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마니또 게임 □
"자, 여기 이 모자 안에 각자 자기 이름을 적어 넣으면 됩니다."
머리가 짧은 남학생이 야구 모자를 뺏겼다.
마니또 모작이라는 새로운 수업을 고안해낸 서진석 교수는 약간 들뜬 모양새였다.
'교수 양반, 분명 즐기고 있어...'
평소의 젠틀한 모습이랑 달라 슬며시 웃음이 났다.
나는 연습장을 찢어서 내 이름을 적고 모자 안에 집어넣었다.
"자, 이제 한 명씩 나와서 모자 안의 쪽지를 뽑아주십시오. 자기 쪽지는 알아보겠죠? 자기 건 뽑으면 안 됩니다."
드디어 내 차례.
나는 앞으로 나가 모자 안의 접힌 쪽지들을 내려다봤다.
'어라? 저 하늘색은?'
눈에 익은 하늘색이 있었다.
유나는 내가 카페에서 일하는 동안 카페를 개인 도서관처럼 이용했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유나의 하늘색 노트를 잘 알고 있었다.
유나의 쪽지라 생각하자 그만 반사적으로 손이 가버렸다.
자리에 앉아서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주먹 안에서 쪽지를 펼쳤다.
'역시.'
한유나라는 이름이 똑똑히 적혀 있었다.
'요놈, 잘 걸렸다.'
난 유나랑 친했고, 서로 도움도 많이 주고받았다.
하지만 내가 주로 당하는 입장.
친한 것과 별개로 골탕 먹일 수 있는 기회는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자꾸 웃음이 났다.
유나의 쪽지를 뽑는 순간부터 어느새 나는 서진석 교수의 게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다.
'이렇게 참신하고 즐거운 수업이라니...'
서진석 교수.
역시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유나의 차례.
유나가 앞에 나갔다 와서 자리에 앉는 모습을 슬쩍 훔쳐봤다.
쪽지는 접혀 있었지만, 사인펜으로 쓴 글씨는 뒷면으로 비쳤다.
다만 적힌 글씨는 읽지 못했다.
'내가 아닌 건 확실하군.'
난 연필로 이름을 적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과제에서는 유나로부터 안전하겠군.'
다행이기도 하고, 살짝 아쉽기도 했다.
"자, 모두들 잘 뽑으셨죠. 쪽지는 잘 보관하시기 바랍니다. 24시간 드리겠습니다. 내일 이 시간까지, 자신이 뽑은 사람에 대해 잘 고민해보고 그 학생이 모사해야할 화가를 정해서 제게 문자를 주십시오.
그럼 제가 해당 학생에게 문자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2주 드리겠습니다. 재밌지 않나요?"
"재밌어요!"
대학 교수는 학생에게 수업뿐 아니라 사회생활까지 연습시킨다.
교수가 과제에 대해 재밌냐고 물으면 대답은 정해져 있는 법.
난 솔직히 정말 재미있었지만, 마지못해 대답하는 척 웃어넘겼다.
수업이 끝나고, 서진석 교수가 가방을 챙겨 나갔다.
학생들이 강의실을 슬슬 빠져나갈 때, 남동민이 앞에 나가 외쳤다.
"자, 자! 주목! 내 이름 뽑은 사람, 자수하자! 내가 밥이랑 커피 쏠게!"
이런.
교수가 밤까지 세워가며 만든 과제에 이렇게 정면으로 도전하다니.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은근히 한국대생 다웠다.
'어쩌면 서진석 교수는 이런 가능성도 미리 염두에 뒀을지도..'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결국 그림이 완성되면 화가는 자신을 마주보게 될 것이다.
'하긴 나도. 유나인 줄 알면서 뽑았으니까.'
나도 이제 한국대생이란 사실이 새삼 실감났다.
그때 23살짜리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니까 4수를 해서 들어온 것이었다.
"동민이형! 삼겹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내 월급이 얼만데. 너냐?"
"헤헤헤."
"자, 나가서 이야기하자."
남동민은 4수생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강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그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다 보고 말았다.
내가 본 것은 김태민이었다.
'저 녀석...'
김태민은 약속대로 그날 이후, 빠지지 않고 잘 출석 중이었다.
다만 수업이 지겨웠는지, 연습장 가득히 낙서를 하고 있었다.
굵은 수성사인펜으로.
* * *
그리고 기숙사 방에 돌아왔다.
나는 일과 과제로 정신없이 바쁘니까, 해야 하는 일은 빨리빨리 해치워야 한다.
"유나라..."
서진석 교수는 뽑은 사람에 대해 고민하고, 화가를 정해서 자신에게 문자를 보내라고 했다.
"음.."
난 잠시 유나에 관해 생각했다.
영리하고, 예쁘고, 잘 웃고, 예의바르고.
그게 겉으로 드러난 유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생색내고, 장난치고, 괴롭히고...
'이 녀석 혹시...'
본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상냥하고 예의바른 척 하니까, 평소에 억눌렀던 본 모습을 나에게 쏟아 붓는 걸까?
'뭐, 그렇게 해서 유나가 즐겁게 지낼 수 있다면.'
난 상관없었다.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정말 재미있는 과제였군.'
내가 유나와 친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사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 꽤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지난 생.
난 중년으로 죽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동안 내가 남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본 적은 얼마나 있었을까?'
언제나 나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난 내가 인간관계에서 실패했다고 믿었지.'
그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은 내게 있었던 게 아닐까?
즐겁게 시작했던 과제가 약간 씁쓸해졌다.
자신을 공정하게 마주보는 일은 꽤 힘든 일 같았다.
'음...'
그리고 또 여러 가지를 생각났다.
'유나는 김태민을 뽑았지. 그럼 혹시 유나도 지금 김태민에 대해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을까?'
찌릿.
살짝, 아주 살짝 가슴이 쓰라렸다.
'딸이 남자친구를 데려왔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이런 걸까.'
나는 유나가 모사해야할 화가를 지정해 서진석 교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잡생각 제거]와 [숲 속 산책]을 구매해 머릿속 온갖 복잡한 생각들을 다 씻어버렸다.
* * *
2주 짜리 과제.
낮에는 수업을 듣고, 곧바로 기숙사에 들어가 일을 했다.
틈틈이 고객들과 통화하고, 계속 새 디자인을 만들어 디자인 상점에 등록했다.
그리고 밤에는 학교의 공동 작업실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에드워드 호퍼]
내가 그리도록 지시받은 화가였다.
에드워드 호퍼는 고독하고 가라앉은 그림을 그리는 미국의 남자 화가였다.
물론 오래전에 죽은 사람.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는 아니지만...'
무척 좋아하고 내게 잘 어울리는 화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 나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이 꽤 기분이 좋았다.
'누굴까? 혜란이? 지아 누나?'
물론 남학생일 수도 있었지만, 괜히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면접을 봤다.
원디자인의 첫 직원 채용이었다.
* * *
쇼핑몰 사이트는 얼핏 보면 복잡해 보여도 사실 단순했다.
그리고 시대별로 유행하는 디자인이 정해져 있었다.
쇼핑몰 초창기에는 싸이월드처럼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장식이 많은 사이트가 잘 팔렸다.
그 다음엔 플래시를 이용한 잡지처럼 멋스러운 사이트들이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엔 상품 사진들 자체가 자세하고 화려해지면서 쇼핑몰은 직관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이 선호 받게 되었다.
특히 한 사이트가 인기를 끌면 그 사이트와 유사한 모습을 지닌 사이트들이 일제히 팔려나가곤 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유행한 사이트들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로도코나 스타일 날라 같은 곳들.
당연히 내가 그런 사이트들을 통째로 외우는 것은 아니었고, 대략적인 구조나, 효과를 주는 플래시 코드들을 아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디자인을 찍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 고객과 통화하거나, 사이트를 개별적으로 커스터마이징 하는 것은 내게 굉장한 시간 낭비였다.
그래서 쇼핑몰 주문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서 나는 직원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33세. 주부. 김승희.
몇 명의 이력서를 받았는데 그녀의 경력이 제일 탁월했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 직장을 다니기엔 부담스럽고, 또 가만히 놀 수는 없으니까요."
웹디자이너로 일했던 그녀에게 내가 바라는 업무는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었다.
"새 디자인은 제가 담당하고요, 김승희 님은 고객들의 요구 사항에 맞춰 사이트를 수정해주시면 됩니다."
당연히 재택 근무.
나 역시 아직 사무실을 구할 능력은 없었고, 아이를 기르는 그녀에게도 재택이 훨씬 편했다.
"스무살이시라고요?"
김승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허탈하게 웃었다.
"쇼핑몰 디자인들이 퀄리티가 있고, 또 상품 수량도 많아서 제법 큰 회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1인 회사라니...그리고 학생이시라니. 역시 한국대는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군요."
약간 억울했다.
내 디자인이 탁월한 이유는 내가 한국대 생이라서가 아니라 회귀자였고, 노력 상점이라는 사기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첫 채용을 했다.
물론 그 전에 사업자 등록도 했고.
일도 그림도 순항 중이었다.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는 사람들,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