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첫 주문 □
다시 수업 시간.
김진기 교수가 가리킨 스크린에는 내가 찍은 사진들이 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 작품이라 하기엔, 유나 비중이 너무 큰 것 같은데.'
뭐, 시작은 분명 나였으니까.
'그래, 어디까지나 내 과제에 유나를 끼워준 거지.'
나는 그렇게 합리화하며 대강 넘어가기로 했다.
김진기 교수가 내 과제를 보며 말했다.
"좋네요. 약간 옛날식 감성이긴 한데, 서정적이고 재밌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진보다는 그림 같기도 합니다. 서양화과답네요."
"오올."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은 수진 선배가 내 옆에서 어깨를 툭툭 쳤다.
"음...이 사진은 디테일이 좋아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겠네요. 소품을 잘 활용해서 촬영자의 시선과 감정이 사진 안에서 잘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잘했습니다. 거기다 1학년이 이런 올드한 이미지를 내니까 느낌이 새롭네요. 수고 많았습니다."
성공이었다.
유나까지 함께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자, 1학년 청강생이 이 정도입니다. 오늘 뽑히지 못한 미술대생은 모두 분발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또 하나의 과제가 마무리 되었다.
* * *
그림을 그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고,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다만...'
그런 즐거움에 취해 내가 나태하지 않도록 스스로 단속해야 했다.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웹디자인 책을 빌려서 재빨리 예전 기억을 되찾았다.
그리고 쇼핑몰 디자인 제작에 곧바로 착수했다.
'코인이 너무 쌓였어.'
코인이 쌓였다는 사실이 마치 내가 게을러졌다고 말하는 것 같아 위기감이 느껴졌다.
[ 압축 잠 : 1시간 수면으로 4시간 수면의 효과를 지닙니다.
가격 : 5코인 ]
[ 잡생각 제거 : 처음 떠올린 목적 외에 잡생각을 전부 소거해버립니다.
나는 다시 코인을 쏟아 붇고, 예전의 빡빡한 생활로 돌아갔다.
카페고, 기숙사 방이고 가리지 않고 새벽까지 디자인을 코딩했다.
이따금 한철이 새벽에 잠에서 깨어 내게 감탄했다.
"너는 미대생이 어떻게 나보다 코딩을 잘 하는 것 같냐."
"그런 거 아니야."
내가 하는 코딩은 디자인을 변경하는 HTML과 플래시 스크립트 정도였다.
"그런데 잠은 대체 언제 자는 거야?"
"낮에 조금씩 자고 있어."
나는 하나 둘 만들어지는 상품들을 디자인 판매 사이트에 등록했다.
이미 예전에 유행했던 디자인들이라 성공에는 자신이 있었다.
상품 수만 충분히 확보되면 곧 매출이 펑하고 터질 것 같았다.
'가난에서 풀려나면 어떤 기분일까.'
정말 궁금했다.
지난 생은 어른이 되면서 월급은 올랐지만 가난에서 풀려난 느낌은 평생 느껴보지 못했다.
가난이 습관이 된 느낌.
그 무거운 느낌이 평생 따라 다녔다.
'얼마를 가져야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고 선언 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꼭 그 기분을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기회가 내게 아주 가까이 다가온 지도 몰랐다.
노트북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여러 날을 작업했더니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 전신 스트레칭 : 3코인 ]
하지만 나는 다행히 노력 상점이 있었다.
열심히 일할 수 있단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 * *
자취생인 유나는 함께 밥 먹을 사람이 없으면 그냥 굶는 편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맞으면 같이 학식을 먹곤 했었다.
'딸을 챙겨 먹이는 아버지의 심정이랄까.'
"아, 맞다. 전에 내가 도와준 사진 과제. 그거 결과 어떻게 됐어?"
"어? 사진?"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연기했다.
'물론 고맙긴 하지만, 칭찬 받은 일을 전부 사실대로 말하면.'
유나가 엄청나게 생색낼 게 분명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유나의 행동 패턴은 전부 파악했다.
'고맙긴 하지만, 은혜는 티 나지 않게 조금씩 나눠갚는 걸로.'
이제 유나에게 휘말리지 않는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조금 성장한 기분이었다.
"교수님이 별 말씀 없으셨어?"
"어, 그래. 뭐, 잘했대."
"그래?"
유나는 약간 실망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오전에 수업이 있어서 진동으로 해두고 전화기를 잊고 있었다.
전화를 받자 다짜고짜 질문이 들어왔다.
"원디자인 인가요?"
원디자인?
아차.
내 디자인 판매자 아이디가 원디자인이었다.
"아, 이제 연결됐네. 사이트에 문의 남기고 문자 보내도 답이 없어서요. 쇼핑몰 디자인을 구매하고 싶어서요. 아침부터 계속 전화했잖아요."
"아, 제가 학생이라서요."
나는 급히 사정을 설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의아해하는 유나를 뒤로하고 얼른 컴퓨터실로 달려갔다.
판매자 사이트에 접속하자, 주문이 들어와 있었다.
무려 3개.
'오늘 새벽에 새 디자인을 등록하고 잠깐 눈 붙였는데.'
그런데 새벽부터 지금까지, 그 동안 3개의 주문이 들어온 것이었다.
'드디어 터졌군.'
내가 등록한 디자인의 판매 가격은 20~40만원 사이.
오늘 판매된 세 디자인의 금액 합계는 무려 70만원이었다.
나는 하루에 5시간을 카페에서 일했고, 시급은 2000원이 조금 넘었다.
단 하루 동안 2달치 아르바이트에 육박하는 돈을 번 것이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자 온몸이 짜릿했다.
전생에선 느껴본 적 없던 달콤한 전율이었다.
'사람들이 사업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물론 사업이라 부르기엔 아직 너무 작은 규모였지만.
컴퓨터실에서 나가서 그냥 벤치에 앉아 구매자와 계속 통화를 했다.
디자인 판매는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쇼핑몰마다 약간의 커스터마이징이 필요했고, 그럼 거기에 추가 금액이 붙었다.
'그럼 70만원이 100만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
나는 노트를 꺼내, 구매자가 원하는 수정 사항을 꼬박꼬박 기록했다.
"네, 이 정도 수정이라면 선금을 입금하시면 내일 오전까지 수정된 사이트의 링크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뚝딱 한 건을 해치웠다.
'이제 시작이야.'
그리고 혼자 흐뭇해하고 있는데, 유나가 짜증을 내며 다가왔다.
"뭐야, 밥 먹다가 갑자기."
"유나야. 내일 오후 수업 비는 시간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유나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나를 살폈다.
"사진 과제 도와주기도 했고. 자취생들은 가끔 맛있는 거 먹어야 하잖아."
유나는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유나랑 밥 먹기로 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그 이후 계속 주문이 들어와서 과제할 시간 외에는 계속 일에 매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 * *
그리고 결국 카페는 관두게 되었다.
가능한 오래 일하고 싶었지만, 이젠 정말 시간이 부족했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요."
사장님이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아뇨. 카페 일은 저도 정말 재밌게 했습니다. 유나까지 끌어들여서 정말 편하게 일했는걸요."
"멋도 모르고 카페를 시작해서 매일 후회했어요. 그냥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아이들 말을 들을 걸 그랬나. 그런데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할머니가 될 것 같아서, 무서워서 무작정 시작한 카페였어요."
정말 그럴 것 같았다.
"주원 학생이 일한 지 겨우 몇 달인데, 커피 맛이 달라지고, 카페가 깨끗해지고, 손님도 늘고. 유나 학생까지 와서 시끌벅적하고. 그래서 너무 좋았어요. 카페가 달라지니까, 마치 나까지 다시 사는 기분이에요."
그리고 사장님은 자신의 감사를 증명하려는 듯 믿어지지 않는 금액을 월급으로 건넸다.
"아니, 사장님. 이렇게 까지는."
"아니에요. 받아둬요. 자격 있으니까. 가게를 컨설팅 해줬잖아요. 그냥 큰어머니한테 용돈 받는다 생각해요."
사장님은 부자고, 나는 가난하니까 그냥 감사히 받기로 했다.
같은 금액이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의미는 다를지도 몰랐다.
카페 후임은 유나가 맡을 줄 알았는데, 유나는 거절했다.
"과제다 뭐다 바쁘잖아. 미대생이니까."
"나한테 매일 알바 내놓으라고 그랬잖아."
"그건 그냥 너한테 시비 걸려고."
다행히 학교 앞 카페라서 사람은 금방 구해졌고, 나는 마음 편히 관둘 수 있었다.
유나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공짜 커피가 사라졌어. 너 때문에."
"애초에 공짜 커피가 가능했던 이유가 내 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 * *
정신없이 바빴지만, 나는 바쁠수록 행복해지는 변태였다.
미대생의 과제는 눈 굴리기 같았다.
계속 굴러가면서 끝없이 커졌다.
'나야 디자인과를 한 번 겪어봤지만.'
디자인과에 비하면 서양화과는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심한 1회차 인간들은 서양화과 과제에도 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마 오늘 또 다른 과제가 시작될 것이다.
기초 서양화 1 수업 시간.
"모사는 그림을 익히는 가장 오래된 방법입니다. 특히 대가의 그림을 모사하는 것은 기술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그의 영혼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저도 이 학교를 나왔는데 제가 학교를 다닐 때도 기초 서양화 시간에는 모사를 했습니다. 아마 저를 가르친 교수님도 똑같았겠죠."
지난 번 크리틱이 마음에 들었는지, 서진석 교수는 좀 더 기대에 찬 느낌이었다.
"제가 처음에 말했듯, 이번 학기는 지난 학기들과 다르게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목표입니다.
저는 지난 며칠 간 밤새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더 특별한 모사 수업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마니또 게임'입니다. 마니또 게임 다들 아시죠?"
마니또라...
초등학생 때 한 번 해본 적이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본 단어라, 마니또를 언급하는 서진석 교수가 귀엽게 느껴졌다.
'저 양반이 이번엔 대체 무슨 과제를 내려는 걸까.'
서진석 교수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자, 제가 진행하던 모사 수업은 늘 똑같았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화가를 정해서, 모사하고 그 그림을 크리틱하는 거였죠.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마니또 게임을 해서, 자신이 뽑은 사람이 모작해야 할 화가를 지정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크리틱 시간에 그 화가를 정한 이유와 결과물을 대조해보는 거죠.
물론 게임이니까, 크리틱까지는 자신이 마니또라는 비밀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 여러 직업이 많겠지만, 미대 교수는 정말 즐거운 직업 같았다.
'저런 고민을 밤새서 할 수 있다니.'
내 마음의 소리가 들렸는지 서진석 교수가 과제에 대해 부연 설명했다.
"언제나 내가 아는 자신과 남이 보는 자신은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건 그림에도 적용될 지도 모릅니다.
이 과제의 목적은 바로 그 차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