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47화 (47/203)

■ 47. 청바지 □

하이유나의 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이유나는 사실 아직은 일보다는 내 힐링에 가까웠다.

한철이가 부동산 샘플 사이트를 다섯 개 만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를 만들고, 가격대 별로 하나씩 기능들을 지운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완성되었다.

복덕방 사장님들 취향에 맞게, 단순하고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글자는 크게 넣었고, 다른 사이트에 없는 가격 비교 기능과 태그 검색 기능을 추가했다.

"어떤 것 같아?"

한철이가 내게 의견을 물었다.

"확실히 기능이랑 디자인은 우리가 더 뛰어나. 하지만 경쟁 업체는 부동산 전문 에이전시로 벌써 자리 잡고 있으니까. 그리고 상품 후기도 많아."

"공인중개사들이 전부 나이가 많은 건 아니잖아."

젊은 사람들은 비교해보고 우릴 선택할 거란 예상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런 낙관적인 기대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방법은 많았다.

가짜 판매 사례를 만들고, 가짜 구매 후기를 올릴 수도 있었다.

웹 에이전시엔 실제로 그런 경우가 흔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실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키워드 광고도 적극적으로 하고, 가격도 경쟁업체보다 공격적으로 매길 거야. 반응보고 경력직 상담원도 뽑고."

나는 한철이의 완성본에 몇 가지 개선 사항을 지적하고, 사이트를 다듬도록 요청했다.

그러는 동안 신상 쇼핑몰 디자인도 작업해서 꾸준히 업로드 했다.

쇼핑몰 디자인은 수익은 크지 않지만, 우리의 캐시 카우 역할을 잘 해주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일들을 안정적으로 진행하려면 계속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었다.

'방학 동안 벌려 놓은 일들에서, 최대한 가시적인 성과를 끌어내야 해.'

방학이 끝나면 또 학교 수업으로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다.

긴장을 풀지 말고 일의 속도를 당겨야 했다.

그동안, 유나는 내가 촬영한 사진들을 편집하고, 직접 옷 설명을 적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잠깐 일어선 이소영이 우릴 보고 웃었다.

"아마 대한민국 스무 살 중에 세 사람이 제일 열심히 일할 거예요."

제일 열심히는 아닐 지도 모른다.

한국은 넓고, 부지런한 사람은 많으니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뿌듯한 것은 사실이었고, 또 같이 일해 주는 친구들이 무척 고마웠다.

* * *

사이트에 하나씩 유나가 직접 상품을 등록했다.

청바지 4벌, 기본 티셔츠 5벌.

그런데 사이트 방문자는 이제까지 겨우 20명.

그리고 매출은 0이었다.

유나가 초조하게 물었다.

"원래 이런 거야?"

"응. 원래 이런 거야."

"그럼 어떡해야 해? 검색 사이트에 광고를 해야 해?"

광고는 옷들이 충분히 준비된 이후에 해야 한다.

지금은 상품이 적어서, 광고로 손님들을 불러봤자 낭비일 뿐이었다.

세상에 인터넷 쇼핑몰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러니 고객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기 전까지 구매는 일어나지 않는다.

유나가 그걸 모를 리도 없는데, 처음이라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회귀자.

쇼핑몰의 달인.

전부 대책이 있었다.

"오픈마켓에도 같이 등록하는 거야."

C마켓 등의 오픈마켓은 개별 상품 위주로 등록된다.

그래서 신참 판매자가 기존 판매자와 비교적, 아주 비교적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었다.

또 적극적인 구매자가 많아서 수월하게 물건을 팔 수 있다.

단점은 판매할 때마다 판매 수수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점.

"우리 사이트가 안정적으로 상품을 갖추고, 회원을 모을 때까지 오픈마켓이 좋은 홍보 수단이 되어 줄 거야. 그리고 제품을 회전 시키는 역할도 해줄 거야."

"대단하다. 넌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있어?"

뭐, 이 정도 쯤이야.

두 번 살다보면 상식이었다.

"우리의 하이 유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공부했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 좀 멋있는 것 같아."

뿌듯했다.

나는 여러 쇼핑몰들을 봐 왔다.

유나는 감각도 있고, 부지런했다.

내가 잘 서포트도 했고.

우린 잘 하고 있었다.

그래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 * *

나는 다시 외근을 나갔다.

이번에는 합정역의 한 사진 스튜디오.

스튜디오 안에는 사진 촬영이 한창이었다.

해외 유학생을 위한 포트폴리오 촬영이었다.

"어떻게 오셨죠?"

"김동윤 작가님을 뵙고 싶다고 연락드렸었는데."

"아, 안으로 오시죠."

사장실로 들어가자 머리 희끗희끗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았다.

바로 김동윤 사진작가.

스튜디오 안과 밖의 포트폴리오 파일에서 제일 내 마음에 들었던 사진의 작가였다.

우린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아, 알죠. 안 사장님. 맞아요. 제가 종종 안 사장님 건물을 촬영했습니다."

"실은 제가 안과 밖의 홈페이지 리뉴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동윤 작가님의 사진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언을 듣고 싶어서..."

나는 '있는 그대로'라는 홈페이지의 테마와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 그리고 여러 가지 생각들을 솔직히 이야기했다.

내 말을 들은 김동윤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됩니다. 있는 그대로라. 쉽지 않을 겁니다. 안과 밖의 건물들은 복잡한 입체고, 또 가지고 있는 위용이 대단하죠. 하지만 컴퓨터 모니터는 작으니까, 웹 사이트로 담아내기가 난처할 겁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김동윤은 웃으며 말했다.

"서양화과 학생이라고 했죠?"

"맞습니다."

"건물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네?"

"한 사람을 그릴 때, 우리가 꼭 전신만 그리는 건 아니지요. 때로는 얼굴만 그리고, 때로는 손만 그립니다. 그래도 화가들은 모델의 영혼을 온전하게 담아내죠. 사진도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홈페이지도 결국 비슷할 겁니다."

역시.

찾아오길 잘했다.

김동윤 작가의 말을 듣자,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시안의 방향이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많은 걸 배웠습니다.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말해보시죠."

"홈페이지 작업이 들어가면 일부 건물은 재촬영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김 작가님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김동윤은 빙그레 웃었다.

"좋은 쪽으로 일정을 맞춰 봅시다. 안 사장님의 건물은 사진을 찍는 재미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이번 외근도 원하던 것을 얻어냈다.

* * *

유나와 함께 일해서 대부분 좋았지만, 나쁜 점도 있었다.

바로 내 노력 상점.

나는 [압축잠]을 이용해 하루 2시간만 자도 충분했다.

하지만 유나가 내 생활 패턴을 전부 알게 되니까 쓸데없는 걱정을 시작했다.

유나와 함께 동대문에 갔다가 돌아오면 새벽 5시.

한철이와 이소영은 10시 쯤 출근하니까 충분히 쉴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유나는 내 [노력상점]을 모르니까.

유나는 자기가 더 많은 일을 해서 어떻게든 내 짐을 덜어주려는 것 같았다.

'괜히 같이 하자고 한 건 아니겠지.'

이제와 돌이킬 생각도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대신 꼭 성공해서 유나가 고생한 만큼 보상 받게 해주고 싶었다.

더불어 나도 한 몫 챙기고.

제대로 키울 수만 있다면 하이 유나는 또 다른 캐시 카우가 될 것이다.

외근 나갔다가 사무실로 저녁에 돌아왔다.

한철이와 이소영은 없었고, 유나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무척 들뜬 모양이었다.

"설마?"

"맞아. 첫 주문이야!"

하이 유나를 개설한 지 일주일.

오픈 마켓에 상품을 등록한 지 4일 만에 첫 주문이 들어왔다.

오픈 마켓을 통해 청바지 한 벌이 팔렸다.

사실 청바지 한 벌로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이 청바지는 중국산으로 도매가는 12000원.

우리의 소매가는 점칠을 붙여서 20400원.

거기에 오픈마켓 수수료를 떼고 나면 대략 17000원.

여기에 다시 부가세를 떼면 대략 15000원.

쇼핑몰 배송비는 보통 2500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물량이 적어서 2700원으로 계약했다.

그러니 한 건 배송할 때마다 200원씩 우리가 부담해야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포장용 폴리백 가격까지 빼면 인건비와 차비는 생각하지 않고도, 마진은 겨우 2000원 안팎이었다.

그런데도 유나는 거의 20만원 어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뭐, 시작은 항상 의미가 있으니까.'

겨우 2000원이지만, 유나가 들뜬 모양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뭔 줄 알아? 이것 좀 봐."

유나는 컴퓨터 화면을 가리켰다.

거기엔 청바지 구매자가 적은 긴 상품 문의가 있었다.

[ 언니, 너무 예뻐요! 연예인 지망생이세요? 혹시 소속된 사무소 있으신가요? 실은 며칠 전부터 보고 있었는데, 돈이 모자라 눈팅만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용돈을 주셔서 큰맘 먹고 질러요.

우리 반 친구들도 전부 언니보고 예쁘다고 난리 났어요. 청바지 입고 학교 가서 자랑할 테니까 꼭 예쁜 옷으로 보내주세요! ]

상품 문의라기보다는 거의 펜레터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아래는 청바지에 대한 세세한 사이즈 문의.

말투로 봐서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같았는데, 용돈을 아껴 사는 것인 만큼 질문이 많은 모양이었다.

"봤지? 내가 이 정도야."

사실 유나가 인기 많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니까.

나는 서양화과 3, 4학년은 잘 몰랐다.

하지만 1, 2학년 중에서 두 사람이 유명한 것은 알고 있는데, 그 둘이 바로 수진 선배와 한유나였다.

수진 선배는 교양 수업을 들을 때마다 다른 과 남학생에게 고백 받을 만큼 경력이 화려했다.

하지만 유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마 당차고 똑똑한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긴 나도 유나가 먼저 말 걸어주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친해지지 못했을 거야.'

대신 유나는 그만큼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1학년 중에서도 유나와 친해지려는 여학생이 많았고,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도 먼저 유나에게 다가갈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인터넷에서도 통하는 모양이었다.

'여자에게 인기 많은 쇼핑몰 모델이라...'

어쩌면 유나는 정말 인터넷 쇼핑몰에 최적화된 인재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유나는 상품 포장을 시작했다.

원래 청바지 한 벌은 그냥 폴리백에 담아서 보내면 된다.

하지만 유나는 종이 상자에 옷을 담고, 그 안에 사은품으로 사탕 가득, 캐릭터 양말, 인형 열쇠고리까지 넣었다.

그리고 [저희 상품을 구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로 시작하는 손편지까지 넣었다.

'이건 확실히 적자겠군.'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지난 생의 나는 자신의 직업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을 자주 봤었다.

그들은 대부분 불행했었고, 일에서도 실패했다.

그래서 유나가 겨우 청바지 한 벌을 팔고 이렇게 기뻐하고, 손님에게 고마워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유나라면.'

유나는 영리하고 강했다.

그래서 오래오래 지금의 각오를 지킬 것 같았다.

역시 유나와 같이 일을 시작한 게 옳은 선택이란 확신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