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과제의 달인 □
보글보글.
떡볶이가 좋은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음..."
하지만 유나와 나는 심각했다.
'틀에서 벗어나기'
우린 며칠이나 조별과제에 대해 의논했지만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아마, 너무 잘하고 싶어서겠지.'
우린 이제까지 서로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보았지만, 전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망설이고만 있는 것은 나나 유나답지 않았다.
남동민이나 김태민 조는 이미 과제를 시작했다.
"이제 드셔도 돼요."
그때,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끓고 있는 떡볶이의 불을 낮춰주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드르륵.
나는 떡볶이의 불을 높였다.
보글보글.
떡볶이가 다시 끓기 시작했다.
"너무 끓이면 국물이 다 쫄 거야."
유나가 다시 버너의 불을 낮췄다.
그러자 끓어오르던 국물이 잠잠해졌다.
드르륵.
나는 다시 떡볶이의 불을 높였다.
보글보글.
생각이 조금씩 더 또렷해졌다.
"너 왜 그래?"
"유나야. 내가 예전에 금붕어 그릴 때 했던 말 기억나?"
"무슨 말?"
"그림 안에 사물이 고정되어 있다고 했잖아."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억나."
"그리고 내가 1등을 했었지. 잘 봐."
나는 떡볶이의 불을 완전히 꺼버렸다.
떡볶이는 고요했다.
"이게 단단히 고정된 그림이야. 그리고..."
드르륵.
나는 다시 떡볶이의 불을 켰다.
그러자 멈춰있던 떡볶이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국물이 끓자, 안의 어묵들이 들썩였다.
"이건 움직이는 그림이야."
몇 걸음 떨어져서 서빙 아주머니가 쟤들 뭐하나 쳐다보고 있었다.
"그림을 움직이게 하자고? 애니메이션처럼?"
유나가 물었다.
그리고 유나는 입을 다물고 다시 이것저것 머릿속으로 따져봤다.
"하지만 어렵지 않을까?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만드는 건지도 잘 모르고, 일도 아주 많을 거야."
난 전생에 디자인과 학생이었다.
영상을 다루는 프로그램들을 어느 정도는 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디자인과 학생들의 소소한 요령들도 꽤 알고 있었다.
"색을 쓰지 않고, 대상을 적절히 잘 선택하면 간단한 애니메이션은 어렵지 않아. 손이 많이 가긴 하겠지만 둘이서 하면 시간 안에 맞출 수 있을 거야."
"그래?"
유나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나는 유나에게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했다.
유나는 내 설명을 듣고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되겠다. 그걸로 하자. 그림은 그림인데 움직이는 그림이니까 확실히 틀에서 벗어나는 거야."
"좋아. 그럼 이제 뭘 그릴 지를 정하자."
우린 다시 이것저것 생각하며 머리를 굴렸다.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서 재미있는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참신한 소재를 찾아야했다.
"주원아."
"응?"
"사진의 이해 말이야. 교수님이 어떤 분이셔?"
"김진기 교수? 뉴욕에서 공부했대. 그리고 돈 많은 친구가 있는데 그 사람은 방송을 공부했고, 얼마 전에 귀국했대."
"사진의 이해 교수님도 서진석 교수님처럼 밤을 새워서 과제를 고민했을까?"
나는 곧 유나의 생각을 알아챘다.
그리고 동의의 뜻으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일상의 발견'
흔하지만 괜찮은 소재였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그림도 괜찮고, 주제도 잘 살 것 같았다.
'과제 돌려막기.'
과제가 정말 넘쳐나면 하나의 과제를 가지고 여러 과목을 때우는 것을 말했다.
다른 전공도 마찬가지겠지만, 미대의 고학년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소재 돌려막기.'
이건 괜찮은 것 같았다.
더군다나 '일상'이라는 소재는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해서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주제였다.
흔한 일상을 애니메이션으로 그린다?
작품이 될 것 같았다.
"그래, 그걸로 하자."
"그래. 이제 결정 된 거야."
모처럼 성공적으로 회의를 마친 우리는 기분 좋게 즉석 떡볶이까지 해치웠다.
* * *
내가 유나에게 설명한 간단한 애니메이션의 요령은 이랬다.
1. 먼저 움직이는 대상을 동영상으로 촬영한다.
2. 동영상을 정해진 시간 간격으로 자동으로 캡쳐한다.
3. 캡쳐한 사진 위에 레이어를 씌우고, 사진을 따라서 간략하게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림들을 이어서 재생하면 어렵지 않게 애니메이션이 완성된다.
물론 어렵지 않다는 말은 주관적이었다.
캠코더는 서양화과 과사무소에서 대여했다.
매번 과제에 필요한 장비를 학생들이 구입할 수 없으니까, 과사무소에서는 필요한 장비들을 빌려주고 있었다.
나는 캠코더 가방을 메고 유나의 자취방 앞에 도착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유나는 부지런히 방을 치우고 있었다.
"치울 게 많아?"
"아니야. 난 평소에도 청소 잘 해!"
잠시 후, 나는 적당히 치워진 유나의 방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받았다.
여학생의 방에 와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단순히 과제를 위한 방문이긴 했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내 방이야?"
"네 일상의 발견이니까?"
우린 벌써 회의를 끝마쳤지만, 유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일단 내 일상은 기숙사 배경인데 여학생 출입 금지잖아."
"내 방도 남학생 출입 금지야."
"그리고 내 일상은 찍을 게 없어. 눈뜨고 세수하고 과제하고 그게 다야. 남학생의 일상은 예술적으로 엿 볼 가치가 없어."
"내 삶은 예술적으로 엿 볼 가치가 있고?"
"그리고 실루엣이 달라. 간략하게 그렸을 때, 내 실루엣은 평범한 남학생의 실루엣이지만 네 실루엣은 누가 봐도 제법 근사한..."
"됐거든."
결국 어쩔 수 없이 유나도 동의해야 했다.
우린 유나의 일상을 바탕으로 촬영할 각본을 짰다.
각본이라고 대단한 것은 아니고, 동선 등을 고려해 동작을 의논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
"분명 틈이 보이면 동민이 형이 공격할 거야. 그것도 미리 대비해서 각본을 짜야 해."
그렇게 각본이 완성되었다.
각본을 따라 유나는 자신의 방에서 자신의 일상을 연기했다.
나는 캠코더로 그런 유나를 촬영했다.
조악하긴 했지만 필요한 사운드도 같이 녹음했다.
우린 중간 중간 찍은 영상을 돌려보며 확인했다.
"진짜 괜찮을 것 같은데."
"정말?"
장난처럼 말하긴 했지만, 유나는 정말 실루엣이 예뻤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으로 그리면 꽤 근사한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우린 꼼꼼히 공을 들여 촬영했다.
'그런데 이거 좀 묘한데.'
촬영을 핑계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캠코더 렌즈로 마음껏 유나를 관찰했다.
늘 같이 지냈지만, 이렇게 빤히 그녀를 들여다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우린 동영상 촬영까지 착착 진행했다.
조별 과제는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 * *
깊은 밤.
서양화과 1학년 작업실.
유나와 나는 학과 사무소에서 빌린 타블렛으로 한 장, 한 장 유나의 실루엣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짧은 애니메이션이지만 그려야 할 양이 꽤 많았다.
그런데 나는 과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난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똑똑.
"들어가도 돼?"
한철이었다.
한철이 노트북을 가지고 미대 작업실에 찾아 온 것이었다.
"어, 유나와 나뿐이야."
한철과 나는 우리가 함께 만든 사이트가 문제없이 돌아가는 지 세심하게 확인했다.
처음부터 복잡한 사이트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철은 자신이 말한 대로 솜씨가 괜찮았다.
'첫 협업에서 이렇게 만족하기가 쉽지 않은데.'
한철은 훌륭했다.
플래시 게임도 완벽하게 작동했고, 이벤트용 데이터베이스도 정확하게 연동되었다.
'형원 선배한테 이상한 쪽으로 물 들지만 않았으면 누가 봐도 완벽한 한국대 컴공인데...'
우리가 의도한 대로 크리스털 시네마의 홈페이지는 깔끔하게 완성되었다.
"수고했어. 내일 날 밝으면 그 쪽에 통보하면 되겠다."
이렇게 또 한 건 뚝딱.
그런데 유나가 나와 한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뭔가 멋있는 것 같아."
한철의 얼굴이 급 환해졌다.
"그래? 진짜? 막 친구를 소개해주고 싶을 만큼?"
'원래 여자들은 남자들이 일하는 모습에 끌린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유나가 나를 칭찬하는 일은 아주 드물어서 나도 꽤 뿌듯했다.
그리고 유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 역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웹디자인 나도 가르쳐주면 안 돼?"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유나라면 금방 배울 것 같았다.
유나에게 괜찮은 아르바이트이기도 했고, 근처에 디자이너가 한 명 더 있어서 나도 나쁠 것 없었다.
'한철이만 봐도 엄청 편했으니까.'
"방학하면 가르쳐 줄게."
"약속한 거야."
일은 다 끝났지만, 한철은 작업실을 꼼꼼히 구경하며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랄까, 그림을 구경한다기보다는 학생들의 체취를 흡입하는 것 같았다.
'하긴 나도 그랬던 적이 있지.'
작업실은 미대생들에겐 고통과 피곤의 장소지만, 다른 과 학생들에겐 신비롭고 근사하게 보일 것이다.
"됐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한철아."
"왜 나를 보내려고 해. 그런데 유나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역시 디자인보다는 프로그램을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그냥 내일부터 바로 가르쳐줄 수 있는데."
"그러게. 프로그램 쪽이 더 멋있어 보인다."
"가라니까. 어서, 가."
그렇게 한철이를 억지로 돌려보냈다.
왠지 앞으로도 일을 핑계로 자주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 * *
요령을 부려서 많이 간단해지긴 했지만 애니메이션 제작은 역시 일이 많았다.
우린 매일 새벽까지 함께 작업해왔고, 드디어 유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미안. 나 한 시간만 자고 할게."
유나는 작업실 구석의 낡은 소파에 누워서 냄새나는 담요를 얼굴까지 덮었다.
그리고 눕자마자 곧 잠든 숨소리가 들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해 볼까.'
난 잠든 유나에게 다가가 머리맡의 전화기를 주웠다.
그리고 한 시간 후의 알람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나의 노력 상점.
[ 잡생각 제거 ]
[ 숲 속 산책 ]
[ 전신 스트레칭 ]
오랜만에 풀 아이템으로 구비했다.
'난 어쩌면 단순 노동에 최적화된 인간이 아닐까.'
유나와 함께 작업해서 좋은 점도 있었지만, 역시 효율 면에서는 혼자가 훨씬 좋았다.
그리고 미친 속도로 일을 해치웠다.
그동안 유나는 아주 편하게 푹 잘 잤다.
3시간 종료.
난 꿈에서 깨듯 [잡생각 제거] 모드에서 풀려났다.
'유나에게 미안하지만...'
나 혼자 하는 편이 훨씬 빠른 것 같았다.
그리고 유나를 깨우러 갔다.
유나는 여전히 쿨쿨 아주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런 거였나?'
문득 사진의 이해 김진기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 일상을 기다리세요. 그러다 지금 겪고 있는 장면이 새롭게 보이는 순간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
찰칵.
나는 사진기를 들고 잠든 유나를 찍었다.
유나는 원래 예뻤다.
그런데 잠든 모습은 더 앳되고 연약해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 유나를 재우고 내가 대신 일했다는 뿌듯함까지 더해져서 지금 이 순간이 새롭게 느껴졌다.
'일상의 발견이라...'
그런데 이건 과제로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이걸 제출했다가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이유에는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씩 진짜 미대생이 되는 기분이야. 아...나 미대생 맞지.'
그렇게 우린 '틀에서 벗어나기'과제도 완성했다.
그리고 또 결전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