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46화 (46/203)

■ 46. Hi, 유나. □

안과 밖 건축사무소의 포트폴리오 북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책상에는 여러 해외 건축사들의 홈페이지 자료가 가득했다.

'안과 밖의 건물들을 있는 그대로, 홈페이지를 만들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는데...'

브리핑을 준비할 땐 미처 몰랐다.

그게 얼마나 무모한 선언인지를.

안동진 대표와 박주호 이사.

두 노인이 젊어서부터 평생을 바친 건축 사무소였다.

'그러니 건물들의 아우라를 있는 그대로 담는 게 쉬울 리가 없지.'

왜 경쟁사 홈페이지가 플래시를 덕지덕지 바른 화려한 장난을 했는지 이해 될 정도였다.

그냥 겉만 화려한 홈페이지라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난 안동진 대표와 박주호 이사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 둘의 포트폴리오에 격이 맞는, 제대로 된 홈페이지를 만들고 싶었다.

'나는 기로에 있어.'

만일 내가 안과 밖 건축사무소의 홈페이지를 잘 완수해낸다면, 원 디자인은 작지만 실력 있는 에이전시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그저 그런 직원 네 명 짜리, 시시한 디자인 에이전시가 되는 것이다.

그럴 순 없었다.

'난 이번 생은 도망가지 않아.'

도망 다니는 인생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지금도 감자탕집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어머니.

나를 믿고 모험에 동참해준 유나.

나를 좋은 친구와 동생으로 여기는 한철이와 형원 선배.

다시 사회로 나오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승희씨.

모두를 위해서라도 나는 반드시 안과 밖 프로젝트를 완수해야 했다.

지금 내 상황은 안동진 대표의 승인만 받은 상태.

정식으로 시안과 예산을 짜서 안영우 실장에게 승인받고, 계약서에 서명 후, 선금을 받아야 했다.

선금을 받기 전까지는 아직 진짜 계약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포트폴리오를 뒤적이다, 책상 위에 놓인 카메라를 발견했다.

'저 사진기로 금붕어를 찍어서 그리고 칭찬 받았었지. 그리고 지금은 유나를 찍고 있고. 저 카메라를 살 땐 이런 사진들을 찍게 될지 몰랐는데.'

그때 문득 생각났다.

[ 그림은 결국 발로 뛰며 그리는 겁니다. ]

바로 서진석 교수의 말.

그리고 지금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웹 디자인도 예술이야. 그러니까 결국 홈페이지도 발로 뛰며 만드는 거야. 안과 밖의 건축물을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 회사 홈페이지를 만들 생각을 한 거지?'

나는 안과 밖의 건물들 중, 내가 지금 찾아갈 수 있는 곳들을 검색했다.

그리고 포트폴리오의 사진 중 해당 건물들의 사진을 추려냈다.

"소영씨, 한철아. 외근 다녀올게요. 유나 오면 저녁까지는 돌아오겠다고 말해 줘요."

그리고 사무실을 나와, 현장 답사를 시작했다.

* * *

유나와의 일도 열심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계약서를 작성했다.

[....이주원과 한유나는 50:50으로 쇼핑몰과 관련 사업의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

어떤 양식도 따르지 않는 그냥 우리끼리 멋대로 쓴 간이계약서였다.

내가 투자금과 회사 운영.

유나가 옷의 감각과 모델을 맡는다.

의류 쇼핑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옷을 고르는 안목과 모델.

그 두 가지를 유나가 맡는다.

내 자본이 투입되긴 하겠지만, 큰돈도 아닐테고, 장사가 순항하면 별 의미가 없는 부분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손해 볼게 없는 계약, 오히려 꽤 이익이었다.

물론 내 노련한 경험과 경영 능력도 요긴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주원아, 이런 거 보통 51:49로 나누지 않아? 네가 51가져도 난 상관없어."

유나가 내게 자발적으로 권리를 양보했다.

그런데 나도 딱히 2%를 더 원하지 않았다.

내가 유나와 쇼핑몰을 만드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그걸 핑계로 유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사심도 컸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 2%가 더 필요한 충돌이 생긴다면 내겐 벌써 실패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50: 50으로 하자."

"그래. 그게 좋겠다."

난 한 번 더 계약서를 읽어봤다.

뭔가 흐뭇하기도 하고,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그런데 유나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우리 이 계약서 어디 숨겨두고 아무도 보여주지 말자."

"그러자. 절대 비밀로 하자."

그렇게 계약서를 꼭꼭 봉인했다.

* * *

이제 쇼핑몰의 이름을 정해야 했다.

쇼핑몰의 이름은 어려웠다.

쉽고, 재미있고, 입에 착착 감기고, 도메인이 선점되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고유의 스토리를 가진 이름이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라면 유나를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

"일단 내 이름을 쓰자. 내 이름이 예쁘거든."

"그건 찬성이야."

잠깐 맘속으로 유나의 부모님께 감사드렸다.

대표의 이름을 쓰면 기억하기도 쉽고, 손님들과의 거리를 좁히기도 좋다.

그리고 유나는 정말 자기 이름을 걸고 제대로 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가 쉽지 않았다.

"유나샵, 유나걸, 유나스, 유나몰, 유나의 옷장, 유나네, 유나의 선택. 유나 닷컴."

"다 별로야."

전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제일 영리한 방법을 내가 제안했다.

"그럼 기다리자. 우리가 정말 쇼핑몰로 성공할 운명이라면, 맘에 드는 이름이 어느 날, 갑자기 펑하고 나타날 거야."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유나도 동의했다.

유나의 일과는 이랬다.

오후 늦게 오피스텔에 출근해서 다른 사이트들을 둘러보며 유행과 시장을 조사한다.

그리고 내 하루 업무가 끝나면 나와 같이 동대문으로 간다.

보통 유나가 출근할 쯤이면 한철이와 이소영도 사무실에 있었다.

한철이는 부동산 에이전시부터 건축사무소 홈페이지까지 맡은 일이 많으니까, 나와 의논하기 좋도록 거의 매일 출근했다.

이소영의 경우엔.

"저는 사무실에서 누가 보고 있는 편이 훨씬 더 효율이 좋거든요."

그래서 낮 동안은 보통 셋이서 함께 일했다.

우린 정말 치열하게 일했다.

일하는 속도와 양, 그리고 질까지.

최고의 팀을 자부할만했다.

나야 [잡생각 제거], [산책], [전신 스트레칭] 등등의 사기템까지 사용했고, 한철은 코딩을 즐겼다.

이소영 역시 일할 땐 제대로 일하는 타입.

그때 문이 열리고 유나가 들어왔다.

"Hi, 유나."

LA출신인 이소영이 무심코 인사했다.

그런데 유나의 표정이 변했다.

유나가 곧장 다가가 이소영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언니, 고마워요."

"내가 뭘 했죠?"

그렇게 우리 쇼핑몰의 이름은 하이 유나가 되었다.

사업자 등록과 도메인 신청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 * *

우린 둘 다 서두르지 않았다.

돈이 급한 것도 아니었고, 옷장사로 성공하려면 동대문에 익숙해지는 게 먼저였다.

선선한 여름밤.

우린 같이 동대문에 출근해서 닭한마리를 먹고 도매시장을 둘러봤다.

다음 날은 간장게장.

다음 날은 쌀국수.

다음 날은 생선구이.

다음 날은 동대문 심야영화.

만족스런 날들이었다.

쇼핑몰을 하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 했다.

"난 내가 옷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 보니까 인터넷 쇼핑몰은 완전 내 적성인 것 같아."

"바보야. 우리 아직 아무것도 안 했거든?"

영영 시작 안하고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딱히 사입은 하지 않았지만, 매일 찾아갔더니 이제 슬슬 상인들이 우릴 알아보기 시작했다.

유나는 상인들에게 붙잡혀 수다를 떨기도 했고, 가끔은 종이컵 커피를 얻어 마시기도 했다.

[ 동대문에 가면 항상 조심해야 해. 장사 안 되는 가게의 허름한 아저씨가 알고 보면 건물이 몇 개나 있는 큰손인 경우도 있거든. ]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 나는 말 거는 상인마다 꾸벅꾸벅 공손하게 인사했다.

우린 어렸고, 유나는 예뻤고, 나는 인사를 잘했더니 상인들이 우리를 무척 귀여워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잘 팔리는 옷과 말이 통하는 상인들, 다른 인터넷 쇼핑몰들의 소문을 수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이제 시작하자."

"그래."

이제 충분히 준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거의 동시였다.

* * *

일단 하이유나의 스타일과 타겟을 정해야 했다.

쇼핑몰은 몰입이 잘 돼야 성공하는 소설과도 비슷했다.

그래서 우린 유나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우리의 타겟은 10대 후반에서 20초반의 젊은 여성. 학생과 사회 초년생이야."

그래서 우리의 첫 상품은 학교나 직장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기본 청바지로 정했다.

청바지는 한 번에 수 천, 수만 벌이 생산된다.

그래서 계절을 타지 않고 1년 내내 판매된다.

그러니 지금 시작하기에 최선의 상품이었다.

그런데 유나의 얼굴이 조금 어두웠다.

"이제 첫 촬영을 시작해야 하는데..."

유나가 쇼핑몰 촬영 장비를 검색해 본 모양이었다.

카메라는 가지고 있는 내 중고 카메라면 충분했다.

하지만 좋은 조명은 꽤 고가였다.

큰 금액을 보고 내게 미안했던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금액도 아닌데.'

아직 어린 유나에게는 큰돈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돈 나가는 일을 알뜰히 조사하고 걱정해주는 유나의 모습이 고맙고 흐뭇했다.

의류 촬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빛이었다.

빛이 충분해야 옷을 설명할 수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옷의 색을 실제처럼 재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카메라보다 조명의 역할이 클 정도였다.

"걱정 마. 우린 태양광을 쓸 거야."

"태양광?"

"응. 세상에서 제일 좋은 조명이 태양이거든."

이 시기엔 대부분 쇼핑몰들이 스튜디오 촬영을 했다.

하지만 몇 년 만 지나면 인기 사이트를 위주로 야외 촬영이 대세가 된다.

스튜디오와 야외 촬영 둘 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스튜디오 촬영은 빠르고 편하다.

하지만 야외 촬영은 실제 옷의 생생한 느낌을 전달한다.

무엇보다 태양광을 조명으로 쓰기 때문에 색과 화질이 뛰어 났다.

"야외에서 찍는다고? 밖에서? 연예인처럼?"

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었다.

아직 야외촬영이 흔하진 않으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민망하기도 할 것이다.

실은 사진을 찍기만 할 나도 조금 민망했다.

그런데 유나는 아니었다.

"멋진 생각이야! 스튜디오 촬영은 아무래도 믿음이 안 가거든! 직접 옷을 받아보면 느낌이 다를 때도 많아. 하지만 야외 촬영을 하면 손님들의 신뢰가 크게 증가할거야!"

머리가 좋은 건지, 시대를 앞선 건지.

의욕 넘치는 유나는 야외 촬영의 필요성을 곧바로 이해했다.

물론 나중에는 스튜디오 촬영도 같이하고 정식 조명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작이니까.

상품 촬영용 조명만 구매했다.

* * *

쇼핑몰 디자인도 야외 촬영 컨셉에 맞춰서 준비했다.

내가 쇼핑몰 디자인을 판매하니까 얼마든지 가장 비싼 디자인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조건 비싼 게 좋은 게 아니었다.

"야외 촬영을 하면 사진이 화려해지거든. 그래서 쇼핑몰은 무난하고 깨끗한 게 좋아."

"응, 동의해. 대신 폰트랑 로고는 최대한 산뜻하게 가자."

그렇게 뚝딱.

우리의 사이트도 완성되었다.

남들이 했으면 몇 백은 들었을 디자인.

우린 그만큼 돈을 아꼈다.

유나는 옷 전문.

나는 쇼핑몰 전문.

두 전문가가 만났더니 일이 척척 진행되었다.

* * *

드디어 첫 상품 촬영.

아직은 상품이 적으니까.

옷 가방 한 개에 청바지 몇 벌을 담고, 코디는 유나가 입던 옷으로 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금방 적응했다.

유나는 거리에서도 사람들 신경 쓰지 않고 포즈를 취했다.

처음엔 학교 근처.

나중엔 홍대 등등.

나는 유나의 자연스런 모습들을 촬영했다.

물론 민망하고 힘든 부분도 있었다.

홍대에서 촬영할 때였다.

카페 화장실에서 청바지를 갈아입은 유나가 조금 망설였다.

"저...그게..."

"왜 그래?"

"이 청바지는 핏이 예쁜 것 같아."

핏이 예쁜 게 주저할 일인가?

잠시 후, 유나는 체념한 듯 말했다.

"내 다리랑 뒤태를 강조해서 찍어줘."

"아, 난 또 뭐라고. 맡겨만 줘."

너무 자신 있게 대답했는지, 유나가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일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같이 쇼핑몰을 한다면 결국 겪어야 할 과정이었다.

어쨌든 쇼핑몰을 시작하기를 정말 잘 한 것 같았다.

"그만 좀 히죽거려. 엉큼한 아저씨 같아."

종종 유나의 통찰력에 놀랄 때가 있었다.

아무튼 유나의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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