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오늘은 내가 파이터 □
서진석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왔다.
그리고 빙그레.
지난 3주 동안 조별과제를 가장 즐긴 사람은 바로 서진석 교수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조금...'
몸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나야 뭐, 순수하게 노력 자체를 즐기는 남자니까.
'아마 혜란이도?'
김태민과 한 조가 되어 과제를 진행한 혜란도 꽤 즐거웠을 것이다.
어쩌면 조별과제가 모두에게 미움 받은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자, 저는 이번 크리틱을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번의 크리틱처럼 좋은 모습을 보여 달라고, 오늘도 상품을 준비했습니다."
서진석 교수가 가져온 것은 30호짜리 캔버스 두 개.
단순히 가격만으로는 이제까지 걸린 상품 중 최고일 것이다.
"오늘의 상품은 제가 직접 젯소까지 발라온 따끈따끈한 캔버스입니다. 과연 오늘의 1등은 누가 될 것인가."
서진석 교수는 자신의 과제에 심취해 외쳤다.
이제 신사적인 이미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흥미진진한 크리틱이 시작되었다.
"자, 그럼 어느 분부터..."
번쩍.
손을 든 사람은 남동민이 아니었다.
'뜻밖이네.'
오늘은 김태민과 이혜란의 조가 먼저 시작이었다.
* * *
그들이 내건 작품은 콜라주였다.
콜라주란 종이나 사진, 헝겊 등을 붙여서 만든 그림을 뜻한다.
'뭔가 아리송한데...'
좀 허전해보이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김태민이 조용한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했다.
"저희는 틀에서 벗어나기에서 '틀'을 광범위하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입시 미술을 배우고, 그림을 배우면서 저는 항상 '잘' 그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닮게 그리려 고민하고, 보기 좋게 색칠하고, 또 좋은 메시지를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지로부터 벗어나보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품의 의도는 나름 괜찮은 것 같았다.
김태민이 여기까지 말하고, 그 다음은 사이좋게 이혜란이 이어갔다.
"그래서 저희는 콜라주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평범하게 콜라주를 만들면 태민이의 말대로 자꾸 근사한 모양을 만들려고 애쓰게 되니까, 서로가 만든 모양을 흩어버리고, 조각들을 서로 뺏어가면서 서로의 의지를 방해하면서, 함께 이 콜라주를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완성된 콜라주는 추상화 같았다.
모양도 어설프고 색도 조화롭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작품의 의도라니, 난해한 현대 미술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오히려 아주 세련된 것일 수도.'
서진석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관습적이고 맹목적인 선입견을 걷어낼수록 더 자유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겠지요. 흥미로운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손을 들어가며 질문 반, 칭찬 반을 이어갔다.
나 역시 즐겁게 그들의 작품을 감상했다.
'내 입장에서는 김태민이 제일 그림을 잘 그리는 녀석인데. 저 녀석이 저런 고민을 하다니.'
어쩌면 김태민은 보면 볼수록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 같았다.
'아무튼 이제 워밍업은 여기까지.'
오늘은 나도 한 번 제대로 붙어볼 생각이었다.
* * *
드디어 남동민의 차례가 되었다.
그리고 끙끙.
남동민과 그의 4수생 동료 장현우는 여러 종류의 철사를 꼬아 만든 커다란 소조 작품을 가져왔다.
'대단하네.'
크기도 제법 커서 보자마자 감탄이 나왔다.
철사로 만든 남자는 의자에 앉아 있는 모양이었고, 오른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앞으로 팔을 뻗는 모양이었다.
'아하, 그림을 그리는 자세였군.'
그럭저럭 잘 만들어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많은 철사가 들어가서 작품은 꽤 무거워보였다.
'제법 고생했겠군. 돈도 많이 들었겠다.'
미대 과제는 작정하고 만들면 역시 돈이 깨지기 마련이었다.
'어디 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미대생의 과제란 때로는 비싼 쓰레기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철사 소조라...'
나름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설명을 듣기 전에도 벌써 그럴싸해 보였다.
그리고 남동민이 발표를 시작했다.
"저희는 화가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체를 만들었습니다. 평소의 저희는 항상 그릴 것을 결정하고, 그것을 캔버스에 그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입체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그림은 2차원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다채로운 색의 세계입니다.
회색 철사를 꼬아 사람의 모양을 만들면서, 만약 내가 그리던 그림이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본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서진석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음, 그렇군요. 고생 많았습니다. 이번 작품 역시 성실히 준비했군요. 좋습니다. 그럼 의견이나 질문 있는 분은 손을 들고 말씀해주십시오."
흠...
나는 원래 발표에는 소극적이었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스타일.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이라 그렇기도 했고, 또 다른 이유들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컨셉을 바꿔볼 생각이었다.
'일단 오늘은 조별과제야.'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뭔가 용기와 의욕을 불러왔다.
그리고 유나.
'1등을 꼭 해보고 싶었단 말이지...'
전에 찍은 사진은 삭제하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조금 빚을 진 기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나에게 소소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30호 캔버스라면 적당해 보이는군.'
나는 그렇게 각오를 다졌다.
거기다 남동민.
'이제까지 크리틱에서 신세진 것도 많으니까...'
남동민이라면 화끈하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생들이 남동민과 장현우를 향해 그저 그런 질문을 하는 사이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네, 이주원씨 말씀하시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이번 과제의 주제는 틀에서 벗어나기입니다."
"네. 그렇죠."
남동민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우리는 서양화과 학생이고, 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입체 작품은 틀을 벗어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조소과 학생이나 혹은 제 3의 관객들에게는 어떨까요? 그냥 흔하디흔한 평범한 소조 작품이 아닐까요? 그들의 입장에서라면, 과연 이 작품이 온전히 틀에서 벗어났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그..그건..."
나의 갑작스런 공격에 장현우가 머뭇거렸다.
그리고 장현우가 시간을 끄는 사이 생각을 정리한 남동민이 재빨리 답변했다.
"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자세를 통해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이 화가라는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화가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만약 순수한 조각가가 그림 그리는 남자의 모습을 만든다면, 그 조각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을 암시하게 되는 겁니까?"
"그..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관객들이 작가가 화가라는 걸 미리 알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작품의 의도를 유추하다보면, 결국 틀에서 벗어나기란 주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객은 공부도 하고, 유추도 해야 한다는 말이군요. 다시 말해 작품이 불완전한 책임을 관객에게 떠넘기려는 겁니까?"
"그...그게...그..그게 아니라...저희는 서양화과니까..."
"혹시 작품 제목 아래, 서양화과 학생이 만든 입체 작품이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이렇게 상세 설명을 적어두실 건가요?"
"아니...그렇게 까지는..."
나의 예상 못한 잔인한 공격에 결국 남동민은 말문이 막혔다.
일단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게 내 원래 모습일 지도.'
나는 두 번의 생을 겪은 사람.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동민은 그나마 나은 상태였다.
장현우는 거의 울상을 짓고 원망을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인걸.'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크리틱은 원래 공격하면서 점수를 따는 수업.
더 달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작품을 계속 관찰하다보니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앞으로 들고 있는 한쪽 팔에는 철사로 근육이 묘사되어 있는데, 나머지 한쪽 팔은 양감만 잡혀 있군요. 두 팔의 표현 방식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남동민이 더듬더듬 다시 대답을 시작했다.
"예. 그게...아무래도 두 사람이 함께 만들다보니,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철사의 특성상 수정이 쉽지 않아서, 근육이 있는 팔은 강조하듯 앞으로 내세우고, 근육이 없는 팔은 슬며시 뒤로 내려서 배경의 역할을 맡겼습니다. 그게 오히려 이 작품의 재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리틱 수업에서 학생들이 치열하게 싸우면 교수는 흐뭇한 법이었다.
서진석 교수는 웃음을 가득 머금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떻습니까, 이주원씨. 충분한 답변이 되었습니까?"
"아니요. 전혀."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리고 남동민과 작품을 함께 노려보며 공격을 이어갔다.
"입체가 회화와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입체는 모든 방향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입체는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지요.
물론 소조를 제작하면서도 신체의 특정 부위에 강조점을 둘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안일한 방식으로 한쪽 팔을 감춰서 배경으로 만드는 것은 전형적인 평면 회화의 수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틀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하고, 입체와 회화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그렇군요. 확실히 조각이나 소조에 있어서 평면성의 거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남동민씨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동민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그게 저희가 좀 안일했었다고 볼 수도 있는 그런 측면이 있었지는 않나,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동민은 결국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패배를 인정했다.
"예, 남동민씨, 장현우씨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주원씨, 날카로운 지적 아주 훌륭했습니다."
결국 자신만만하던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우울하게 퇴장했다.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세상이 다 그런 것.
크리틱은 원래 이렇게 서로를 비난하며 성장하는 수업이었다.
유나가 나를 향해 생글거리며 웃었다.
칭찬 반 걱정 반의 표정이었다.
'너, 우리 작품 땐 뒷감당은 어떡하려고?'
그런데 난 자신 있었다.
둘이서 열심히 만든 작품이기도 했고, 또 공격이 들어오면 맞받아 싸우면 될 테니까.
게다가 내가 막혀도 유나가 든든하게 백업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