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22화 (22/203)

■ 22. 범인 검거! □

"자, 그럼 누구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난 원래 발표에서는 언제나 지켜보면서 끝까지 남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궁금했다.

내 마니또가 느낌이 좋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나를 잘 아는 사람, 나를 알려고 애쓰는 사람.'

누군지 어서 알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들려는 찰나.

"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남동민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 의욕 과잉 녀석.'

"네, 좋습니다. 오늘도 용기 가산점 드리겠습니다. 참, 오늘의 상품은 종이 팔레트입니다. 1위에 도전해서, 이 팔레트의 주인이 되십시오!"

서진석 교수가 홈쇼핑 호스트처럼 외쳤다.

'처음엔 엄청 신사적인 느낌이었는데...'

수업이 진행될수록 자꾸 허당 같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회용 종이 팔레트는 무척 간편하고 유용해서 유화를 그리는 미대생들의 최애템 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역시 상품이 걸리자 학생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남동민이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앞으로 나가 자신의 그림을 걸었다.

피카소였다.

푸른색이 가득한 청색 시대, 젊은 시절의 피카소 자화상이었다.

남동민은 발표를 시작했다.

"저는 피카소의 그림을 모작하도록 지시 받았습니다. 마침 제가 아주 좋아하는 화가라서, 더 열정적으로 이번 과제에 매달릴 수 있었습니다. 저는 피카소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 피카소의 젊은 시절 자화상을 선택해 그려보았습니다."

"좋군요. 잘했습니다."

서진석 교수는 남동민의 모작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졌다.

과연 강남 학원의 전임강사답게 흠잡을 곳 없이 잘 따라 그렸다.

'약간 허전하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아마 오늘 이 강의실에 있는 모든 모작들이 다 비슷할 것이다.

대가들의 진품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대 미대생들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혹은 똑같이 그려낸다 하더라도 그림 한 곳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할 수밖에 없었다.

"자,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하시죠."

몇 명이 예의상 질문을 하긴 했지만 남동민의 크리틱은 썰렁했다.

그럴 수밖에.

남동민은 모든 학생들이 다 알도록 당당하게 과제를 조작했으니까.

'좀 더 노련하게 굴었어야지.'

남동민은 어쩌면 조금 순진한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곳이 고등학교도 아니고.'

남동민은 교수만 속이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기가 직접 고른 피카소를 그려온 남동민에게 학생들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첫 발표라 참여가 저조하군요. 그럼 남동민씨.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남동민은 긴장한 표정으로 서진석 교수를 바라봤다.

"아까 피카소를 좋아하고, 피카소처럼 되고 싶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까?"

"아, 그건 피카소는 남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화가들이 방탕하고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고 나서야 유명해집니다.

하지만 피카소는 살아있을 때부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입체파를 만들어 명성도 얻었고,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죽는 날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저도 피카소처럼 예술과 성공, 두 마리 토끼를 전부 잡고 싶습니다."

"오, 야심가군요. 훌륭합니다. 학생이라면 크고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겠지요. 응원하겠습니다."

서진석 교수는 한 번 더 남동민의 그림을 바라봤다.

"학생들을 위해 피카소의 청색시대에 대해 한 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젊은 시절의 피카소가 푸른색과 검정색을 주로 선택해 우울하고 신비로운 그림들을 그리던 시기입니다."

"피카소가 색을 선택했을까요? 아니면 색이 피카소를 선택했을까요?"

남동민은 갑작스런 질문에 머뭇거렸다.

"네? 제가 질문을 잘..."

"아닙니다. 좋은 그림 잘 봤습니다. 훌륭한 솜씨였습니다."

남동민의 살짝 썰렁한 발표가 끝나고 드디어 나의 차례가 되었다.

후우.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 앞으로 나가서 내 그림을 걸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를 누르고 발표를 시작했다.

"저는 에드워드 호퍼를 그리도록 지시받았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은 어느 주유소의 풍경.

밤에 환한 전등이 켜져 있고, 대머리 남자가 주유기를 점검하는 고요한 장면이었다.

"저는 발표를 하기 전에 먼저, 저한테 호퍼를 그리도록 지시한 마니또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그림뿐만 아니라, 호퍼의 그림들을 다시 찾아보면서 무척 위로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자 남동민이 번쩍 손을 들었다.

아마도 방금 전 자신의 발표가 부족했다고 느껴져 만회하려는 모양이었다.

"저도 호퍼의 그림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호퍼의 주제는 도시인들의 고독, 절망, 단절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로를 받았단 말이죠? 혹시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 과잉이 아닐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제 개인적인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림 속의 고독한 사람들이 어디선가 벌써 본 듯한, 저나 제 주위 사람들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나를 바라보는 듯한 호퍼의 시선들. 그런 것들을 느끼며 위로 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남동민이 작정하고 덤볐다.

호퍼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고 싶거나, 아니면 정말 종이 팔레트가 필요했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설마? 남동민이 내 마니또?'

안 돼.

그것만은 제발.

난 간절한 기분으로 그의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방금 호퍼의 시선을 느끼며 위로 받았다고 하셨는데, 그게 제일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호퍼는 그림 속 등장인물들을 사물처럼 단순화시켜 그렸습니다. 도시 속에서 의미를 잃어가는 인간들을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본 것이죠."

"오호. 재미있는 의견입니다."

모처럼 남동민을 향해 서진석 교수가 미소를 드러냈다.

남동민은 꽤 뿌듯해했다.

"그럼, 직접 그려본 이주원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 맞습니다. 호퍼는 그림 속 사람들을, 사물처럼 단순하게 지워가며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게 더 위로처럼 느껴집니다."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호퍼는 아마 사람들에게, 굳이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더라도, 그냥 얼굴이 없는 도시의 일부이더라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진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빙그레.

서진석 교수가 나를 향해 한껏 미소 지었다.

"이주원씨는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도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군요. 그럼 이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해보시죠."

난 슬쩍 남동민을 쳐다봤다.

질문은 자기가 하고, 칭찬은 내가 받자 벌레를 씹은 표정이었다.

"제가 그린 그림을 포함해 호퍼의 그림들은 사물을 굉장히 단순화 시켜서 경제적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그때였다.

내가 느릿느릿 말했기 때문인지, 그 틈을 노려 남동민이 또 한 번 끼어들었다.

"그것은 호퍼가 화가가 되기 전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알고 있었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상관 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빛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호퍼의 그림에는 항상 온기가 없는 빛이 등장합니다. 그것을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게 위로의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현대인들이 서로를 향해 건네고 받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만큼의 위로가 이 정도 온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림 속 사람들은 사물처럼 무표정하지만 항상 빛을 향해 고개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미한 빛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색을 충분히 드러내야 했을 테고, 색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사물들을 단순화 시킬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그림을 따라 그리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발언이 끝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쩌면 나만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쏟은 직후니까.

그리고 커다랗게 서진석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겁니다! 아주 좋습니다! 역시 이주원씨는 저를 실망시키지 않는구요! 이겁니다! 자, 전부 저를 보십시오. 화가를 꿈꾸는 사람이 남의 그림을 따라 그렸다면 이렇게 자기만의 방법으로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서진석 교수는 강의실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목소리로 '아주 좋습니다.'를 몇 번이나 소리쳤다.

그런데 나는 느낌이 안 좋았다.

'원래라면 기뻤겠지만....'

불안했다.

남동민이 수상했다.

'내 발표에 곳곳에 끼어 들어서 내가 돋보이게 해줬어. 호퍼에 대해 잘 아는 것도 그렇고...설마?'

지난 2주일 동안 혼자 고마워하고 혼자 설레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내 환상의 마니또가 시끄러운 26세, 강남 학원 강사 남동민이라고?

'안 돼. 그것만은 제발...'

다시 서진석 교수가 외쳤다.

"자, 그럼 이주원씨의 마니또는 누구입니다. 손을 들어주시죠."

'제발. 제발. 응?'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전혀 뜻밖의 인물이 손을 들었다.

'대체 어떻게?'

나를 향해 생글거리는 얼굴.

이젠 표정만 봐도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너, 나한테 빚진 거야.'

유나였다.

유나가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나는 분명 김태민이었을텐데?'

내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맞아, 유나도 한국대 생이었지.'

그리고 한국대 생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나도 그랬고 남동민도 그랬다.

'유나도 그럴 수 있었겠지.'

게다가 정말 유나가 김태민의 쪽지를 뽑았다면..

'김태민은 우리 과 최고의 신비주의 꽃미남. 그렇다면?'

김태민의 쪽지를 원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유나씨였군요. 이주원씨에게 에드워드 호퍼를 추천한 이유가 있습니까?"

유나가 생글거리며 웃었다.

분명 나만 빼고 강의실의 모두가 예쁜 미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주원씨랑 수업이 세 개나 겹쳐서요, 어쩔 수 없이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데 가끔 이주원씨는 우울한 아저씨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저한테는 에드워드 호퍼가 딱 그런 이미지였거든요."

"호퍼가 좀 그렇긴 하죠."

서진석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나가 장난스레 웃었다.

"그래서 우울한 아저씨들끼리 잘 해보라고 에드워드 호퍼를 추천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아저씨끼리 잘 통했나 봐요. 이주원씨는 참 별별 생각을 다 했네요. 고맙다고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강의실 학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유나. 지난 2주 동안 이 순간을 기다리며 혼자 웃었겠지.'

늘 당하는 게 일상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좀 컸다.

나는 창피하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쨌든 아주 좋았습니다. 적절한 추천과 충실한 모작이었습니다. 제가 마니또 게임으로 하고 싶었던 게 정확히 이런 수업이었습니다. 덕분에 전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이주원씨, 한유나씨 두 분다 가산점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 다 팔레트의 유력한 수상 후보입니다."

난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가린 두 손 안에서 슬며시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유나.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도록.'

유나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내게 있었다.

'생각도 못했겠지.'

오늘은 꼭 당한 만큼 돌려줄 것이다.

'아니, 두 배로.'

나는 입꼬리를 진정시키고,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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