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40화 (40/203)

■ 40. 종강 □

찰칵.

스크린에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내가 처음으로 완성한 아그리파 소묘가 떠 있었다.

지금 보니 정말 못 그린 그림이었다.

'미술 학원 원장선생님은 대체 이 그림의 어디를 보고 나를 받아주신 걸까?'

정말 의문이었다.

그림의 달인들인 한국대생들 앞에 이 못생긴 아그리파를 공개하면 무척 창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덜 창피했다.

지난 한 학기동안 내가 많이 당당해진 것 같았다.

"저는 제가 직업 화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림을 그려서 돈을 받고 파는 일이, 제게는 불가능한 아주 대단한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냥 미대에 오고 싶었습니다. 미대에 오면 그림을 실컷 그릴 수 있을 테고, 또 실컷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미대만 가면 되고, 다른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학기가 지났다.

이제야 겨우 조금씩 내가 한국대 서양화과 학생이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것만 생각하고, 졸업 후의 일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졸업하고도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림은 계속 그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게 행복했다.

그래서 남들에게 인정 못 받는 그림이라도 평생 그리고 싶었다.

"그럼 졸업 후 제 인생 계획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찰칵.

그리고 화면에는 감자탕집의 사진이 떠올랐다.

"이 사진은 제 어머니가 일하는 감자탕집입니다. 포항의 가게를 직접 찍은 건 아니고, 그냥 인터넷에 있는 사진을 가져온 것입니다. 다행히 프랜차이즈 감자탕이라서 사진은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발표를 이어갔다.

"더 어렸을 땐, 어머니가 감자탕집에서 일하시는 게 창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힘든 일을 하셔서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제 첫 번째 계획이자 목표는 돈을 많이 벌어서 어머니를 잘 보살펴드리는 것입니다."

늘 마음속에 담아둔 말인데, 입 밖으로 꺼내자 무척 홀가분했다.

원래 나는 이런 발표 과제에서 진심을 다 드러내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과제는 한 번 쯤 솔직하게 해보고 싶었다.

한 학기 동안 애써준 서진석 교수도 있었고, 친해지고 싶은 김태민도 있었고, 나의 마니또인 유나도 있었다.

게다가 치열하게 경쟁해온 남동민도 있었다.

"그리고 제 두 번 째 목표는."

그런데 두 번 째 목표는 좀 많이 창피했다.

하지만 이왕 준비한 과제.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저질렀다.

찰칵.

스크린의 사진이 바뀌었다.

적당한 사진을 구할 수 없어서 아무 예식장 사진이나 퍼 왔다.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고 제 가족을 만들고 싶습니다."

너무 솔직했던 걸까.

발표를 하자 학생들 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서워서 그 쪽은 쳐다보지 않았지만, 분명 유나도 웃은 것 같았다.

그런데 진심이었다.

난 이번 생에 꼭 결혼해서 아이를 갖고 싶었다.

'지난 생에 실컷 해봤으니까 질릴 만도 한데.'

그런데 이번 생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결혼을 하고 싶었다.

지난 생 나는 늘 혼자였다.

그래서 이번 생엔 정말 나를 바쳐서 돌보고 헌신할 수 있는 진짜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더군다나 나는 회귀자였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회귀 초기에는 잠드는 게 무서울 정도였다.

눈을 뜨면 꿈이 깨고, 다시 죽어가는 중년 남자로 돌아가 있을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가족이 생긴다면...'

그럼 이번 생이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어머니.

만약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어머니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를 이해하는 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나의 의무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래서 이번 생엔 결혼을 해서 아이을 갖고 싶었다.

그것도 가능한 많이.

자, 이제 창피한 발표를 어서 마무리 지을 시간.

"저는 그래서 어머니도 보살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해서, 졸업하고 나서는 일을 할 생각입니다. 어떤 일을 할 지는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찾아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서둘러 마무리 하고, 자리로 돌아가려 할 때 번쩍.

누군가 손을 들었다.

제길.

남동민이었다.

'왜 손을 드는 거야. 이렇게 복수하는 건가?'

"네. 말씀하시죠."

"발표 잘 들었습니다. 혹시 원하신다면 제가 일하는 미술학원에 보조 강사로 채용해드릴 수 있는데. 보조부터 시작해서 월급도 차츰 오를테고..."

됐다고.

고맙긴 하지만, 돈은 이미 적지 않게 벌고 있었다.

다만 내가 직접 회사를 운영한다는 사실까지 모두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그리고 얼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얼굴이 아직도 화끈 거렸다.

다음부터 이런 발표는 너무 솔직하게는 하지 않는 걸로, 그렇게 다짐했다.

어쨌든 이렇게 기초 서양화1의 수업이 끝났다.

서진석 교수가 앞에 나와 수업을 마무리했다.

"여러분과 같이 보낸 한 학기동안 정말 즐거웠습니다. 여러분의 첫 유화부터, 장래 계획까지 들어서 여러분들과 부쩍 친해진 기분이 듭니다.

마지막 수업은 상품이 없습니다. 당연하겠지요. 인생 계획에 순위를 매길 수 없으니까. 대신 모두 한 학기 동안 고생했으니 오늘 제가 한 턱 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진석 교수는 진짜 통 크게 쐈다.

1차는 족발집, 2차는 골뱅이와 쭈꾸미.

강사 월급이 많지도 않을 텐데 그림이 잘 팔리는 건지, 아니면 취미로 강사를 하는 건지, 아무튼 화끈하게 쐈다.

술자리가 무르익고, 서진석 교수는 내게 직접 소주도 한 잔 따라 줬다.

"졸업하고, 꼭 직업 작가로 살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가끔이라도 붓만 놓지 않으면 됩니다. 주원씨는 분명 일이든 그림이든 잘 해낼 겁니다.."

그 덤덤한 격려가 내게 꽤 힘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한 학기동안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서진석 교수는 소주를 들이키고는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남동민까지 내 잔에 술을 채웠다.

"우리 학원이 강남에 있어서 출퇴근이 좀 귀찮긴 한데, 그래도 시급도 괜찮고, 또 식사도 제공하고."

됐다고..

그래도 좋게 봐줘서 고맙긴 했다.

남동민과의 다음 학기도 기대되었다.

남동민이 없으면 학교 다니는 재미가 크게 줄 것 같았다.

그리고 유나.

내 목표가 결혼이라고 했을 때, 엄청 놀릴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놀리지는 않았다.

"자, 봐. 나 이제 소주 한 잔, 한 번에 마실 수 있다."

"진짜?"

그리고 유나는 내 앞에서 소주를 원샷하고 인상을 썼다.

"크으..."

짝짝짝.

아직 표정 관리나 술 넘기는 효과음이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대단한 발전이었다.

2학년 수진 선배의 원숙함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꾸준히 노력하면 점점 나아질 것이다.

유나랑 놀고 있는데, 옆에 누가 와서 앉았다.

김태민이었다.

"자, 내 잔도 받아."

"그래, 한 잔 줘."

기초 서양화 수업에 좋았던 것 중 하나는 김태민의 그림을 직접 본 것이었다.

김태민의 그림은 날 더 노력하게 만들었다.

"나도, 나도."

유나도 우리 사이에 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교수님 돈으로 소주잔을 부딪치며 한 학기가 마무리 되었다.

* * *

한 학기가 끝났지만,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 내게는 형원 선배가 내려준 마지막 미션이 남아 있었다.

나는 2학년 작업실 앞에 가서 정화 선배를 불러냈다.

수진 선배가 세트로 따라 나왔다.

"무슨 일이야?"

쿨하게 묻는 정화 선배.

나도 쿨하게 대답했다.

"선배, 팀 수진 다 같이 엠티 가지 않을래요?"

"가자! 가야지. 나 꼭 갈래. 가자. 가고 싶어!"

정화 선배 대신 수진 선배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되어 버렸다.

생각보다 너무 간단했다.

그리고 남은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유나야 당연히 함께 가는 거고.

바로 김태민.

나는 1학년 작업실에서 김태민을 붙잡고 물어봤다.

"태민아. 우리 팀 수진 엠티 가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가자."

"엠티? 그래, 가자. 안 그래도 엠티 궁금했거든. 다행이다. 꼭 갈게. 그런데 나는 뭐 가져가면 돼?"

김태민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별 거 없고, 그냥 아버지 양주 같은 거 가져올 수 있어?"

"몇 병 있을 거야. 한두 병 정도는 모르실 거야."

김태민은 좀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양주가 끌리긴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팀 수진 중에 진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리고 대학생은 그저 소맥이면 충분했다.

"양주는 농담이야. 혹시 부모님 차 잠시 쓸 수 있으면 엠티 가기 전에 마트나 한 번 데려다 줄 수 있어?"

"가능할 거야. 그래, 같이 장 보러 가자."

김태민도 꽤 신난 것 같았다.

* * *

엠티는 간단히 1박 2일, 경기도의 펜션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학기가 끝나면 알바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지방에 내려가는 사람도 있어서 모두 바빴기 때문이다.

"괜찮아. 1박 2일이라도 알차게 보내면 돼."

형원 선배는 주변 환경까지 고려해 펜션을 고르고, 뭘 하고 놀 건지 내용까지 구상했다.

그리고 엠티 전날.

형원 선배는 폭탄주 만들기를 연습했다.

"내가 화려한 테크닉으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띄울 거야."

마지막까지 완벽을 기하는 모습이 역시 한국대 학생다웠다.

형원 선배는 SF 공모전을 마치고, 새 소설을 시작했는데, 정말 글을 쓰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번 엠티에 가장 들뜬 것 같았다.

한철은 소영씨와 함께 내가 맡긴 새 프로젝트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와 태민, 유나, 그리고 팀 수진의 총무인 정화 선배, 거기다 세트로 수진 선배까지 다섯이서 장을 보러 대형 마트에 갔다.

똑똑한 정화 선배는 미리 적어온 메모를 보며 꼭 필요한 것들만 카트에 담았다.

예산은 미리 걷어온 회비.

태민은 충실히 카트를 끌었고, 수진 선배는 정화 선배 눈치를 보면서 하나씩 간식을 추가했다.

엠티는 내일부터지만, 그 전날 이렇게 친구들끼리 장을 보며 웃고 떠드는 것도 무척 재미있었다.

'노는 것도 열심히 놀면 그것도 노력이니까.'

한 학기 동안 바쁘게 살았으니, 이 정도 즐길 권리는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유나와 함께 작은 바구니를 옆에 끼고 신선 식품 코너로 갔다.

"우리 요리 승부를 내야지?"

"기억하고 있었군."

유나가 비장한 어투로 대답했다.

한 학년에 요리의 달인이 둘이나 있을 필요는 없었다.

식당집 딸과 회귀자의 요리 승부.

요리는 식당집 딸인 유나의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

요리는 고독한 긴 인생을 달래주던 얼마 없는 벗이었다.

웬만한 것은 유나에게 양보할 수 있었지만, 요리는 예외였다.

선공은 유나.

"저녁의 소주 안주로 해물탕을 끓여줄게. 신선한 바지락과 미더덕을 듬뿍 넣어서 국물 맛이 특별할 걸?"

"소주 안주로 해물탕이라, 적절한 선택이군. 하지만 해물 손질이 쉽지 않을 텐데?"

유나는 꼼꼼히 생선들을 골랐다.

제주도 출신 더하기 식당집 딸이라 생선과 야채도 신선한 것으로 잘 골랐다.

"그럼 난 다음 날 아침에 카레라이스와 북엇국을 끓여줄게."

"북엇국?"

술을 부르는 해물탕과 다음날 아침의 해장 북엇국.

엠티 음주의 창과 방패의 승부라 할 수 있었다.

북엇국이 젊은 입맛에 좀 밋밋할 수 있지만, 나는 거기에 카레라이스를 더해 약점을 보완했다.

나는 이것저것 카레라이스의 재료를 바구니에 담았다.

내가 고르는 재료가 심상치 않았는지 유나의 긴장이 전해졌다.

내 지난 인생을 녹여내 최고의 카레를 만들 계획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