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궁금증 □
김태민은 일찍 집에 들어와 자신의 작업실을 정리했다.
그는 외아들이었고, 자신의 집 3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그래서 3층의 방 하나는 자신의 침실, 나머지 방 하나가 그의 작업실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의 아버지인 김용철 작가가 3층으로 올라왔다.
둘은 한 집에 살았지만, 둘 다 작가라서 생활 패턴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종종 며칠씩 얼굴을 못 보기도 했다.
"작업실을 정리하고 있었나 보구나."
"정리가 아니라."
김태민은 자신의 작업실을 훑어봤다.
"작업실을 학교로 옮기려고요. 학교의 공동 작업실을 쓰면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더 많아질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듣고 김용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게 학교 다니는 재미지. 학교는 다닐만한가 보구나."
이번엔 김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인정하긴 싫지만, 아버지 말이 맞았어요."
김태민은 중학생 때부터 미국에서 지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는 한국과 미국을 번갈아 이동하며 지냈었다.
김태민은 대학은 미국에서 다니길 바랐지만, 아버지 김용철의 주장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 일단 한국대를 졸업하고, 다시 외국으로 나가서 학위를 따도록 해. ]
그게 김용철이 생각하는 한국에서 화가로 성공하는 가장 왕도적인 방법이었다.
김용철은 이미 한국에서 가장 손꼽히는 작가였고, 그의 아내는 유명한 큐레이터이자, 미술관 관장이었다.
김태민은 재능뿐만 아니라, 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배경까지 완벽하게 갖고 있었다.
"짐이 많으면 내가 학교로 태워줄까?"
"내일 등교할 때 택시 타면 돼요."
김용철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등교도 제법 꾸준히 하는 모양이었다.
"아, 그리고 미연이한테 연락이 왔었다. 얼마 전에 귀국했다고, 널 꼭 만나고 싶다고 하더구나."
"미연이 누나가요? 바쁜 사람이 왜..."
"한 번 연락해 보거라. 뉴욕에 있을 때 도움 많이 받았다며."
김태민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학교에 집중하고 싶었다.
[에곤 쉴레]
김태민이 그리도록 지시 받은 화가였다.
에곤 쉴레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오스트리아의 천재 화가였다.
물론 죽은 사람.
오래 전에, 그것도 젊은 나이로.
'누굴까? 쉴레를 고른 사람은.'
그런데 누구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김태민은 에곤 쉴레를 잘 알진 못했지만,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서 에곤 쉴레의 그림을 모사하고 싶어졌다.
* * *
난 여전히 정신없이 일과 수업을 병행하며 지냈다.
하루는 학교 복도에서 수진의 단짝인 정화 선배와 마주쳤는데,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
정화 선배는 잠깐 망설이다가 결정을 내렸다.
"시간 괜찮아?"
"그런 것 같아요."
"그래, 너도 알고 있어야겠다."
그리고 정화 선배는 나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실 벌써 아는 이야기였다.
"규오 선배라고 복학생 선배가 하나 있는데. 너도 알잖아. 수진이 성격. 순둥이에다가 남 싫은 소리 하나도 못하고."
역시 그때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선배가 장규오였다.
"수진이는 벌써 몇 번이나 싫다고 말했거든."
'하지만 아마도 아주, 아주 온화하게 말했겠지.'
난 혼자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규오는 선배라는 자신의 위치와 수진의 어설픈 성격을 이용해 여전히 수진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혹시 너한테도 뭐라고 할 까봐. 그래서 너한테 미리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전부터 계속 생각했었거든."
정화 선배는 마치 자신이 수진 선배의 보호자인양 굴었다.
하지만 내게는 둘 다 그냥 어리고 착한 여학생처럼 보였다.
'정작 힘든 건 자기들일 텐데, 나까지 걱정해주다다니.'
"난 괜찮아요. 그보다 수진 선배가 걱정이네요."
"맞아. 그 착한 애가 그렇게 스트레스 받는 거 보면 너무 불쌍해."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해 봤어요?"
"그게..."
정화 선배는 사정을 설명했다.
우리 학교는 같은 학번이라도 나이는 다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각자 따로 노는 서양화과의 특성이라든가, 복학생들 간의 이상한 유대감 등등.
여러 이유로 아무 소용도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 한 번 잘 해보죠."
"응?"
"수진 선배가 즐겁게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적극 도울 게요."
정화 선배가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그 정도쯤이야.
뜬금없이 식판을 들고 있는 수진 선배의 사진이 떠올랐다.
계속 그녀가 그렇게 밥을 잘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직원으로 채용한 김승희씨는 일을 아주 잘 해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너무 오버 스펙이라 꽤 걱정했었는데.'
채용할 때 몇 번 만나고는 그 이후 우린 만날 기회가 없었다.
나는 학교로 바빴고, 그녀는 아이 때문에 바빴다.
'거의 나만큼 바쁜 것 같아.'
바쁘게 사는 것의 전문가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는 사람들은 진짜 대단한 것 같아.'
김승희는 거의 모든 일을 잘했지만,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아줌마 특유의 넉살이었다.
그녀는 손님들과 편하게 이야기했고, 장사 경험이 없는 쇼핑몰 입문자들에게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제공했다.
[ 고객 상담 너무 친절해요. 이모티콘도 서비스로 주시고! 쇼핑몰이 처음이라 제가 잘 모르는 부분까지 세세히 가르쳐주셨어요! ]
[ 수정 반영도 빠르고, 디자인도 마음에 듭니다. 나중에 쇼핑몰 디자인 변경할 때도 원디자인과 계속할 생각입니다. 강추요! ]
덕분에 구매 후기에 줄줄이 칭찬이 올라왔다.
'이건 미처 생각 못한 부분인데...'
내가 회귀자이긴 했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괜찮은 디자인을 만들어 팔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승희 덕분에 알게 되었다.
'손님들은 상품 못지않게 후기를 보고 구매를 결정하는 구나.'
덕분에 매출이 훨씬 늘어난 것 같았다.
'자기 월급의 몇 배를 일해 주는 기분이야.'
난 김승희에게 전화해서 솔직하게 고맙다고 말했다.
"뭘요. 당연한 제 일인 걸요."
당연한 일을 해주니까 고마운 것인지도 몰랐다.
"이쪽 실무 경험은 승희님이 저보다 더 많으실지 모르니까, 제가 놓치는 게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아니에요. 대표님은 잘하고 계세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집에서 이렇게 아이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거든요. 열심히 할게요. 지금은 두 명이 전부지만 우리 회사 금방 클 것 같아요."
날 힐링 시켜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듯 했다.
첫 번째는 애매하게 유나.
두 번째는 어쨌거나 수진 선배.
그리고 세 번째 일 잘하는 승희씨.
'그리고 상조도 빼면 섭섭하지.'
가끔 상조를 생각하면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덕분에 힘들게 일하면서도 생각보다 덜 지치는 것 같았다.
물론 노력상점이라는 사기 능력이 나와 함께 하긴 했다.
* * *
그래도 역시 나를 힐링 해주는 가장 큰 부분은 바로 그림이었다.
남들에겐 과제일지 몰라도 나는 매일 그림 그리는 시간이 제일 기다려졌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나도 인간이니까 4학년쯤 되면 또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그림이 너무 좋았다.
'특히 이번 과제가..'
마음을 비우고 호퍼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은 정말 내게 여러 가지 것들을 깨닫게 했다.
'모작을 하면 화가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서진석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처음에 그냥 멋있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모작을 하다 보니 정말, 눈앞에 오래 전 화가의 내면이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난 그림을 그리기 전에 에드워드 호퍼에 대해 조사했었다.
차가운 도시 풍경.
단절된 사람들.
정제된 공기.
온기 없는 빛을 바라보는 고독한 시선.
다 비슷비슷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 일까?'
난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물론 그 사람들은 전문 평론가고, 난 이제 시작하는 미대생일 뿐이지만....'
설령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번 크리틱 시간에는 내 생각을 한 번 말해보고 싶었다.
'그게 나한테 호퍼를 그리라고 한 사람에 대한 예의겠지? 날 이렇게 관찰하고, 좋은 화가를 소개해줬으니까.'
나도 역시 남자라서 흐뭇하게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대체 누굴까. 혜란이? 지아 누나?'
나는 시간에 쫓기는 일을 할 때는 항상 [ 잡생각 제거]와 [산책] 아이템을 사용했다.
두 아이템은 작업 효율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준다.
마치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엔 그림 그리는 동안 아무 아이템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다는 게...'
그냥 캔버스에 기술적으로 물감만 바르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캔버스를 마주보고 떠오르는 온갖 상념들과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게 그림을 그리는 일 같았다.
'입시 그림을 그릴 땐 몰랐는데.'
호퍼의 그림을 그리면서 그렇게 믿게 되었다.
'좋은 그림은 여러 가지 것들을 떠오르게 하니까.'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엉뚱하게 포항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호퍼의 그림엔 밤 풍경에 혼자 있는 여자들이 자주 등장했다.
'별로 안 닮았는데.'
그래도 어머니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24시간 감자탕집에서 밤 12시까지 일하셨다.
난 새벽 1시 어머니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전화를 드렸다.
"너무 오랜만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바쁜 일 좀 끝나면 포항에 한 번 내려갈게요."
"바쁜데 뭐 하러 와. 차비도 비싸고, 너도 버스타고 다니면 피곤하고. 그냥 전화나 자주 해."
어머니는 언제나 내 위주로 생각하셨다.
'날 힐링 시키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어.'
어머니를 잊고 있었다니.
변명할 말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또 한 번 강렬하게 내 마니또가 궁금해졌다.
'날 효자로 만들다니...'
대체 누굴까.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번에도 어김없이 결전의 날이 밝았다.
* * *
"자, 설레시죠? 이제 두 번째 크리틱이 시작됩니다!"
교수가 제일 설레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솔직히 나도 오늘이 기다려졌다.
'그래서 대체 누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