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과제의 폭풍 □
"난 평생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랐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사진의 이해 수업 시간.
김진기 교수가 오늘의 명언을 말했다.
"다들 들어본 말이죠?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한 말입니다. 그럼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인 순간을 카메라로 담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진기 교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친다고 말하면 종종 사람들이 내게 어떤 카메라를 사야할지 물어봅니다. 요즘엔 작가인 나도 전부 외우지 못할 만큼 수많은 카메라와 렌즈들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역사에 남아서 변하지 않는 감동을 주는 사진들이 매번 비싼 장비에 의존해 촬영되었을까요?"
김진기 교수는 여러 장의 흑백 사진을 프로젝터로 띄워서 보여주었다.
"카메라에 현혹되지 말고, 우린 사진의 본질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진은 우리가 본 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행위입니다. 그럼 본질에 비추어 좋은 사진을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서양화과 이수진씨?"
수진 선배는 식판의 부재 이후 김진기 교수에게 이름이 각인되어 버렸다.
그래서 종종 질문의 답변자로 지목되었다.
"내 사진을 봐줄 타인이 필요합니다."
수진 선배가 울상을 지으며 소심하게 답변했다.
"그것도 그렇겠네요. 열린 마음으로 내 사진을 봐줄 사람이 필요하겠죠. 그리고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세상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눈입니다. 좋은 사진이란, 곧 좋은 발견일 지도 모릅니다. 좋은 촬영은 언제나 좋은 발견 뒤에 이루어지겠죠. 좋은 사진작가란, 세상을 뒤져서 감춰졌던 멋진 장면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울 것 없는 말들이지만, 다시 들으면 머릿속이 환기되는 것 같았다.
사진 수업 듣기를 잘했다고 여겨질 때 쯤.
"그런 의미에서 과제를 하나 내도록 하겠습니다."
아아아아.....
과제라는 말에 학생들이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교수의 입장에서는 학생들이 괴로워할수록 즐겁지 않을까?'
회귀하고 나서 항상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튼 교수는 꿋꿋하게 과제를 선언했다.
"이번 과제의 제목은 '일상의 발견'입니다. 사진을 찍되 사진을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그냥 평소에 목에 카메라를 걸거나, 주머니에 카메라를 넣고 다니세요. 그리고 마주하는 일상을 지켜보며 기다리세요. 그러다 지금 겪고 있는 장면이 새롭게 보이는 순간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촬영한 사진을 제게 이메일로 보내십시오."
이런 과제가 있을 줄 알았다면 좀 작고 가벼운 카메라를 살 걸 그랬다.
난 원래 쌓이는 과제에 덤덤한 편이었지만, 나머지 학생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김진기 교수가 책을 덮으며 말했다.
"이건 수업과 무관한 이야기인데, 얼마 전 뉴욕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오올..."
학생들은 교수를 놀리듯 다 같이 소리를 만들었다.
김진기 교수는 유명한 작가였고, 명문대 인기 강사였지만 소탈하고 장난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뉴욕에서 공부하다 온 엘리트와는 이미지가 잘 맞지 않았다.
"오올이라니...아무튼 나는 사진을 전공했고, 그 친구는 방송을 전공했습니다. 집에 돈이 많은 친구라서 계속 미국에 남아있다 최근에 귀국했다더군요. 그런데 그 친구가 묻더군요. 한국은 사회의 모든 면이 다이나믹한데 왜 미술은 그렇지 못하냐고. 나한테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한국이 다이나믹한가?'
나는 교수의 말을 듣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었던 한국은 미술 쪽 못지 않게 경직된 세상이었다.
지난 생의 나는 그 경직된 세상 속에서 천천히 무력하게 죽어갔었다.
'하긴 유학파 교수와 부자 친구는 내가 살던 세상과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 지도 모르지.'
김진기 교수는 말을 이어갔다.
"여러 이유가 생각나기도 하고, 또 미대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책임감도 느껴지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학생들에게 당장 해줄 수 있는 말은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라는 정도. 항상 눈을 크게 뜨고 좋은 작품을 위해 고민하십시오. 계속 노력하다보면, 경직된 미술계라지만, 작은 기회라도 생기지 않을까...결국 못난 교수의 푸념이었습니다."
뭐, 누구나 할 수 있는 흔한 말이긴 했다.
그래도 교수의 진심이 느껴져서 조금 좋기도 했다.
'결국 노력...'
하지만 사진의 이해, 과제의 개념도 잡히기 전에 다른 과목의 과제가 또 추가 되었다.
이번에는 서진석 교수였다.
기초 서양화 1의 수업시간.
"내가 전에 말씀드렸다 시피 이번 학기는 특별하게 가는 중입니다."
'또 무슨 일을 꾸민 걸까.'
서진석 교수는 거창한 과제를 구상해두고는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듯이 '특별한 학기'임을 재차 강조했다.
"제가 늘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습니다."
'어이, 서진석 교수님. 말은 정확하게 하자고요. 당신은 지시만 내리고, 결국 하는 건 학생들이잖아.'
하지만 이번에는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서진석 교수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바로 조별과제입니다."
아아아아...
학생들은 강렬한 저항의 의지를 드러냈다.
하지만 학생들의 강한 저항에도 서진석 교수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교수들은 즐긴다니까.'
"이제까지는 좀처럼 시도해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학기 신입생들은 유난히 능력이 뛰어나고 열정적인 관계로 마침내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화가에게 팀플레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화가는 늘 누군가와 소통해야 하고, 공동 작업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작가에게 공동 작업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유명한 작가들끼리도 협업을 자주했고, 다른 개념일수도 있지만, 아예 공장을 돌리는 작가도 많았다.
'물론 이번엔 그냥 서진석 교수가 즐기고 싶어서 시작한 과제겠지만.'
"이번 과제의 주제는 '틀에서 벗어나기'입니다. 우리 수업의 이름은 기초 서양화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그림만 그리면서 살게 될 사람은 아주 드물 겁니다.
여러분 중, 많은 수가 미술을 포기할 것이고, 또 작가의 길을 선택한 사람도 그림 외의 다른 작업을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서양화라는 전공은 여러 방면의 시각 예술로 확장될 수 있는 아주 좋은 발판입니다."
우리 과는 한국 최고의 미술 엘리트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졸업한 후에, 미술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로 가혹한 세계였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이번 과제는 '틀에서 벗어나기.' 캔버스와 유화 물감을 벗어나 자유롭게 작업을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조별 과제입니다. 마침 학생 수가 짝수니까, 2인 1조를 짜고 제게 다음 주까지 통보해 주십시오. 3주를 드리겠습니다. 조별과제에다 시간도 넉넉히 드렸으니 그만큼 충실한 과제를 제출해야 합니다."
과제가 정신없이 쌓이고 있었다.
마치 미대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갈 때 유나가 의자 위에서 목을 젖히며 말했다.
"조별과제, 우리 뭐 하지?"
그때 뜬금없이 행복이 밀려왔다.
"그러게, 뭐 하지?"
나 역시 조별과제란 말을 들었을 때 유나와 할 생각이었다.
유나 역시 나랑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을 테니 나랑 조별 과제하는 것이 제일 편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 확인 절차도 없이 우리가 한 조라고 말해주는 게 기뻤다.
'조별과제...'
나는 지난 생에 조금 더 좋은 기회를 갖고 싶어서 디자인과로 전과를 했었다.
그래서 실기력은 부족했고, 같은 과에 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조별과제란 말이 나올 때마다 숨고 싶었지.'
다른 학생들도 나를 피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나 남겨진 짐짝 취급을 받았다.
그렇게 3년을 보냈더니, 성격마저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엔 달랐다.
나는 조별 과제가 무섭지 않았고, 너무 당연하게 우리가 같은 조가 될 거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필 유나라서 더 기쁜 지도 몰랐다.
갑자기 의욕이 솟구쳤다.
서진석 교수.
역시 괜찮은 사람이었다.
"한 번 제대로 해 보자."
유나가 나를 향해 가볍게 눈을 흘겼다.
"난 항상 제대로 했는데?"
* * *
이 정도에서 멈춘다면 미대라고 할 수 없었다.
미대에서도 가장 느슨한 서양화과였지만, 과제가 끝도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나와 유나는 안국역으로 갔다.
그리고 내 목엔 사진의 이해 김진기 교수가 시킨 대로 크고 무거운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유나가 나를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너도 내년에 해야 해."
"그리고 넌 한 번 더 해야 하지."
"내가 갑자기 음식이나 길가의 돌멩이, 지나가는 강아지, 아니면 너를 찍더라도 그냥 넘어가. 전부 교수가 시킨 거야."
유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미대의 과제 중에는 종종 전시를 관람하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게 있었다.
가끔 전시를 관람하는 정도라면 무척 즐거운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날씨 좋은 날 미술관을 산책하고, 즐거웠던 기억을 기록한다.
이런 걸 과제라도 불러도 될지 고민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처럼 실기 과제가 쌓여있는 바쁜 시기.
또 교수마다 돌아가며 전시회 감상을 과제로 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래서 하루 날을 정해서 전시들을 조지기로 하고 유나와 나는 안국역으로 나온 것이었다.
"봐야 할 전시가 많으니까 전시 하나를 관람할 때마다 바로 감상을 정리하자. 안 그러면 기억이 섞일 지도 모르겠다."
나는 유나에게 동의했다.
그래서 우린 첫 번째 전시를 관람하고 닭꼬치를 먹으며 생각을 정리했고, 두 번째 전시를 관람하고 중국식 만두를 먹으며 정리했고, 세 번째 전시를 관람하고 김밥을 먹으면서 관람 후기를 정리했다.
"왜 미술관을 다니는데 배가 부르지?"
"그러게. 우리 점심은 간단하게 즉석떡볶이로 먹자."
안국역까지 나왔으니, 역시 떡볶이 정도는 먹어야 했다.
다시 젊어져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가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이 들면 많이 먹지 못하니까 젊었을 때 많이 먹어둬야 했다.
'젊었을 때 사랑을 많이 하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음식은 노력하면 누구나 많이 먹을 수 있다.
* * *
"나 말이야."
즉석 떡볶이 냄비에 불을 붙이며 유나가 말을 꺼냈다.
"나 그동안 기초 서양화 과제 열심히 했거든. 그런데 한 번도 1등을 못했어. 그래서 이번엔 꼭 1등을 하고 싶어."
"난 1등 해봤는데 별거 없던데?"
유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유나는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지만, 매사에 열심이었고 또 굉장히 승부욕이 강했다.
"동민오빠 조는 벌써 시작한 모양이야. 입체를 만드나봐."
26세 강남 전임 강사 남동민은 전의 4수생과 한 조가 되었다.
나이도 있고 경험이 많은 둘이 한 조가 되었으니 실기력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게다가 남동민도 한 승부욕 하니까....'
1등을 해보고 싶은 유나 앞에 강적이 나타난 것이다.
"김태민은?"
"몰라. 혜란이는 물어봐도 가르쳐 주지 않아."
김태민의 마니또가 되었던 혜란은 결국 김태민과 한 조가 되는데 성공했다.
김태민도 실력이 있고, 또 혜란이 열정적일테니 둘 역시 만만치 않은 과제를 제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