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39화 (39/203)

■ 39. 계획들 □

그리고 다음 날.

기초 서양화 1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한 학기동안 즐거운 수업이었다.

오늘의 발표는 인생 그림 계획.

강의실의 문이 열리고, 서진석 교수가 들어왔다.

"자, 드디어 기초 서양화1의 마지막 크리틱이 있겠습니다. 인생 계획 발표에 웬 크리틱,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멋진 작품이 바로 우리의 인생 그 자체일 것입니다. 자, 그럼 발표를 시작하시죠."

오늘도 역시 시작은 남동민.

'남동민도 참, 이번 학기 열심히 살았다.'

처음엔 너무 시끄러워서 거부감도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한 학기 내내 꾸준히 일관적이니까, 결국 정이 가기 시작했다.

이제 강의실에 남동민이 없으면 허전할 것 같았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모습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실력은 있으니까.'

남동민은 강남 학원의 전임강사.

1학년 중에, 남동민이랑 실기력을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김태민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유나도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도 강남의 전임 강사를 당장 이기긴 힘들 것이다.

나는 한참 모자라고.

"자, 그럼 남동민씨. 발표를 시작해주시죠."

찰칵.

남동민의 PPT가 스크린에 떴다.

[ 3수 끝에 한국대 입학 ]

"전 26살 늦은 나이에 한국대 신입생이 되었습니다. 한국대 입학부터 제 인생 그림 계획의 첫 단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미술계는 젊은 청년이 화가로 살아가기에 아주 열악합니다.

때문에 한국대는 현실적으로 미술 인생의 훌륭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족과 미술학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대 후, 다시 입시를 시작해 결국 한국대에 들어왔습니다."

찰칵.

[ 대형 학원의 전임 강사]

"그리고 오랜 시간 입시를 준비하며 실력도 늘어서 결국 학원 강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입시 미술을 안 좋게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림을 그리며 돈을 벌 수 있는 괜찮은 직업이니까요. 학생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보람도 무척 큽니다."

찰칵.

[예술과 성공]

"저는 앞으로도 계속 미술학원에서 일할 생각입니다. 한국대라는 간판과 제 실력을 앞세워 나중엔 대형 미술학원의 원장이 될 겁니다.

그리고 건물도 하나 사서, 한 층은 학원으로 쓰고, 또 한 층은 제 작업실로 쓸 겁니다. 미술학원으로 돈도 많이 벌어서 가난한 미술 영재들 장학금도 주고 싶습니다.

또 학원을 운영하며 알게 된 성실한 학생들을 모아 남동민 예술 크루를 만들어 같이 전시도 하며, 영향력 있는 예술가 모임도 만들고 싶습니다."

뭔가 대단하고 거창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남동민은 지금도 나름 잘 하고 있으니까.

발표가 끝나고 나는 진심을 담아 격려의 박수를 쳤다.

그 꿈 변하지 말고 꼭 이루기를.

다만 세상은 젊은 사람들이 꿈을 이루도록 호락호락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쨌든.

"오, 멋있는 계획 잘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입시 미술을 무작정 나쁘게 말하는 것도 옳지 않겠죠. 그리고 어린 나이에 전임 강사로 일하는 것도 대단합니다."

서진석 교수도 남동민을 격려했다.

그리고 몇 명이 질문을 던졌다.

그 중 같이 조별과제를 했던 장현우가 손을 들었다.

"남동민씨는 성실한 인재들을 모아 남동민 크루를 결성하겠다고 하셨는데, 혹시 우리 중에서도 탐나는 인재가 있습니까?"

장현우는 은근 자기를 뽑아주길 기대하는 듯 했다.

남동민은 강남의 전임 강사.

그의 눈은 꽤 정확할 것이다.

나도 조금 궁금했다.

"사실은 두 명 눈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명이나요? 과연 남동민씨의 크루가 되기 위한 자격이 있는 두 분은 누구일까요?"

서진석 교수도 흥미롭다는 듯 끼어들었다.

남동민은 우리 중 하나를 지목했다.

"먼저 김태민씨."

아..

학생들이 일제히 수긍의 탄식을 뱉었다.

김태민의 재능이야 한 학기 동안 강의실의 모두가 봤다.

하지만 김태민은 아버지가 유명 작가, 어머니는 큐레이터.

김태민을 자기 크루에 넣으려면 줄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게 뭐라고.

경쟁에 민감한 한국대 학생의 특성상 모두 초롱초롱 남동민의 입을 주목했다.

"바로 이주원씨입니다."

엥?

이런 황당한 경우가.

남동민은 곧바로 이유를 말했다.

"입시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실력이 탁월해도 말도 잘 못하고, 글도 잘 못 쓰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작가로 성공하려면 손만큼이나 혀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주원씨는 누구보다 말발이 강합니다. 또 무척 성실하고, 드로잉 실력도 탄탄해서 지금보다 더욱 성장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아직 전의 애니메이션이 사진 위에 따라 그린 것이라고 설명을 안 해줬다.

그래서 남동민이 나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다 말발이 강해서라니...'

나는 애써 쓴웃음을 감췄다.

나도 나름 미대생.

그림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게 봐줘서 고맙긴 했다.

분명 남동민도 괜찮은 녀석이지만, 어쨌든 남동민 크루는 사양이다.

"맞습니다. 화가는 그림 실력만큼이나 말도 잘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4년 동안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연습을 하십시오. 분명 크게 보탬이 될 것입니다. 남동민씨, 발표 잘 들었습니다."

서진석 교수의 당부와 함께 남동민의 발표가 끝났다.

그리고 두 번째는 김태민.

이쪽은 언변보다 그림 실력이 월등한 케이스.

그런데 딱히 김태민이 말을 못 한다기 보다는 그림 실력이 너무 뛰어난 것이다.

찰칵.

김태민의 어설픈 피피티가 떴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전 아직 인생 계획을 세울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전 부모님이 주시는 돈으로 편하게 지내왔고, 어려서부터 그림 말고는 다른 걸 제대로 시도한 적도 없습니다.

교수님께서 세상을 잘 모를 때 목표를 정하는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전 몰라도 너무 몰라서..."

찰칵.

그리고 화면에는 군인들의 사진이 떴다.

"일단 충분히 학교생활을 즐길 겁니다. 그리고 군대에 가서 운동을 열심히 할 계획입니다. 얼마 전에 몸이 아주 튼튼한 친구를 봤는데, 무척 듬직해 보였습니다."

설마 한철이?

한철이가 듬직한 맛이 있긴 했다.

"그래서 저도 몸이 건강해지면 세상을 더 진취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제 첫 번째 인생 계획은 '일단 군대에 가서 운동을 많이 하자.'입니다."

뭔가 김태민스러운 계획이었다.

순박하다고 해야 할까.

"군대에서 몸을 만든 이후에는 몇 년 정도 세계를 여행하며, 예술가답게 방탕하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전 그동안 너무 얌전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화가들처럼 압생트도 마셔보고 싶고, 담배도 피워 보고 싶고, 외국 여자들도 많이 만나며 방탕하게 지내보고 싶습니다."

김태민의 발표에 이혜란을 비롯한 몇몇 여학생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김태민의 방탕한 계획을 응원했다.

예술가는 그런 맛도 있어야지.

김태민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서진석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한 계획이군요."

"감사합니다."

팀 수진의 의리상 나는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그런데 방탕한 삶을 살기 전, 2년 동안 착실히 운동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걸 과연 진정한 방탕함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내 질문을 받고 김태민도 애석하단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병역을 해결하기 전에는 장기간 해외여행이 힘들다고 해서..."

김태민은 적어도 병역을 회피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건 확실히 멋있군.'

나야 어차피 공익이라, 군대에 대한 압박이 적었다.

전생에서는 2학년을 마치고 복무했지만, 이번 생은 좀 늦어질지도 모르겠다.

일단 어머니 집을 구해드리고, 힘든 일을 하지 않으셔도 될 만큼 상황을 만들기 전까진 복무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유나와 한철이 같은 마음 맞는 친구들과 가능한 오래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네, 방탕한 계획 잘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부러운 계획이군요. 물론 군대에 관한 부분은 빼고 말입니다. 군대는 한 번으로 충분하죠."

서진석 교수의 정리로 김태민의 발표도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유나의 차례.

궁금했다.

유나의 인생 그림 계획.

유나는 예쁘고, 영리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그런 유나는 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꿈을 꿀까?

정말 알고 싶었다.

유나는 평소처럼 생글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잠깐 컴퓨터를 만진 후.

찰칵.

스크린에 그림이 떠올랐다.

유나는 몇 개의 유명한 그림들을 차례차례 보여줬다.

주로 화가의 아내나 가족을 그린 일상의 그림들이었다.

"전 어머니가 미술 선생님이라, 어려서부터 위인전 대신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화가가 되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찰칵.

그리고 유나의 제주도 집 사진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유나가 몇 번 보여준 적 있어서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 집이 제주도고,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곳에서 행복하게 자랐습니다. 부모님은 자상하고 재미있는 분들이고, 동생들도 저를 잘 따릅니다.

그래서 저는 늘, 제 가족과 집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유나가 자기 가족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단번에 그녀의 바람이 수긍이 갔다.

"제 목표는 대단한 게 아닙니다. 저희 부모님처럼 저도 따뜻한 집과 가족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매일 일상을 그리는 화가가 되는 것입니다.

찰칵.

그리고 스크린에 한 여자의 초상화가 떴다.

유명한 그림이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느.

모딜리아니는 아내인 잔느를 모델로 여러 걸작을 그렸지만, 잔느의 부모는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가난한 모딜리아니는 결핵으로 죽었고, 상심한 잔느는 자살했다.

"하지만 돈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저는 젊고 건강하니까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가족은 제 힘으로 지키고 싶습니다."

찰칵.

[ 1. 웹 디자인 ]

[ 2. 옷가게 ]

[ 3. 식당 ]

스크린에 3개의 단어가 떴다.

"일단 힘들게 들어온 학교니까, 학교는 열심히 다닐 생각입니다. 아직 그림도 많이 배워야 하고요.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면 몇 년 정도 그림이 아닌 일도 해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돈도 모으고, 또 그 경험들이 제 그림을 더 풍성하게 해줄 것 같아서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직업은 저 3가지입니다."

그런데 3가지 중 2가지가 간접적이라도 나와 관련 있는 것 같았다.

최근에 둘이 항상 같이 다녔으니까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꽤 뿌듯했다.

"웹 디자인은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한 번 열심히 배워볼까 생각 중입니다.

옷가게는, 제주도는 원래 옷이 비쌉니다. 그래서 저는 옷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용돈을 모아서, 동생이랑 옷 사러 가는 날이 저희 자매한테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였을 정도입니다. 마침 서울에는 다양한 옷가게가 있으니까, 그래서 옷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유나는 부끄럽다는 듯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발표를 이어갔다.

"식당은 아버지가 식당을 하셔서 제가 잘 아는 분야입니다. 물론 이제 1학년이니, 앞으로도 여러 직업들을 알아볼 생각입니다."

확실히 유나는 다부졌다.

딱 유나스러운 계획이었다.

서진석 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대단한 목표가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건 동의할 수 없군요. 좋은 가족을 만들고, 그들을 그리겠다. 그건 대단한 목표가 맞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목표입니다."

나 역시 동의했다.

나이든 사람들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힘든 목표인지.

하지만 괜찮았다.

'유나라면 충분할 거야.'

유나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유나를 안 지 겨우 한 학기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유나는 늘 믿음이 갔다.

그리고 나도 최선을 다해 도울 생각이다.

웹 디자인이든, 옷가게든.

발표를 마친 유나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

파란만장한 1학년 1학기의 마지막 발표였다.

그런데 내 인생 목표야말로 별 것 없는 시시한 계획이었다.

나는 발표를 위해 앞으로 나갔다.

<모딜리아니, 어깨를 드러낸 잔 에뷔테른,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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