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24화 (24/203)

■ 24. 사업 확장 □

며칠 후.

"대표님!"

수업이 끝난 직후였다.

우연히 전화기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못 받았을 뻔했다.

난 수업시간엔 항상 무음 모드고, 대부분의 시간에는 일이나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승희씨는 언제나 문자로 먼저 연락했었다.

대부분의 업무는 그녀 선에서 결정 가능했기 때문에 이런 다급한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네. 왜 그러시죠?"

"면담 요청이 왔어요. 그런데 좀 특이한 경우 같아요."

그제야 다급함보다는 기대에 찬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면담이요?"

"네. 디자인 문의긴 한데 쇼핑몰이 아니에요. 만나보셔야겠어요."

다른 분야의 사이트라도 제작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내가 제일 잘 아는 분야는 쇼핑몰이었고, 쇼핑몰 디자인만으로도 이미 적지 않은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굳이?'

하지만 승희씨는 이 분야의 베테랑.

그녀의 조언은 들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만나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럴게요."

* * *

30대쯤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여성이었다.

굉장히 지적이고 우아한 인상이었다.

"안수정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건넨 명함에는 '크리스털 씨네마'이라고 적혀 있었다.

"주로 제 3국 영화나 독립 영화를 수입하는 신생 배급사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듣는 배급사였다.

물론 아는 배급사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영화는 기억해도 배급사 이름까지 외우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직원이 저랑 남동생 둘 뿐이에요."

안수정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회사 규모까지 밝혔다.

"저희 회사도 직원 2명이 전부입니다."

나는 나름 위로를 건넸다.

"이전에도 작은 영화를 두어 편 수입했었어요. 그런데 전부 손해를 봤죠."

다행히 워낙 헐값에 사와서 견딜만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수입한 녀석이 징조가 좋아요. 싸게 사와서 상영관 잡느라 시간을 끌었는데, 그 사이 여기저기 노미네이트 된 모양이에요. 그래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는 중이에요."

"그렇군요. 그래서 저희한테 홈페이지를..."

나는 말하면서 그녀가 가져온 자료들을 살펴봤다.

'어라?'

그런데 들어본 제목이었다.

'이 영화를 이 여자가 수입했다고?'

원래 영화는 잘 모르는 분야였고, 이 영화를 직접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알고 있는 제목이었다.

그만큼 유명한 영화였다.

적어도 한국 한정으로는.

영화는 영국의 학생 밴드 이야기를 다룬 성장드라마였다.

안수정의 말대로 여기저기 영화제에서 상을 타면서 뜻밖의 대박을 쳤다.

특히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종종 미국이나 유럽보다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가 그 중 하나였다.

풋풋한 첫사랑과 소년들의 성장 이야기가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았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이후에도 꾸준히 재개봉 되었지. 케이블에서도 계속 틀어주고."

수입사가 헐값에 사와서 수십 배의 수익을 거뒀다는 그런 흥미 위주의 기사도 본 적이 있었다.

'그냥 부러운 남의 이야기였지.'

그런데 그 행운의 주인공이 정말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내 앞에 앉아있었다.

난 차분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배급사를 설립했을 때부터 홈페이지를 제작하려고 벼르고 있었어요. 하지만 일단 이 영화의 홈페이지를 먼저 만들 생각입니다."

"그런데 웹에이젼시에서 요구하는 금액이 생각보다 컸군요. 그러다 우연히 원디자인의 쇼핑몰 디자인을 봤는데, 디자인은 괜찮은데 굉장히 헐값이었다. 그 이야기죠?"

"네. 맞아요. 정확해요."

그리고 안수정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정말 스무 살 맞으세요? 말투가..."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웹사이트의 가격은 원래 천차만별이었다.

미래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심했다.

"일반 홈페이지와 쇼핑몰 디자인은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아마 웹에이젼시에 제시한 가격은 사이트 유지 관리비까지 포함된 금액일 겁니다. 그리고 저희가 파는 쇼핑몰 디자인은 기성품처럼 동일한 상품을 여러 사람에게 판매하는 거고요."

"그렇군요."

"그곳에서 제시한 가격은 얼마였죠?"

"400만원이요. 하지만 350까지는 해줄 수 있다더군요."

그녀는 전 회사와 의논했던 자료들을 간단히 설명했다.

페이지가 그리 많지 않은 간단한 홈페이지였다.

'400이라면...'

좀 세게 부르긴 했지만, 여러 디자인 비용까지 고려하면 무난한 금액이었다.

원래 개인이나 프리랜서에게 의뢰하는 것보다 정식 웹에이젼시가 일을 맡을 경우 가격이 더 올라갔다.

하지만 나는 2인 회사의 대표.

더 저렴한 가격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 영화는 대박이 터진다. 그러니까 이건 기회야.'

확신이 왔다.

"200. 반값에 해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페이지를 더 늘리도록 하죠."

나는 노트를 꺼내서 즉석에서 손 그림으로 예상도를 그렸다.

그래도 미대생이라 제법 그럴싸하게 그려졌다.

'많이 늘었다. 이주원.'

혼자 피식 웃으며 이것저것 가능한 페이지에 대해 설명했다.

"아니, 페이지를 추가하면서도 가격은 내리겠다고요?"

"예. 그러죠. 한 번 해봅시다. 그리고 포스터를 포함해서 몇 장의 스틸컷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네. 그 정도야 얼마든지. 그런데 어떤 용도로?"

"숫자 슬라이딩 퍼즐 아시죠?"

"네."

"플래시 게임으로 스틸컷을 이용한 슬라이딩 퍼즐을 제작해 홈페이지에 넣겠습니다. 그리고..."

"플래시 게임이요? 그리고? 또 뭐죠?"

"영화에 관련된 퀴즈를 마련해 주시면 역시 플래시 게임으로 만들어 넣을 수 있습니다. 열 문제 정도. 경품 같은 걸 거실 생각이 있으면, 룰렛이나 문자 통보까지 넣어 드리죠."

"퀴즈요? 네, 준비할게요. 경품까지 전부 고려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간 안에 그게 가능하겠어요?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가능하면 기간도 단축해보겠습니다."

"아..."

안수정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냥 혹시나 싶어서 문의를 드렸는데 문의하길 정말 잘 했군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최대한 근사한 홈페이지를 만들 겁니다. 대신 저희 회사 로고와 연락처를 웹사이트 우측 하단에 큼지막하게 박아두겠습니다."

"좋아요. 그 정도는 얼마든지."

"또 하나. 이 영화가 성공하면 그땐 정식으로 저희에게 의뢰를 주십시오. 회사 홈페이지나 차기작들. 그리고 그 땐 제값을 청구하겠습니다."

안수정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일을 정말 기분 좋게 하시는군요. 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 영화에 올인 중인데, 차기작까지 말씀해주시다니. 좋습니다. 이 영화가 성공하면 반드시 회사 홈페이지를 원디자인에 맡기겠습니다."

"문서로 남기겠습니다. 괜찮죠?"

"그러시죠."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디자인이야 내가 맡으면 되는 부분이고, 플래시 게임은 어렵지 않았다.

웹사이트는 복잡한 구조가 아니라서, 프로그래머는 적당한 프리랜서를 구하면 될 것이다.

안수정은 선금 100만원을 즉석에서 입금했다.

* * *

"잘 되셨나요, 대표님?"

승희씨가 전화했다.

'나야, 이 영화가 대박이 터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 하지만 승희씨는 어떻게 기회라는 걸 알아챈 거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로 저한테 만나보라고 하신 거죠?"

"아...그게..."

"가르쳐주시죠."

"그냥 그 쪽 대표가 말이 좀 통할 것 같아서. 그래서..."

역시 베테랑.

웹에이젼시는 사람을 대하는 일.

그리고 노동집약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가격 흥정을 잘해도 진상 고객에게 걸린다면 시간이나 노력에서 결국 적자가 나기 마련이었다.

반면 말이 잘 통하는 상대라면 가격을 할인해줘도 결과적으로는 이익이었다.

승희씨는 안수정과의 잠깐의 전화 통화 후, 괜찮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확한 판단이었다.

* * *

계약을 따내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프로그래머에게 지시할 업무를 정리하고, 사람을 구하려는 찰나 한철이가 들어왔다.

"한철아, 혹시 홈페이지도 만들 줄 알아?"

한철이 피식 웃었다.

여학생을 갈구하는 모습만 보다 갑자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자 무척 어색했다.

"이봐 친구, 나 한국대 컴공이야. 홈페이지 따위는 그냥 내 장난감이라고."

"다룰 줄 아는 언어는?"

"PHP부터 JSP까지?"

"혹시 그럼 아르바이트도 해본 적 있어?"

"장난해? 우리 고등학교 홈페이지부터, 아빠 친구 회사 홈페이지들까지 스무 개도 넘을 걸?"

이런..

일이 잘 되려니 너무 쉽게 풀리는 것 같았다.

바로 옆에 프로그래머가 있었다니.

나는 시안을 짜다 만 계획서를 한철에게 보여줬다.

"간단하네."

"가격은 50만원 정도면 될까?"

그러자 한철이 얼어붙었다.

"그렇게 많이 주겠다고? 할게, 무조건 할게. 맡겨만 줘!"

그게 큰 금액이었나?

프로그래머 쪽 일은 잘 몰라서 확신이 없었다.

아마도 직업 프로그래머와 학생들 사이의 가격이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튼 50만원이라는 금액을 듣자, 자부심 넘치던 한국대생은 사라지고, 한철은 내게 매달려 애원하고 있었다.

"내가 할게. 맡겨만 줘. 기간도 최대한 당겨볼게."

"아, 그런데 플래시 게임도 몇 개 만들어야 하고..."

"플래시 그 까짓 거 몇 시간 뚝딱이면 끝나. 몇 개 더 만들 수도 있어!"

그렇게 은근슬쩍 내가 하려했던 일 까지 넘겨버렸다.

"그래. 그럼 한 번 해보자."

"고마워! 나를 믿고 이렇게 큰 알바를 주다니! 오늘 내가 쏠게! 형원이형 오면 삼겹살 먹으러 가자!"

'아니, 미안하게 네가 쏠 필요까지는.'

나도 양심이 있었다.

원래는 50보다 더 큰 금액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냥 툭 찔러 본 건데.'

하지만 한철은 제발 삼겹살을 쏘게 해달라고 내게 애원했다.

"나를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 셈이야?"

결국 형원 선배와 우리는 버스를 타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여기 유나 집 앞인데.'

어차피 내가 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유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물 끓여. 믹스 커피 마시려고.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 놈의 공짜 커피.

"밥은?"

대답이 없었다.

아마 또 대충 넘어갈 계획인 듯 했다.

"나와. 같이 먹자. 룸메들이랑 나왔어. 너네 집 앞이야."

잠시 후, 유나가 식당에 들어서자 형원 선배와 한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말 한 적이 없는데.

"듣던 것보다 훨씬 예쁘세요."

말 한 적이 없다니까.

한철은 부지런히 고기를 구워 유나 앞에 대령하기에 바빴고, 형원 선배는 국문과다운 온갖 드립을 동원해 유나를 웃기기에 바빴다.

유나는 잘 웃었고, 잘 먹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뿌듯해 했다.

"그런데 주원이 기숙사에선 어때요?"

"항상 일만합니다. 잠은 낮에 작업실에서 잔다고. 작업실에서 자는 게 굉장히 편한 가 봐요?"

"작업실이요?"

유나가 살짝 찡그렸다.

"오빠들이 주원이 좀 잘 챙겨주세요."

한철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오빠 아니라 동갑이라고 벌써 몇 번 말씀드렸는데..."

"앗...미안."

한철이 좀 오빠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한철보다 먼저 계산하려 하자, 형원 선배가 날 붙잡았다.

형원 선배는 자기 카드를 내밀며 외쳤다.

"형은 원래 동생들한테 안 얻어먹어. 그리고 신춘문예 상금이 많이 남아서 괜찮아!"

"어머, 오빠 신춘문예 등단하셨어요?"

그놈의 신춘문예.

여자 앞에선 항상 기승전 신춘이었다.

언제까지 써 먹을지 궁금했다.

'설마 작년 신춘문예는 아니겠지?'

그렇게 우린 밖으로 나왔다.

날씨도 따뜻했고 배도 불렀다.

한철이 커피를 사는 동안 우린 밖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유나가 갑자기 주먹으로 내 어깨를 때렸다.

"야, 알바도 좋은데 잠은 좀 자면서 일해."

"그럴게."

조그만 녀석이 손이 매웠다.

"너도 혼자 밥 먹기 싫으면 전화해. 굶지 말고."

유나가 대답하려는 순간 커피가 도착했다.

맛있는 밥과 커피.

시끄러운 친구들.

가끔 이런 것도 아주 좋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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