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28화 (28/203)

■ 28. 발표 □

드디어 유나와 나의 차례가 되었다.

우린 빔 프로젝터용 스크린을 내리고, 스크린 중앙에 커다란 하얀 캔버스를 세웠다.

그리고 빔 프로젝터가 캔버스를 향하도록 조준했다.

"준비 됐어?"

프로젝터 조준을 마치고 내가 묻자 컴퓨터 앞에 앉은 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나가 영상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치지직.

프로젝터의 영상이 거친 캔버스 면에 맺혔다.

달그락. 우우웅.

그리고 작은 잡음들.

창 밖 자동차의 소리.

유나의 방에서 녹음한 일상의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그 외에도 배경 음악이 흘렀다.

하지만 작은 소리라 그냥 들리기만 하는 정도.

그리고 어느새 영상의 중앙에 유나가 앉아 있었다.

옷의 실루엣.

그리고 손과 얼굴의 외곽선만 대강 따라 그린 간단한 그림이었다.

눈, 코, 입도 없고 당연히 표정도 없었다.

대강 그려진 유나는 잠시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냉장고를 뒤져 아침을 먹고, 물을 끓여 커피를 마셨다.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까지 마쳤다.

그리고 작은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빗고, 거울을 잠시 보고는 가방을 챙겼다.

전부 소품이나 배경은 하나도 그리지 않았고, 오직 유나의 동작만 있었다.

하지만 유나의 동작은 모두 누구에게나 매일 반복되는 일상.

그래서 유나의 동작만으로도 유나가 무얼 하는 중인지 모두의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가방을 든 유나는 신발을 신고 잠시 자신의 작은 방을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유나의 방이 캔버스였다.

밖으로 나간 유나는 캔버스를 벗어나 스크린을 잠시 걷다가 사라졌다.

작은 유나는 말 그대로 틀을 벗어나 걸어 나갔다.

그리고 영상은 처음부터 다시.

앉아 있던 유나는 다시 냉장고를 뒤져 아침을 먹고, 물을 끓여 커피를 마셨다.

영상은 그렇게 무한 반복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작은 음악도 계속 강의실을 흐르고 있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나는 애니메이션이 마음에 들어서 한동안 계속 되풀이해서 이 영상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떨까?'

유나도 나처럼 조심스런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강의실의 학생들은 모두 숨을 죽여 빤히 영상을 보고 있었다.

"흐음. 흠."

그리고 헛기침 소리와 함께 서진석 교수가 입을 열었다.

"영상이 계속 반복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렇군요. 계속 볼 수도 있겠지만, 수업을 진행해야 하니 여기서 그만하겠습니다. 영상은 그냥 둬도 될 것 같군요. 개인적으로도 잘 봤습니다. 애니메이션이라, 짧은 시간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이 많았습니다."

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캔버스 옆에 섰다.

유나 옆에서 작은 유나가 일상을 계속 반복하는 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유나가 우리의 작품을 설명했다.

"처음엔 단순한 발상으로 시작했습니다. 멈춰있는 그림의 틀에서 벗어나 그림을 움직이게 해보는 건 어떨까."

물론 즉석 떡볶이를 먹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린 부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유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일부러 소품들을 과감히 생략했습니다. 사물들은 모두 소거해서, 일상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려는 시도였습니다."

사실 소품들을 다 그리지 않은 것은 그리기 힘들어서 그런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유나가 그럴싸하게 잘 포장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조차 아름다울 수 있고 또 의미를 둘 수 있다는 점을 조명해 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내용적인 면에서도 어떤 특별한 한순간이 아니라, 지나가는 장면들을 담았다는 것에서 이것 역시 틀에서 벗어나기의 한 종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서진석 교수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큰 동작으로 끄덕이는 걸 봐서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잘 설명하셨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작품 전체에 생산적인 여백이 많아서 바라보는 이의 경험이나 기억이 투영될 여지가 많다는 점이 이 작품의 큰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서진석 교수는 그렇게 자기의 의견도 덧붙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손을 들고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혜란이 손을 들었다.

"저는 작품 속 인물의 얼굴을 그리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또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나요?"

'그야 표정까지 그리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유나는 생글거리며 다른 대답을 했다.

"저희의 목적은 가능한 객관적으로 일상을 담는 것이니까요. 만약 세세한 표정과 기분까지 그렸다면 관객들은 작품 속 감정에 동화되어 자신의 기억이나 경험을 떠올리는 것에 방해받았을 것입니다."

역시 유나.

유나도 따지고 보면 꽤 뻔뻔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한마디 더.

유나는 생글거리면서 덧붙였다.

"교수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생산적인 여백이라는 말이 얼굴을 지운 이유를 단적으로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은근슬쩍 교수 띄우기까지.

스무 살 유나는 능숙하게 발표를 이끌었다.

그리고 김태민이 손을 들었다.

"네, 말씀하시죠."

김태민은 조용조용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의견을 말했다.

"저 역시 무척 재미있게 봤습니다. 저는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콜라주를 작업했었는데요.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주제에 부합하기 위해 너무 애쓴 느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의 작품은 무척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즐거운 방식으로도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애니메이션 속 실루엣이 무척 익숙한데 혹시 본인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유나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더 생동감 있고 아름다운 작품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멋진 작품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나는 활짝 웃으며 김태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자식이...'

김태민.

그림만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은근슬쩍 유나의 미모를 칭찬하다니, 생각보다 훨씬 고단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계속 손을 들고 작품을 칭찬하거나 의견을 덧붙였다.

유나는 알아서 잘 진행했고, 반응은 좋았다.

지난 3주간의 노력이 좋게 평가받는 것 같아 무척 흐뭇했다.

그런데 나를 노려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있었다.

바로 남동민.

오늘의 남동민은 평소와는 달랐다.

생각나는 말을 곧바로 쏘지 않고, 머릿속으로 논리를 점검하고 있었다.

나를 노리는 결정적인 한 방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와라. 상대해 주마.'

드디어 한참 조용했던 남동민이 묵직하게 손을 들었다.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교수와 학생들까지 모두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네, 남동민씨 말씀하시죠."

남동민은 한 번 더 각오를 다진 후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리의 과제는 틀에서 벗어나기였습니다."

"그렇죠."

"저희가 만든 소조가 조각가 입장에선 평범한 소조가 아니냐고 말씀하셨죠? 그럼 두 분의 작품은 어떻습니까? 애니메이터 입장에서는 그냥 평범한 애니메이션이 아닐까요?"

나는 씨익 웃었다.

"애니메이터 입장을 제가 왜 생각합니까?"

"네?"

"그냥 제가 만들고 싶어서 만든 애니메이션인데, 뭐 하러 제가 남의 견해까지 생각해야 하죠?"

"예?"

남동민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그런데 왜 나한테는 우리 작품을...조각가 입장에서..."

"그건 그냥 남동민씨의 생각을 여쭤본 것뿐입니다. 저희 작품에 대한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냥 제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뿐이지 굳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나...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그..그...."

남동민의 얼굴이 억울함으로 일그러졌다.

그때 유나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저는 우리 작품이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전문 애니메이터의 눈에는 미숙하고 어설퍼 보이겠죠. 하지만 일상이라는 주제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런 어설픔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일상을 굳이 공을 들여 묘사하는 것은 오히려 과할 지도 모르고, 그래서 스쳐지나가는 일상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애니메이터들의 머릿속을 정확히 알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저는 자신 있습니다. 그분들도 우리 작품을 재미있어 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서진석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어떻습니까? 남동민씨,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까?"

서진석 교수의 확인은 마치 계속 싸움을 붙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 뻔뻔한 대답에 남동민은 머릿속이 뒤엉킨 것 같았다.

그래도 남동민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다시 반격했다.

"영상작업은 보이는 것 뿐 아니라 소리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배경음악의 소리가 너무 작아서 거슬리기만 하고,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사운드는 서툴러서 대충 작업하셨습니까?"

"그렇군요. 사실 저희는 영상을 돋보이게 하려고 음악을 넣은 게 아닙니다. 일상에 늘 함께 하는 미묘한 잡음을 넣어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일상의 소리만 넣어 보았는데, 그랬더니 오히려 어색하게 소리가 겉도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악과 함께 섞어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말씀하신 지적이 정확히 저희가 원한 것입니다. 신경은 쓰이지만, 실체는 알 수 없는 것. 그렇게 느끼셨다면 저희가 제대로 작업했네요."

"그...그랬군요..그...그리고!"

두 번이나 공격이 막히자 남동민은 이제 필사적이었다.

그는 두뇌를 가속시켜 어떻게든 말할 거리를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요?"

"그리고..."

더 이상 질문이 생각나지 않는지 남동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두...두 분의 드로잉 실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미술학원 강사의 입장에서 이 작품을 볼 때, 등장인물의 동세나 자세에 따른 신체 비율, 움직임의 표현 모두가 아주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으로 모든 장면을 이렇게 정확하게 그린 것을 보고 솔직히 놀랐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그...그 부분은 확실히 칭찬해 드리고 싶습니다. 드로잉만큼은 흠 잡을 곳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뜻밖에 공격이 아니라 칭찬이었다.

'아...남동민은 모르는구나.'

이 작품은 동영상으로 먼저 촬영하고 그 위에 레이어를 얹어 그렸으니 모든 장면의 인체 드로잉이 정확할 수밖에 없었다.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수업 시간이 끝나가는 중이니 나중에 따로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남동민을 향해 싱긋 웃어줬다.

"칭찬 감사합니다."

나의 상냥한 인사까지 듣고 남동민은 무력하게 자리에 앉았다.

발표는 우리가 하는 중인데, 남동민이 더 피곤해 보였다.

남동민이 자리에 앉고 나자, 서진석 교수가 한 마디 더 칭찬했다.

"저도 아주 즐겁게 봤습니다. 이번 조별과제로 애니메이션까지 등장할 줄은 몰랐습니다. 과제를 이렇게 열심히 해줘서 무척 고맙습니다. 그리고 안에 담긴 내용도 무척 인상적이어서 저 역시 넋 놓고 감상했습니다. 두 분,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발표와 함께 오늘의 크리틱도 마무리 되었다.

서진석 교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교탁을 잡고 섰다.

"역시 이번 1학년은 저를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오늘도 무척 인상 깊고 즐거운 수업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1주일 동안 밤 새워 고민해서, 다음엔 더욱 새로운 과제를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교수님 이제 밤은 그만 새셔도 됩니다.

저는 한 번 쯤 평범한 1학년의 수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의 소리는 서진석 교수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1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어쩌면 만장일치가 아닐까요? 그리고 이분, 1위를 주지 않으면 저까지 공격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크리틱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은 평생 물어뜯고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크리틱은 그런 싸움을 훈련하는 수업이고요.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가져오신, 그리고 다른 학생의 작품 평가에도 적극적으로 임해주신 이주원, 한유나 조가 오늘의 1위입니다. 두 사람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3주 짜리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이 떠난 강의실.

"해냈다! 1등이다!"

유나는 30호 캔버스를 끌어안고 신나서 소리쳤다.

쉽지 않은 과제였지만, 좋아하는 유나를 보자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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