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부재의 묘사 □
김진기 교수는 사진의 역사에 대해 잠깐 이론을 강의했다.
"사진의 시작은 카메라 옵스..."
등등...
그리고 강의의 끝에 덧붙였다.
"자, 이제 첫 과제를 내겠습니다."
아아아앙...
학생들은 일제히 싫다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김진기 교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우린 보통 대상을 선택하고, 카메라로 직접 대상을 포착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사물을 담는 가장 1차원적이고 원시적인 방법입니다.
전 이번 과제의 이름을 '부재의 묘사'라고 부르겠습니다.
대상을 선정해서 촬영하되 절대 그 대상을 직접 찍으면 안 됩니다. 그 대상이 부재한 상황을 촬영해, 자신이 선정한 대상을 표현해야 합니다."
김진기 교수는 학생들이 잘 이해했는지 잠시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부재의 묘사'입니다. 대상의 선정은 자유입니다. 사진은 한 장이어도 상관없고, 여러 장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제 이메일로 여러분이 촬영한 사진을 보내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과제까지 받고, 첫 번째 사진 수업이 끝났다.
* * *
카페는 순조롭게 손님이 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원두 외에도 이것저것 시도해보았다.
찾아봤더니 카페 운영자를 위한 커뮤니티도 있었고, 질문을 남기면 모두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커뮤니티에서 배운 대로, 냉동 반죽을 사서 빵을 굽기도 하고, 반응이 좋은 수입 캔디를 들여놓기도 했다.
카페는 내게 편하고 즐거운 알바였다.
다만 즐거울수록 나는 조바심이 났다.
나는 편하기보다는 치열하게 살고 싶었으니까.
'이제 충분해.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아.'
원래는 1학기는 카페 알바를 할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어버렸다.
나는 돈을 더 벌고 싶었다.
벌써 생각해둔 일도 있었다.
'원래는 곧바로 사진 쪽 일을 하고 싶었는데.'
아마 당장 사진에 관한 일을 구한다면, 스튜디오 촬영 보조나 포토샵 보정 정도가 한계일 것이다.
'그건 학교 수업이랑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 돈도 되지 않겠지.'
그래서 지난 생에 했던 아르바이트를 다시 하기로 했다.
'지난 생에 실컷 한 일이라, 가능한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래도 이젠 돈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쇼핑몰 디자인 제작.
몇 년 후에는 디자인과 학생들은 대부분 한 번 쯤 해보게 되는 아르바이트가 된다.
나는 학생 시절 때도 했지만, 30살 전후까지 직장에 다니면서도 가끔 그 일을 하곤 했었다.
그만큼 돈도 되고, 시간적으로도 자유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시기별 유행하는 디자인들을 이미 알고 있지.'
디자인 기획만 끝나면 html이나 css로 쇼핑몰 디자인을 구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기술적인 부분들은 일을 시작하면 금방 다시 떠오를 거야.'
그리고 지난 번 인생과는 내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잡생각 제거] 같은 집중력 강화 사기템도 생겼고, 무엇보다 열정이 넘치고 있었다.
'지난 생은 사이트 하나 제작할 때 보름에서 한 달은 걸렸지.'
하지만 이번엔 익숙해지면 3~4일이면 충분해 보였다.
'잘 하면 돈을 쓸어 담을 지도 모르겠는데.'
그래서 카페 첫 월급을 받자마자, 내 돈을 보태 노트북을 장만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카페를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 * *
그 외엔 학교생활은 순조로웠다.
먼저 이형원과 김한철.
만약 같은 방 룸메이트가 아니었다면, 한국대 학생인 것을 믿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러셨어요."
나야 아무 힘없는 1학년이다.
그래도 내게 왜 한마디 의논도 없이 청강생이 되었냐고 물어는 봐야 했다.
"의논하고 싶었지만, 넌 기숙사에 잘 들어오지도 않으니까..."
"맞아. 우린 이렇게라도 해서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네. 그러시겠죠."
"그리고 한철이를 위해서였어. 한철이에게 세상의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맞아. 컴공 교실 본 적 있어? 거긴 시베리아야."
뭐, 둘이 이렇게라도 해서 정말 미대생을 사귈 수 있다면 진심으로 응원해줄 생각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은 좋은 것이니까.
"아무튼 두 사람 다 파이팅입니다."
"고맙다. 친구야."
"그런데, 부재의 묘사는..."
"과제는 각자 힘으로."
그렇게 선을 그었다.
* * *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사진의 이해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나를 포함해 미대생은 일단 모두 어느 정도 관종이다.
그래서 과제에 자신 있는 날은 등교가 기다려졌다.
"작업한 '부재의 묘사'를 월요일까지 제 이메일로 보내세요. 학생 수가 많은 만큼, 괜찮은 작품만 선별해서 수업 시간에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지난 주, 김진기 교수가 낸 과제였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이긴 하지만, 난 사진에 뜻을 품었었고 덕분에 과제에 공을 들였다.
그래서 좋은 평가를 받고 싶었다.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한 사진작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무엇인가, 그렇게 누가 묻는다면, 내일 찍을 사진 중에 하나라고 대답하겠다."
명언을 들려준 김진기 교수는 감동을 음미하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은 사실, 사진작가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에게 해당되겠지요.
그리고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유명한 예술가나 이제 시작인 미대생이나 매일매일 같은 출발점에 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 지루한 이론 수업은 여기까지.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지난 번 내주었던 과제에서 선별된 작품들을 감상하겠습니다."
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내 사진은 과연 '괜찮은 작품'에 뽑힐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잠시 후.
김진기 교수가 노트북을 조작하자, 커다란 화면이 강의실 앞 스크린에 떠올랐다.
"아...."
"맙소사."
나와 정화 선배가 동시에 탄식을 뱉었다.
"어머, 어떡해. 몰라."
그리고 수진 선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스크린에는 수진 선배의 얼굴이 크게 떠올랐다.
수진 선배의 과제인 듯했다.
수진 선배는 깨끗이 먹은 빈 식판을 한 손에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 가득 특유의 반달 눈웃음을 환하게 짓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이 너무 밝고 해맑았다.
강의실 전체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려 김진기 교수가 입을 열었다.
"어휴. 처음엔 이 사진을 보고 이렇게 과제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하려고 뽑았습니다. 부재를 통해, 대상을 표현하라고 했더니, 이것은 그냥 밥이 부재한 식판 사진이잖아요."
학생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수진 선배는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미처 다 가리지 못한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 몰라. 아악."
아마 수진 선배는 급조해서 찍어낸 모양이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미대는 과제가 계속 쌓이니까, 궁지에 몰리면 결국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김진기 교수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처음엔 나쁜 예로 이 사진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계속 보다보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 말에 수진 선배가 얼굴을 가린 손을 조심스레 내렸다.
"처음엔 야단치려고 이 사진을 뽑았는데, 계속 보고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사진 속으로 빨려들더군요. 이렇게 뻔뻔하고 해맑다니. 이 바닥에 오래 살다보면 뻔뻔함이 예술가에게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깨닫게 될 겁니다. 그러니 서양화과 이수진씨는 재능을 타고난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부턴 절대 과제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정화 선배가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 수진 선배의 어깨를 토닥였다.
수진 선배는 창피했겠지만, 강의실 안의 모든 남학생들은 잠시 힐링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사진."
찰칵 소리와 함께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었다.
'어, 저것은?'
본 적이 있는 사진이었다.
바로 형원 선배의 과제였다.
작은 책상 달력.
그런데 달력이 12월이었다.
지금은 4월인데, 11월까지 8장이 뜯어낸 것이었다.
달력 스프링에는 뜯어내다 만 종이부스러기들이 남아 있었다.
"자, 국문과 이형원씨. 일어나서 사진의 의미를 설명해보실까요?"
씨익.
뭔가 여유롭고 얄미운 표정으로 형원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저는 달력을 찢어서 제 결심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자세히 말씀해보시죠."
"저는 국문과 4학년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의 4학년 학생은 취업이다, 진로다 미래에 대한 고민과 불안으로 바쁘고 생각이 많을 시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신춘문예에 등단했고, 덕분에 취업도 결정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달력에 복잡한 일정을 기록하는 것보다는 시원하게 찢어버리고, 남은 1년을 즐겁고 소중하게 만끽하고 싶었습니다. 페이지가 부재한 달력으로 제 마음가짐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놈의 신춘문예...'
발표를 시켰더니 형원 선배는 오늘도 어김없이 미대생들에게 자신을 홍보했다.
"음..."
김진기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가 낸 과제와 살짝 어긋난 점은 있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에 담긴 내용과 사진으로 표현한 방식이 무척 세련되었군요. 역시 신춘문예 등단자라 다른 모양입니다. 앞으로 기대를 갖고 지켜보겠습니다."
형원 선배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는 모두 한 식구라는 형원 선배의 말도 일리가 있는지 몰랐다.
덤 앤 더머의 덤인 줄 알았는데, 성의 없이 찍은 듯한 사진은 뭔가 멋있었다.
김진기 교수는 몇 장의 사진을 더 소개했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드디어.'
그건 내가 찍은 사진이었다.
* * *
며칠 전.
밤 10시 반.
유나가 카운터를 봐주는 사이, 나는 이미 카페의 청소를 마쳤다.
손님도 끊겼고, 카페 밖으로 보이는 거리도 한산했다.
유나는 집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이 앉았던 탁자를 치우려 했다.
"잠깐. 탁자 치우지마. 내 과제로 쓸 거야."
"응?"
나는 부재의 묘사에 관해 유나에게 설명했다.
"그거 2학년 수업 아니야?"
"그렇긴 하지."
"그런데 이 탁자가 어떻게 네 과제가 된다는 건데?"
"잘 들어봐. 어두운 카페가 있어. 한 여자 손님이 혼자서 커피를 마시며, 크로아상을 먹고 책을 읽었어. 그리고 그 손님이 떠나고 빈자리만 남은 거지. 카페 점원인 나는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를 촬영하는 거야.
손님은 떠났지만, 그녀가 앉았던 자리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추측하게 해 주는 거야."
유나는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데 하려면 좀 더 제대로 해보자."
유나는 가방에서 틴트를 꺼내 입술에 발랐다.
그리고 커피 잔에 연하게 입술 자국을 만들었다.
"어때?"
"괜찮은데?"
그리고 카운터에서 푹신한 의자 커버가 씌워진 사장님 의자를 가져왔다.
엔틱한 꽃무늬가 요란한 옛날식 취향이었다.
"이런 촌스런 게 사진 찍으면 더 예뻐 보여."
끄덕끄덕.
나는 재빨리 동의했다.
유나는 잠시 의자에 앉아있다 일어났다.
희미하긴 했지만, 앉았던 자국이 의자 쿠션에 제법 남았다.
"훨씬 낫지?"
"너 좀 대단한 듯."
찰칵, 찰칵.
나는 서둘러 찍었다.
"내가 너무 깨끗하게 먹었다."
그리고 유나는 탁자 위에 빵부스러기를 흘렸다.
"그래도 약간 쓸쓸한 여자를 연출하고 싶은데, 부스러기가 너무 많지 않아?"
"쓸쓸한 여자는 안 흘리고 먹냐?"
아무튼 내가 처음 생각한 그림보다 훨씬 좋았다.
찰칵. 찰칵.
유나는 계속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카페로 비춰질 때 다시 찍어보자."
덕분에 간단하게 생각했던 촬영이 계속 길어졌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부재의 묘사'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