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45화 (45/203)

■ 45. 불효자 □

정신없이 일하긴 했다.

하지만 학교를 가지 않아서인지 슬슬 여유가 생겼다.

회사 일은 재빨리 안정을 찾았다.

그런데 나는 안정이 오히려 불안했다.

'이걸로는 부족해.'

나는 초능력자다.

남들보다 2배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내 초능력이 나를 추궁하는 것 같았다.

[ 과연 이걸로 충분해? 이게 처음에 네가 원하던 거야? ]

나는 대답해야 했다.

나는 더 힘든 상황 속으로 나를 던지고, 악착같이 기어올라야 했다.

물론 나도 언젠가는 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난 더 치열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

* * *

똑딱.

세 시간이 끝나고 [잡생각 제거]에서 풀려났다.

난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어 오피스텔 안을 바라봤다.

유나가 내가 낸 숙제를 다 하고, 웹 서핑을 하고 있었다.

요즘 유나는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오피스텔에 와서 웹 디자인을 배우고 있었다.

나도 바쁘니까 자세히 가르치진 못하고, 내가 문제를 내면 유나가 해결하는 식이었다.

'내가 이렇게 못 가르치는 줄 몰랐지.'

난 독학으로 웹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은 영 소질이 없었다.

다행히 유나가 알아서 잘 배웠다.

굳이 내게 배울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이었다.

"뭐해?"

"네가 만든 사이트들 살펴보며 가격 조사하고 있어."

"가격조사?"

"나비에서 만든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한 쇼핑몰에서는 점팔인데 후기가 다섯 개나 달렸고, 다른 곳은 점칠인데 후기가 하나도 없어."

나비는 동대문 도매 가게의 이름이었다.

점팔은 업계 용어로 도매가격에 1.8을 곱해 소매로 판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서 유나의 말을 해독하면 [같은 옷이 비싸게 파는 쇼핑몰에서 더 잘 팔리고 있다.] 라는 뜻이었다.

인터넷 쇼핑몰은 코디에 따라, 모델에 따라, 신뢰도에 따라 가격과 상관없이 팔리기도 했다.

"가격 조사하는 게 재미있어?"

"응."

유나는 웹 디자인을 열심히 배우긴 했지만, 눈빛이 달랐다.

동대문에서 뛰어다닐 땐 초롱초롱 빛을 뿜었는데 웹 디자인을 배울 땐 눈에 억지로 힘을 주고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유나도 만능은 아니니까.'

실력이 없다기보다는 웹 디자인에 큰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재미없으면 배우지 않아도 괜찮아.]

원래라면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유나와 같이 시간을 보낼 좋은 핑계가 사라진다.

그래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웹 디자인은 왜 배우려는 거야?"

"학교를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니까. 열심히 해서 돈을 모을 거야."

"돈을 모아서 뭐 하게?"

"아, 이건 비밀인데, 그래. 넌 어차피 알게 되겠다."

유나는 조금 뜸을 들였다.

"실은 나도 쇼핑몰을 차려보고 싶어. 웹 디자인을 열심히 배우면 겨울 방학까지 이백만원은 모을 수 있을까?"

이백이라.

유나다운 귀여운 액수였다.

쇼핑몰은 백만원으로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하려면 오프라인 못지않게 돈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유나의 말을 듣자 내 머릿속이 맑아졌다.

'난 일을 더 벌리기를 원하고 있었지.'

만약 유나와 동업으로 쇼핑몰을 만든다면, 둘 다에게 기회일 것이다.

유나는 하고 싶은 일을 도전해보고.

나는 유나의 재능을 이용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네 쇼핑몰 계획을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봐."

"음. 그러니까 쇼핑몰을 차리려면 돈도 필요하지만 알아야 할 것도 많잖아. 세금이나 광고, 포장, 배송 등등. 그래서 반년 정도 돈을 모으면서 틈틈이 그런 것들도 미리 공부해둘 거야."

돈은 내가 투자할 수 있었고, 사이트도 내가 구축할 수 있었다.

세금, 광고, 포장, 배송 등등은 내가 꽤 잘 알고 있었다.

"쇼핑몰은 갑자기 왜 하고 싶은 거야?"

"갑자기가 아니야. 원래 내가 옷을 좋아하니까.

그리고 더 나이 들면 시작할 수 없을 지도 모르니까. 신문에서 봤는데, 쇼핑몰을 운영하는 대학생도 벌써 많대. 걔들이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어."

유나가 다부지게 말했다.

"장사가 항상 재미있지만은 않잖아. 그리고 우린 학교도 바쁘잖아. 자신 있어?"

"해보고 싶어. 네가 회사 만드는 걸 옆에서 보고 있으면 나도 자극받거든. 또 내가 원래, 무엇이든 열심히 달려드는 걸 좋아해."

맞다.

유나도 내 과였다.

우린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웹 에이전시를 해서 잘 알고 있었다.

쉽게 생각하고 쇼핑몰에 도전했다 실패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와 유나라면?'

그런데 유나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다. 싫어. 안 할래."

눈치 빠른 유나가 미리 거절해 버렸다.

유나는 이유를 덧붙였다.

"넌 지금도 잠도 안 자면서 일 하잖아. 곧 2학기도 시작할 테고. 그런데 나까지 끼어 들어서 또 일을 만들 순 없지."

"반대야."

"반대라고?"

"내가 그렇게 바쁘니까 일을 만들어서라도 너랑 보내는 시간을 확보하고 싶은 거야."

내 말을 듣고 유나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 * *

안과 밖 건축 사무소.

직접 방문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큰 회사였다.

스무 명 정도의 직원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건축 사무소답게 회사 건물도 근사했다.

'나도 이만큼 키울 거야. 아니, 더.'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회의실로 안내 받았다.

브리핑을 받는 사람은 안동진 대표, 박주호 이사, 안영우 실장 이렇게 셋이 다였다.

안동진 대표와 박주호 이사는 머리가 새하얀 중후한 노신사였다.

나는 그 셋을 상대로 간단히 내가 구상한 시안에 대해 발표했다.

"이번 시안의 컨셉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안과 밖의 건물들은 이미 훌륭합니다. 그러니 꾸미기 위해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달만 해도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몇 가지 기술적인 부분도 설명했다.

"모니터의 크기는 제각각인데 보통의 사이트는 최적의 해상도를 미리 정해두고 웹사이트를 제작합니다. 하지만 모든 모니터에서 동일한 결과물을 볼 수 있도록...

대부분의 한국의 웹사이트는 탑, 보디, 라이트와 레프트, 구조적으로 짜여 있습니다. 하지만 불필요한 구조를 삭제하고...."

등등 계획을 설명했다.

안동진 대표와 박주호 이사는 나이가 많았지만, 집중해서 내 발표를 들었다.

이윽고 10분의 발표가 끝났다.

간단한 브리핑을 준비하라고 했지만, 사실 실컷 공들인 브리핑이었다.

그만큼 나는 이번 일을 꼭 따내고 싶었다.

안동진 대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군. 스무 살이라고 했나? 그런데 대표라고? 자네 직원이 모두 몇 명이지?"

"프리랜서를 포함해 저 빼고 네 명입니다."

"대단하군. 박이사, 우리가 회사를 처음 만들 때 몇 살이었지?"

"대표님은 스물아홉, 저는 스물일곱이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이 대표만큼 똑똑했었나?"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턱도 없습니다. 우리 둘 다 어리버리 했었죠."

분위기가 좋았다.

"일단 자네가 정한 '있는 그대로'라는 컨셉이 마음에 드네. 나와 박이사는 아마 곧 은퇴할 거야.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건물들을 있는 그대로 담아보겠다고 하니, 그게 고맙게 느껴질 정도야."

"건물들이 훌륭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젊은 친구가 말도 잘 하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박주호 이사가 맞장구 쳤다.

안동진 대표가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렸다.

"자네에게 우리 회사 홈페이지를 맡기겠네. 실무적인 부분은 영우와 의논해주게. 기대하겠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얼굴에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나는 주먹을 꾹 쥐고 맘속으로 환호했다.

이 건은 컸다.

이것 말고도 진행하는 일이 많으니 당분간 원 디자인은 자금 문제는 걱정 없을 것이다.

안영우 실장은 내게 추가로 확언까지 해주었다.

"비용은 생각하지 마시고 최고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주십시오. 저희 업종의 특성상 홈페이지에 최대한 공을 들이려 합니다."

"그러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안과 밖의 홈페이지를 따냈다.

다시 말해, 쇼핑몰을 만들기 위한 넉넉한 총알까지 마련된 것이었다.

* * *

유나와 나는 더 자주 동대문에 가게 되었다.

나는 동대문에 가는 게 늘 힘들었지만, 이젠 달라지기로 했다.

나는 유나와 같이 쇼핑몰을 만들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옷을 배우고 유나를 도와야했다.

그렇게 마음먹었더니 차츰 동대문의 공기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옷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불평도 하지 않게 되었다.

"살 게 없어도 동대문에 자주 나오다 보면 얻는 게 있을 거야."

이젠 내가 유나를 데리고 동대문에 갔다.

물론 유나는 좋아했다.

쇼핑몰을 팔기 때문에 창업자들을 많이 겪어 봤다.

대부분 창업자들은 항상 성급하게 서둘렀다.

그리고 창업한다는 사실에 들떠서 돈을 아끼지 않고, 불필요한 비싼 디자인을 구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나는 들뜨지도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어쩌면 나보다 더 사업가 같아. 이런 쪽으로 타고난 것 같아.'

사업도 예술만큼 재능이 필요한지 몰랐다.

"지금은 7월 한 여름이잖아."

유나가 옷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옷가게를 시작하기에 안 좋은 시기 같아."

"왜?"

"가을 옷이 도매상에 8월부터 풀리잖아. 그런데 인터넷 쇼핑몰은 옷을 촬영해 올리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니까, 지금 여름옷을 시작하면 너무 늦게 될 거야."

인터넷 쇼핑몰과 오프라인 매장은 같은 옷을 팔아도 호흡이 달랐다.

나야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유나가 그런 사실을 발견했다는 게 대견했다.

"그럼 우리가 방학 중에 쇼핑몰을 시작하려면, 처음엔 계절을 타지 않는 상품부터 등록했다가 차츰 가을 상품으로 순차적으로 옮겨야겠네."

"맞아. 똑똑하네, 이주원."

감히 회귀자를 어떻게 보고.

우린 쇼핑몰에 대해 생각만 해보기로 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점점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옷뿐만 아니라 포장 부자재부터 장난감 도매시장까지 우린 꼼꼼히 발로 뛰며 살펴봤다.

하루 종일 일하고, 밤이 되면 유나와 함께 동대문에 갔다가 아침에 돌아와 잠깐 눈 붙이고 다시 일하는 게 나의 일과였다.

역시 노력 상점이 있기에 가능한 일정이었다.

'맞아. 이래야 했어. 이만큼은 바빠야 했어.'

바쁘니까 오히려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앞으로 더 바빠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내심 기대될 정도였다.

* * *

오늘도 똑같은 하루였다.

저녁이 되자 유나는 오피스텔로 와서 내가 일을 마치길 기다렸다.

그런데 유나는 내 소파베드에 앉아서 자기 발을 만지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왜 그래?"

"어제 새 신발을 신고 갔더니."

이런.

한 번 동대문에 가면 대여섯 시간을 예사로 걸었다.

나는 유나가 마냥 동대문을 좋아하는 줄만 알았지, 몸이 힘들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발 이리 줘 봐."

난 유나 앞에 앉아서, 유나의 발을 붙잡았다.

나는 발 마사지는 잘 모른다.

다만 어렸을 때 농구부 친구에게 손 근육 푸는 법을 배운 적은 있었다.

'손이나 발이나 비슷하겠지.'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유나의 발을 안마했다.

정식 안마는 아니고 근육을 문지르고, 뼈 사이를 누르는 정도.

처음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계속 발을 만지다 보니 무척 재밌었다.

'어려서 그런가. 말랑말랑해.'

유나의 발은 작고 희고, 부드러웠다.

나는 아킬레스건부터 발가락까지 꼼꼼히 꾹꾹 눌렀다.

'다른 사람을 이렇게 열심히 안마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불효자가 분명했다.

솔직히 어머니 어깨는 10분만 넘으면 지루했다.

하지만 유나의 발은 달랐다.

만지면 만질수록 새로운 재미가 솟아났다.

꽤 시간이 지났는지 이젠 내 다리가 저려왔다.

하지만 지금 내 다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난 유나의 왼발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유나의 오른발을 붙잡았다.

그리고 꼼꼼히 안마했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잠시 후.

오른발을 내려놓고, 다시 처음부터 왼발을 시작하려 할 때 유나가 말했다.

"됐어. 오늘은 여기까지야."

응?

뭔가 입장이 바뀐 것 같았다.

분명 유나가 발을 아파했고, 내가 안마해준 건데 어감이 조금 이상했다.

아무튼.

"다음에 또 발 아프면 말해. 내가 안마해줄게."

"너 하는 거 봐서."

확실히 입장이 바뀐 것 같았다.

하지만 입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유나를 안마했는데, 신기하게 내 피로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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