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유나의 과제 □
그리고 몇 번의 차례가 지나가고 드디어 김태민이 등장했다.
김태민이 내건 그림은 에곤 쉴레.
'이번에도 묘하네.'
에곤 쉴레의 자화상.
유명한 그림이라서 나도 대강 알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그림과 김태민을 번갈아 살펴봤다.
'분명 내가 아는 그림이 맞는 것 같은데.'
아마도 어딘가 아주 조금 수정이 들어간 것 같았다.
'일부러 고친 것 같지는 않은데.'
분명 이번 과제는 모사였다.
하지만 에곤 쉴레의 자화상은 아리송하게 김태민과 닮아 있었다.
'저 녀석 포토 리얼리즘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역시 그냥 김태민식 그림을 그렸어.'
이런 걸 재능이라고 불러야하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남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웠다.
"저는 에곤 쉴레를 그리도록 연락받았습니다. 그림이 아름다워서 즐거운 마음으로 과제를 했습니다."
김태민의 짧은 발표가 끝나고 몇 번의 칭찬 같은 질문이 지나갔다.
"그럼 김태민씨의 마니또는 누구시죠?"
교수가 질문하자, 같은 과 동기인 혜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태민이가 에곤 쉴레와 여러 가지로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독특한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렇고, 또 에곤 쉴레는 학교의 규칙에 반발해 자퇴를 했다고 합니다. 은근히 태민이도 규칙을 싫어하는 그런 느낌이 나서..."
그러자 김태민이 고개를 저었다.
"전 이제 학교에 열심히 다닐 생각입니다만."
"맞습니다. 그렇게 약속하셔서 출석 가산점도 드렸지요."
역시 교수가 농담을 하면 학생들이 반사적으로 웃어댔다.
'내 추측이 맞다면 혜란이가 처음에 나를 뽑았겠군.'
살짝 약이 올랐다.
'굳이 바꿔야만 했었냐.'
하긴 김태민에 비교하면...
아무튼 그렇게 김태민의 발표는 끝났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유나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표정을 관리했다.
* * *
유나는 잘 웃고, 잘 장난치고, 이것저것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줬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고, 자기 집에서 조금 달려가면 제주도 바다라는 그런 이야기들.
아무튼 유나는 무척 쾌활해서 유나가 없으면 빈 공간이 무척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종종 유나가 무척 놀랍다고 생각했다.
'한국대 서양화과...'
물론 남들에겐 그냥 조금 괜찮은 학교 정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조금 달랐다.
내가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서 나는 두 번의 인생과 노력상점이라는 이능력이 필요했다.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치트를 가지고서도 겨우 턱걸이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유나는...'
그 아이는 겨우 스무 살.
그런데 단 한 번의 생을 가지고서 이 곳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제일 예뻤고, 제일 즐거웠고, 제일 영리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는 지난 생 내내 무기력하고 지쳐 있었는데.'
유나는 나와 반대였다.
그녀는 활기찼고, 자기가 있는 주변까지 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린 유나가 나보다 훨씬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유나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무척 즐겁고 소중했다.
내가 유나에게 모사하도록 지정한 화가는 툴루즈 로트렉이었다.
화가 중에는 가끔, 자신의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었다.
로트렉이 그랬다.
로트렉은 난쟁이었고, 뼈가 잘 부러지는 병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그림 외에는 즐거울 일이 별로 없었다.
로트렉은 몽마르뜨의 매음굴을 찾아다니며 항상 과음했고, 술에 취해 정신 착란을 겪다가 매독에 걸려 죽었다.
하지만 로트렉의 그림은 놀랍도록 아름답고 즐겁고, 새로웠다.
'어쩌면 현실이 너무 고달파서 그림이 더 아름다웠는지도.'
물론 내가 많은 화가를 아는 것도 아니었고, 유나의 과제를 지정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허락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선...'
그 중에선 로트렉이 제일 그럴 듯해 보였다.
열정적인 로트렉의 그림들이 얼핏 유나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오직 그림 한정으로만 닮았어. 그것도 좋은 쪽으로만.'
로트렉의 비극적인 삶은 유나와는 조금도 맞지 않았다.
유나는 밝고 건강한 녀석이었다.
나는 유나가 그린 로트렉이 보고 싶었다.
* * *
유나는 자기가 그린 그림을 들고 강의실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럼 시작하시죠."
서진석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나가 발표를 시작했다.
"제가 모사하도록 지정 받은 화가는 로트렉이었습니다. 처음엔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입시 미술만 계속 해왔으니까, 이걸 어떻게 그려야 하나 막막했습니다."
"충분히 그랬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입시 미술은 모든 학생이 똑같은 그림을 그리도록 만드니까요."
유나는 교수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발표를 이어갔다.
"다행히 로트렉은 여러 그림을 그렸고, 그 중에서 이 그림을 찾았습니다.
처음엔 이 그림 정도면 따라 그려볼만 하다 생각해서 시작했는데, 그리다 보니, 그림 안의 여자가 무척 특별해 보였습니다. 그림 안에서 행복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그리고 그 행복이 제게 전염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유나가 그린 그림은 로트렉의 세탁부.
탁자를 붙잡고 기대어 있는 젊은 여자의 그림이었다.
그때 남동민이 번쩍 손을 들었다.
이젠 은근히 남동민의 질문이 기대될 정도였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 그림 안에 행복이 있다니, 대체 어디가 행복하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유나씨는 로트렉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 남동민은 자기가 아는 것이 나오면 참지 못하는 부류인 것 같았다.
"사실 이 그림 속 여자는 매춘부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고된 육체노동 중 잠시 쉬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림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무작정 감상만 내세우는 게 아니라, 그림의 배경 역시 충분히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야, 남동민...그게 아니야.'
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난 유나를 잘 알고 있었다.
과연 유나가 자기 과제에 대해 그 정도도 조사하지 않았을까?
유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남들에겐 남동민의 공격에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유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여자는 지쳐 보이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습니다. 얼굴은 창백하고요. 로트렉이 그린 여자들 대부분이 매춘부나 무희니까 충분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오히려 그래서 더 행복해 보였습니다.
매일 지친 몸으로 겨우 살아가는데, 누군가 자신을 그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준다면 세상의 여자들 대부분은 무척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면 더욱 더요.
이 여자가 매춘부라고 하셨는데, 로트렉이 그린 여자는 매춘부일지 모르지만, 그림 안의 여자는 매춘부가 아닐 지도 모릅니다.
저는 오히려 그림 속 여자가 저와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따라 그리며 제가 로트렉의 모델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느꼈습니다."
서진석 교수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림은 하나지만, 보는 사람마다 그들이 발견하는 그림은 전부 다르겠지요.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화가의 수련 방식인 동시에, 그림을 가장 밀접하게 감상하는 방식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유나씨가 과제를 충실히 수행한 것 같아 교수로서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남동민을 향해서도 칭찬했다.
"남동민씨의 의견도 아주 훌륭합니다. 화가라면 당연히 다른 화가의 역사를 공부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훈훈하게 유나의 발표가 마무리 되었다.
"자, 그럼 한유나씨의 마니또는..."
서진석 교수는 잠시 자신의 노트를 확인했다.
그리고 슬쩍 웃고는 노트를 내려놓았다.
"그럼 한유나씨는 마니또가 지정해준 화가에 대해 무척 만족하셨겠군요?"
어라?
서진석 교수가 내 이름을 확인한 것이 분명했다.
교수의 질문에 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니또 덕분에 무척 행복한 2주였습니다. 단순한 모작이 아니라, 저에겐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꼭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서진석 교수는 나의 공범이 되어 주었다.
'교수님 나이스.'
서진석 교수.
역시 괜찮은 사람이었다.
서진석 교수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그럼 한유나씨의 마니또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죠."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끼익.
의자를 밀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나의 복잡한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느라 무척 힘들었다.
원래는 더 잔인하게 놀려줄 계획이었지만, 과제를 열심히 한 것 같아 적당히 봐주기로 결심했다.
"이주원씨, 한유나씨에게 로트렉을 추천한 이유가 있을까요?"
"네. 사실 대단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로트렉을 따라 그리려면 애 좀 먹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생이나 좀 하라고... 그런데 뭐, 자기가 행복했다니, 다행이네요."
학생 몇 명이 내 말투에 웃음을 터뜨렸다.
서진석 교수가 유나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고생 좀 하셨습니까?"
"네. 아주 많이."
유나가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 * *
그렇게 모든 발표가 끝났다.
"자, 그럼 오늘의 상품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오늘의 수상자는 바로 남동민씨입니다. 모사도 정확했고, 특히나 다른 학생들의 과제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해 크리틱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건 나도 인정이었다.
남동민 덕에 나와 유나가 무척 돋보일 수 있었다.
말이 많아서 좀 짜증이 나긴 하지만, 은근히 괜찮은 녀석이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크리틱이 수업이 끝났다.
'이젠 공짜 커피도 없는데...'
유나와 어떻게 휴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유나 덕분에 무척 즐거운 2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