내건 조건도 꽤 좋았고.
무엇보다 수진 선배를 혼자 맡기기가 불안했을 것이다.
아무튼 유나를 위한 든든한 두 명의 동료를 얻었다.
그날 저녁.
두 선배가 가고, 유나가 내게 다가왔다.
"고마워.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줘서."
고맙긴.
내가 같이 일하자고 했으니 내가 유나를 책임져야 했다.
사실 원 디자인 쪽도 내가 학교를 병행할 수 있도록 이미 준비 중이었다.
"아, 맞다. 수진 언니 집이 멀잖아. 그래서 내 방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어."
"어? 안돼."
"안돼긴 뭐가 안돼,"
유나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단 두 번밖에 가보진 못했지만, 유나의 자취방은 이미 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유나를 도우려한 나의 배려가 오히려 칼이 되어 내게 돌아오다니.
"혼자 살고 싶었다며!"
"수진 언니는 착해서 괜찮아. 우릴 위해서 일해 주는 건데 그 정돈 도와야지. 바보야, 그리고 언니 2학기에 기숙사 신청할 거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수진 선배는 학점에 초연한 사람.
기숙사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유나의 자취방은 내게서 멀어졌다.
* * *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 8월이 되었다.
이제 곧 2학기가 시작된다.
정신없이 일했던 방학을 잘 정리해야 할 시기.
그래야 무리 없이 2학기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원 디자인쪽은 문제가 없었다.
원 부동산의 새 직원들도 무리 없이 업무를 승계했고, 원 디자인도 잘 굴러갔다.
9월부터 승희씨가 출근해 사무실을 지켜준다면 낮 동안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갈 것이다.
참고로, 승희씨와는 연봉을 재협상했다.
그리고 승희씨와 의논해 원부동산의 아이디어를 준 민성환에게는 특별 보너스도 지급했다.
민성환은 마치 로또라도 당첨된 것처럼 좋아했다.
이제 문제는 하이 유나.
매출이 안정적으로 나와야 직원들을 더 뽑을 수 있고, 회사의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회사의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유나가 학교에 집중할 수 있었고.
하지만 하이 유나는 매출이 부족했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검색 광고를 걸었겠지만...'
검색 광고는 매출을 보장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었다.
이제 상품 수도 꽤 늘었고, 광고를 걸어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뭔가 걸려.'
겨우 몇 달 사업을 했다고, 사업가의 본능이라도 생긴 건지, 광고를 시작하려니 뭔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검색 사이트를 뒤져, 키워드 광고를 걸고 있는 인기 쇼핑몰들을 전부 살펴봤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하이 유나는 수준이 많이 뒤떨어졌다.
그나마 모델들이 예쁘고, 웹 사이트가 세련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이트들도 마찬가지.
인기 사이트들은 대부분 얼짱 출신이거나, 아니면 전문 모델을 고용했다.
그리고 사진 연출이나 상품 구성 등은 우리가 확실히 뒤쳐졌다.
'여대생들이 아르바이트로 만든 쇼핑몰, 아직 그 이상은 아니야.'
자신에게 객관적일 필요가 있었다.
'지금 광고를 건다면.'
확실히 단기적으로 매출은 오를 것이다.
하지만 광고비 대비 큰 성장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일만 바빠지고 돈만 쓰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낭비하게 된다.
방학은 내게 사업을 다져둘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니 광고보다 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해.'
나는 혼자서 며칠간 동대문 시장을 둘러봤다.
그리고 은성사를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우린 은성사 스니커즈를 순식간에 팔아치웠고, 은성사 사장은 나를 아주 좋아했었다.
그리고 저녁시간.
나는 정화, 수진, 유나를 불러서 회의를 소집했다.
탁자에는 김태민까지 모두 다섯이 앉았다.
'김태민 이 녀석.'
김태민은 이제 자기 담요까지 오피스텔에 가져다두고 일주일에 삼일은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돈도 많은 녀석이 나한테 빈대 붙다니.'
하지만 귀여운 구석도 많았고, 옷 포장도 곧잘 했기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미술의 최대 유망주가 대체 왜 쪽가위를 들고 옷을 포장하는 걸까.'
미술계 원로들에겐 내가 대역 죄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분명 시키지 않았어...'
아무튼 우리들의 회의가 시작되었다.
나는 키워드 광고에 대해 설명하고, 상위권 사이트들을 네 명에게 보여줬다.
"확실히 우리 사이트가 제일 밀리는 것 같아."
김태민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자기 맘대로 우리 사이트라고 하다니.'
아무튼 나머지 셋도 인정했다.
"확실히 광고를 걸기엔 시기상조인 것 같아."
이제 내가 나설 차례.
"그런데 전에 광고를 걸지 않고도 우리 회원 가입이 크게 늘었던 적이 한 번 있어. 바로 은성사 스니커즈를 팔았을 때야. C마켓 최저가의 반값으로 물건을 팔았더니, 광고 없이도 주문도 크게 늘고 회원 가입도 늘었어."
"하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였다며? 신발 수량도 얼마 없었고."
정화 선배가 지적했다.
"맞아요. 은성사 스니커즈는 이제 없어요. 하지만 이걸 보세요."
나는 사입 가방에서 여성용 싱글버튼재킷을 한 벌 꺼냈다.
"이 재킷을 파는 매장이 청평화 시장 3층에 있어요. 그런데 어제 사람들이 이 재킷을 사려고 2층까지 줄을 섰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30분 같이 줄을 서서 이 옷을 샀어요. 그리고 왜 줄을 섰냐고 앞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이 재킷이 3년째 대박 상품이었대요."
정화 선배가 내게서 재킷을 받아 걸쳤다.
그리고 거울에 자신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확실히 예쁘긴 하네. 그런데 약간 동대문 느낌도 나. 조금 싼 옷 느낌? 그런데 이런 재킷 한 벌 있으면 무척 편하게 입을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옷에 대해 설명했다.
"이 재킷의 도매가는 37000원, 그런데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8, 9만원, 인터넷에서도 7,8 만원에 팔린대요. 하지만 다른 도매상에 물어봤더니 이 옷의 원가는 25000원 이하. 대량으로 생산하면 20000원 이하로도 맞출 수 있을 거래요. 아마 최소 생산 수량은 500벌 정도"
"그러니까 네 말은?"
난 유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차피 한 달 꾸준히 광고를 걸면, 몇 백에서 수천은 깨져. 나는 차라리 그 돈을 투자해서 자체 생산을 하면 고객과 우리 둘 다 이익을 보면서 매출은 늘 거라고 생각해."
자체 생산은 쉽지 않은 시도였다.
하지만 싸고 좋은 옷은 반드시 팔리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예쁜 옷을 만들 수 있냐일 거예요. 이 재킷을 기준으로 더 나은 옷이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요."
마침 자금도 넉넉했고, 나는 팀 유나의 옷에 관한 감각을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