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38화 (38/203)

■ 38. 맘모스 □

일주일간 한철이와 소영씨를 데리고 정신없이 일했다.

원래는 훨씬 더 걸렸을 프로젝트.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 곧 돈인 웹 에이전시.

우리 셋은 정말 치열하게 일했다.

나야 [압축 잠]도 있고, [전신 스트레칭], [바닷가 산책]도 있었지만, 한철이와 소영씨는 정말 미안할 만큼 열심히 했다.

"괜찮아요. 저는 대표님 일하시는 거 보면 오히려 막 힘이 나요. 대표님이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나도 같이 힘을 보태고 싶고..."

하여튼 기분 좋은 직원.

"동감이에요. 저도 주원이 일하는 거 보면, 나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이만큼 노력해도 아직 부족하구나, 많이 반성하거든요."

두 사람이 너무 그러니까 내가 사기꾼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대신 그만큼 뒤에서 더 열심히 일했다.

매일 새벽까지 혼자 남아, 꼼꼼히 회사의 업무를 처리하고, 회사의 상황을 검토했다.

그리고 드디어 완성.

그렇게 우리의 1차 완성물은 꽤 근사하게 나왔다.

'이 정도면 자신 있어.'

세세한 수정은 조금 더 남았겠지만, 우린 분명 천만원 이상의 웹 사이트를 만들어냈다.

이 정도 퀄리티라면, 이 웹사이트가 또 다른 일을 물고 올게 확실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완성한 사이트의 링크를 영화사 마당에 보냈다.

"자, 이제 가시죠."

그리고 오늘은 원 디자인의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한철이와 소영씨를 데리고 학교 후문으로 이동했다.

재택근무 회사의 회식 장소는 대표의 학교 근처였다.

'대표니까 이 정도 특권은 누려도 되잖아?'

큰 프로젝트를 끝내서 그런지 사소한 모든 일들이 뿌듯했다.

그리고 상쾌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내가 가진 힘을 다 쏟고 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쾌했다.

그리고 내일도 똑같이 노력할 테고.

매일 매일 이렇게 열심히 살다보면 십년이나 이십년 후에 나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차곡차곡 쌓이는 나의 하루들이 나를 아주 먼 곳까지 데려다 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우리 셋은 예약한 고깃집에 도착했다.

"한철아, 오늘 실컷 먹어. 그 동안 고생했어."

"그럴게."

"소영씨도요."

"넵. 최선을 다해 먹겠습니다."

* * *

고기집 안에는 먼저 도착한 승희씨와 민성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일어나세요. 어서 앉으세요."

내가 대표이긴 하지만, 일할 때만 대표이고 싶었다.

회식도 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은 그냥 내 소소한 감사의 자리였으면 좋겠다.

특히 승희씨에겐 여러 면에서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회사에 일이 밀려올 때 중심을 잘 잡아준 사람이었고, 승희씨가 들어온 이후 회사에 좋은 일만 있었다.

나는 네 명을 앞에 앉혀 놓고 짧게 말했다.

여기서 길게 말하면 정말 아재 대표가 되는 것이다.

"오늘은 정식 회식은 아니고, 새로 들어온 분들과 간단히 밥이나 먹는 자리로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진짜 회식은 나중에 사무실 생기면 정식으로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두 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소감을 듣고 승희씨가 웃음을 머금었다.

"왜 그러시죠?"

"대표님 진짜 스무 살 맞으세요? 어머님이 출생 신고를 늦게 하셨다거나..."

'젊게 말하려고 노력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어쨌든 우린 정신없이 고기를 먹었다.

승희씨도 무척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아이에게 묶여 지내다가, 이렇게 외출할 핑계가 생기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집에 돌아가기 싫을 정도예요."

나는 아이를 길러본 적은 없지만, 충분히 이해했다.

가끔 어린 아이가 있는 부부랑 식사를 하면 옆에 있는 나까지 진이 빠질 정도였다.

'그렇게 아이를 돌보면서 일은 이렇게 철저하게 해주다니.'

승희씨랑 팀을 이룬 민성환도 승희씨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승희님이 워낙 일을 잘 정리해주셔서 저까지 일하는 속도가 붙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일을 잘 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대표로서 무척 흐뭇했다.

어떻게든 이 팀을 제대로 키워보고 싶었다.

"아, 맞다."

나는 안수정 대표에게 받은 영화 티켓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지금 장안의 화제인 바로 그 영화.

영국 고등학생들의 음악 성장 영화였다.

"와! 이 영화 꼭 보고 싶었는데. 한국에 와 있는 엄마랑 같이 보러 가면 되겠어요. 대표님 고맙습니다! 우리 회사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고작 영화표 두 장에.

교포답게 이소영은 미국인처럼 과장이 심했다.

그래도 좋아하니 나도 흐뭇했다.

하지만 승희씨는 표정이 떨떠름했다.

"아이 맡기고 남편이랑 외출하는 것도 큰일이거든요. 그리고 남편은 액션 영화파고. 이 표는 그냥 시누이나 줘야겠어요."

민성환도 마찬가지.

"저는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 한 장만 주시면 됩니다."

한철이도 마찬가지.

"형원 형이랑 보러 갈까."

사람들이 다 우울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난 같이 갈 사람이 있는데.'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회사의 첫 회식도 마무리되었다.

"대표님, 노래방 가요!"

집에 들어가기 싫은 승희씨가 외쳤다.

승희씨는 놀 때도 열정적이었다.

"대표님, 저도 노래방!"

소영씨도 외치고, 민성환도 기대하는 눈빛.

하지만 밀린 일도 많았고, 아직은 노래방에서 춤추고 노래할 만큼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나대신 한철이를 떠넘기고 먼저 빠져나왔다.

* * *

이른 회식이라 아직 초저녁이었다.

그리고 여름이라 아직 환했다.

학교 후문.

내가 사는 곳에서 먼 곳도 아니었는데, 주위가 무척 새로웠다.

그만큼 지난 몇 달 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 것 같다.

'어, 저긴 뭐지?'

한 빵집에서 밖에까지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냥 흔한 동네 빵집 같은데.'

하지만 일찍 퇴근한 사람들과 시장을 본 아주머니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근처에 명물 빵집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아재 영혼 더하기 시골 출신인 나는 빵집에 줄까지 서서 빵을 산다는 사실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회식 직후.

조금이지만 술도 마신 상태였다.

그래서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지난 생에도 회식은 자주 했었지.'

동료들, 나 같은 아재들은 술에 취하면 언제나 레퍼토리가 똑같았다.

자기 가족 이야기.

'별로 귀엽지도 않은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며 어찌나 자랑해대는지.'

마음에도 없는 맞장구를 쳐주는 것도 한 두 번이었다.

나는 아이들에 대해서 잘 몰랐고, 그들의 가족에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었어.'

아이가 있다는 사실보다 매일 저녁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소속감을 느끼게 해 줄 진짜 가족이 있다는 게 부러웠다.

내게는 퇴근 길에 빵을 사서 안겨줄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없었다.

결혼한 적은 있었지만, 온기는 없는 생활이었다.

'이번 생은 다를 수 있을까.'

꼭 다르기를 바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번호표를 손에 쥐고 빵집 줄의 끝에 서 있었다.

'맛집에 줄 서서 기다리는 거, 정말 이해 못했는데.'

그 이해 못하던 일을 지금 내가 하고 있었다.

줄 서서 기다리며, 빵집 안을 둘러보았다.

난 빵 같은 것 잘 먹지도 않았다.

그런 내 눈에도 빵들이 전부 크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15번 손님."

그게 나였다.

드디어 내 차례.

나는 운 좋게 마지막으로 한 봉지 남은 맘모스 빵을 획득했다.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린 것은 바로 이 가게의 인기 상품인 맘모스 빵이었다.

"어, 벌써 끝난 거예요? 와이프가 꼭 사오라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오늘은 매진되었습니다."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뒤늦게 나타났지만 한 발 늦었다.

빵을 놓치고 아쉬워하는 사람까지 등장하자 나는 두 배로 뿌듯했다.

* * *

"뭐야. 왜 불렀어."

유나는 집에 있었고, 내가 전화를 하자 곧바로 나왔다.

집에서 편히 쉬다 나왔는지, 헐렁한 티셔츠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내가 이상한 건지, 이런 편하고 수수한 모습이 더 좋아 보였다.

"지나가다가 이거 줄려고."

그리고 내가 사온 맘모스 빵을 내밀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맛있어 보이는 빵은 전부 담았더니 커다란 봉지가 넘쳐날 지경이었다.

황당하게 큰 빵 봉투를 보자 유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야. 이걸 어떻게 다 먹으라고."

"다 먹을 수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빵 봉투를 들고 좋아하는 유나를 보자 내 안에 뭔가가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럼 갈게."

"뭐야. 벌써 가게?"

할 일이 많았다.

원디자인 일도 밀려있었고, 내일 발표할 기초 서양화 과제도 끝내지 못했었다.

"그럼 내일 발표 잘 해."

"너도 내일 같이 발표잖아."

유나는 빵 봉투에서 절반을 꺼내 품에 안고, 나머지 빵 봉투는 내게 들려주었다.

"이거 다 먹으면 나 내일 학교 못 가. 반은 네가 먹어. 반도 많다."

그래서 나는 빵 봉투를 들고 기숙사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괜찮은 저녁이었다.

기숙사에 도착하자 형원 선배가 혼자 어두운 방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형, 빵 먹어요."

"웬 빵?"

"오다가 형 생각나서 샀어요."

"역시! 너 밖에 없다! 잘 먹을게! 먹고 힘내서 글 쓰자!"

* * *

김태민은 약속 시간에 맞춰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오늘 만나기로 한 이미연은 뉴욕에 살 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이미연도 어려서부터 미술을 공부했고, 덕분에 김태민의 아버지인 김용철 작가와도 친한 사이였다.

이미연은 뉴욕에서 필름 메이킹과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를 전공했다.

김태민은 먼저 커피를 주문해 마시면서 기다렸다.

"벌써 와 있었네. 바쁘다고 계속 바람맞히더니."

잠시 후 이미연이 와서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무슨 생각하길래 내가 다가와도 몰라?"

"내일 발표 과제요. 아직 시작도 안 해서 큰일이에요."

김태민의 대답에 이미연은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녀가 알던 김태민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고작 발표 과제 따위에 큰일이란 말을 쓰다니.

"무슨 수업인데?"

"기초 서양화요."

"기초? 교수가 누군데?"

"서진석 교수요."

이미연은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 과목이니까, 젊은 화가를 강사로 썼겠지.'

그렇다면 자기가 모르는 게 당연했다.

이미연이 모든 화가를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김태민이 기초 수업을 듣는다는 게 웃겼다.

"학교는 다닐만해? 귀국하기 싫어서 엄청 발악했잖아."

"재밌어요."

"재밌다고?"

김용철 작가는 아들이 한국대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교수를 하며 작가를 하는 그런 안정된 미래를 계획했었다.

하지만 이미연은 김용철 작가의 생각이 너무 낡았다고 생각했다.

김태민은 실력도 있었고, 고등학생 때부터 수상 경력도 화려했다.

김태민 정도면 한국대보다 더 좋은 대학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재밌다고? 그래서 기초 서양화는 뭘 배우는데?"

"콜라주도 하고, 모사도 하고, 아, 웃긴 사진 보여줄게요."

김태민은 핸드폰을 꺼내 이미연에게 시체로 분장한 자신의 사진을 보여줬다.

"이게 너라고? 대체 학교에서 뭘 하는 거야?"

"그림 배우죠."

이미연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한국대 가기 싫어했던 거 아니었어?"

"지금은 좋아요. 교수님도 좋고. 과제도 재미있고. 친구들도 좋아요."

"친구들이 좋다고?"

눈앞의 김태민은 이미연의 기억 속 김태민과 너무 많이 달랐다.

"네. 착하고 재밌고, 뭐든 열심히 하는 녀석들이에요. 되게 웃겨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큰일이라고 해야 하나.

이미연에게 김태민은 손이 많이 가는 천재 고등학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평범한 한국의 대학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다 돌아온 이미연은 야심도 컸고, 나름 김태민에게 책임감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다.

'얘를 대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하는 거야?'

이미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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