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사진의 이해 □
일주일 전.
나는 사진의 이해 수업을 들으러 강의실로 갔다.
청강을 결심하고 첫 수업이었다.
교수님의 사정으로 첫 강의가 연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의 이해 뿐 아니라, 미술대 교수들은 유명한 작가가 많았다.
그래서 학교 수업 외에도 외부활동이 빈번했다.
"주원아! 여기야! 여기!"
강당식 대형 강의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그녀.
반달 눈웃음과 뽀얀 얼굴을 가진 싱그러운 21살 선배, 이수진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누나라니까."
"네. 누나."
수진 선배 옆에는 그녀의 단짝인 정화 선배가 있었다.
둘 다 동갑으로 서양화과 2학년이었다.
난 그녀에게도 가볍게 인사하고 수진 선배 옆에 앉았다.
'수진 선배는 약간 강아지 같은 사람이야.'
얼굴도 해맑게 강아지 같았고, 하는 행동도 사람을 보면 꼬리부터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유나는...음. 유나도 개과구나.'
같은 개긴 하지만, 수진 선배는 약간 순둥이 고급 귀족견.
'얼굴도 하얗고...'
하지만 유나는 약간 예측 불허, 자기 멋대로, 통제 불능.
'비글이나 시골 잡종견...'
물론 유나도 예쁘긴 했다.
그것도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상당히 예뻤다.
유나는 똑똑한 눈이 반짝거리고, 날씬한 몸이 무척 건강한 느낌.
'제주도 바닷가에서 뛰어 놀아서 그런가..'
유나나 수진 선배를 대하는 내 마음은 아버지가 딸을 대하는 마음과 약간 비슷했다.
어쨌거나 나는 중년의 영혼을 가진 회귀자였으니까.
'음...만약 진짜 두 사람 같은 딸이 있으면 어떨까....'
나는 잠깐 쓸데없고 행복한 상상을 했다.
'유나는 그냥 뭐든지 맡겨두면 알아서 잘 하는 타입. 혼자 공부도 잘 하고,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도 않고. 든든한 딸이겠군.'
그리고 친구와 장난치는 수진 선배를 바라보았다.
'수진 선배는 그냥 보고만 있어도 힐링 되는 딸. 퇴근하고 집에 와서 얼굴 보면 피로가 싹 풀리는 녀석? 아빠, 오늘도 고생하셨어요...이러면서...'
역시 중년의 아재라, 망상도 아재다웠다.
"주원아,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 교양 필수 레포트 때문에."
"너무 열심히 하지 마. 이제 1학년인데."
"네. 알겠습니다."
내 머릿속 망상도 모르고 수진 선배는 내 앞에서 선배 행세를 했다.
사진의 이해는 서양화과뿐만 아니라 미술대 전체가 같이 듣는 수업이었다.
그래서 강의실도 컸고, 학생도 많았다.
게다가 사진의 이해는 수업 내용도 재밌고, 청강생도 잘 받아주기로 유명한 수업이었다.
그래서 수강 신청을 한 미술대 학생들 외에도 다른 학부의 학생들 역시 여럿 와 있었다.
덕분에 큰 강의실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지난주는 미안했습니다."
캐쥬얼 정장을 입은 김진기 교수가 등장했다.
서진석 교수가 신사적인 이미지라면 김진기 교수는 유쾌하고 장난스런 느낌이었다.
김진기 교수는 출석부와 강당을 번갈아 보더니 씨익 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번 학기도 청강생들이 꽤 많은 것 같군요. 아, 이 놈의 인기..."
김진기 교수가 농담처럼 말하자, 학생들이 웃어댔다.
교수와 학생의 사이는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와 약간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교수가 농담을 하면 학생들은 반사적으로 웃어댔다.
"사실 나는 청강생들을 언제나 환영하는 편입니다. 사진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열린 예술입니다.
게다가 다른 과 학생들과 많이 교류할수록 미술대 학생들의 실력은 다양하게 발전하겠지요. 그래도 수업은 잘 진행되어야 하니, 오늘 출석한 학생들까지만 청강생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청강생들 전부 손 들어 보세요."
나를 포함해 여럿이 손을 들었다.
"자, 청강생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서 자기소개를 합니다. 그리고 왜 자기가 이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말해 주세요. 약간은 창피하겠지만, 공짜로 수업을 들으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해야 합니다.
소개가 끝나면 미술대 학생들은 그 청강생이 수업을 들어도 되는지 박수로 의사를 표현해주세요. 박수 소리가 작으면 그 청강생은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뜻밖의 자기소개 시간.
하지만 사진을 배울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창피는 견딜 용의가 있었다.
우르르.
강의실 여기저기서 청강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그때.
"어?"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내가 아는 두 사람이 있었다.
"어떻게 저 사람들이?"
바로 이형원과 김한철이었다.
'이럴 수가...'
며칠 전.
기숙사의 형원 선배가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학교생활이 힘든 것은 없는지.
궁금한 점은 따로 없는지.
선배로서 자기가 도와줄 일은 없는지.
그때 나는 무심코 말해 버리고 말았다.
[ 2학년 수업을 하나 청강할 생각인데, 원래 다른 과 학생들도 많이 와서 듣는다고 하더라고요. ]
'이건 내 실수다.'
이형원과 김한철.
미대를 우즈베키스탄으로 여기는 불순한 남학생들에게 내가 금쪽같은 정보를 흘리고 만 것이었다.
'좀 더 조심했어야 했어.'
나는 고개를 돌려 애써 그들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들은 기숙사 룸메이트.
나는 언제까지나 그들을 외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재밌고 착한 친구들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같이 수업을 듣게 돼서 기대되는 부분도 있었다.
둘이 어떤 황당한 짓을 벌일지...
'엮이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래도 뭔가 살짝 당한 느낌?
'분해. 그리고 불안해.'
"자, 그럼. 청강생들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합니다."
청강생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형원 선배가 앞으로 나섰다.
4학년다운 당당함이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국문과 학생이고, 장래 희망은 기자와 소설가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때론 백 마디 글귀보다 한 장의 사진이 많은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훌륭한 기자가 되기 위해 사진을 배우려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지방 신춘문예에서 수상한 적도 있으니, 혹시 문학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도와드리겠습니다.
국문학과 미술, 분야는 다르지만, 예술가들은 모두 한 식구가 아니겠습니까?"
'웃기시네. 진짜 식구가 되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뒤이어 김한철이 자기를 소개했다.
"저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처리는 컴퓨터 과학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아주 중요한 분야로, 저는 다양한 방식으로 디지털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 수업을 청강하러 왔습니다."
'미친놈. C언어나 배울 것이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그밖에도 몇 명의 청강생이 자신을 소개했지만, 이형원과 김한철이 제일 씩씩하고 뻔뻔했다.
7할이 여학생인 미술대 학생들은 적당한 환호로 그들을 받아주었다.
"매 학기 새로운 청강생들이 올 때마다 그들이 말하는 다양한 이유에 감탄하곤 합니다. 예술가는 모두 한 식구라서...디지털 이미지 처리하기 위해....이번 학기도 재미있는 학생들이 많이 왔군요. 그럼 끝까지 열심히 수업을 들어주길 바랍니다."
결국 형원 선배와 한철은 청강을 허락받고 말았다.
난 원래 서양화 전공이라 무난히 통과.
특히 수진 선배가 큰 소리로 환호까지 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대신 2학년 때 정식으로 수업을 들을 땐 두 배로 잘 해야 합니다."
교수의 당부와 함께 나는 청강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당부하는데, 제 수업은 중간 평가의 조별 과제 비중이 아주 큽니다. 그러니 청강생들은 조별 과제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미리 미술대 학생들과 친해져 두기를 당부 드립니다."
나는 형원 선배와 한철을 재빨리 바라보았다.
그들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저 사람들 조별 과제란 말에 좋아하고 있어. 조별 과제를 좋아하다니!'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무심코 흘린 한 마디를 듣고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역시 한국대 학생의 행동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게다가 형원 선배는 4학년이면서..'
졸업하기 전 마지막 열정을 미대에서 불태우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 * *
그리고 쉬는 시간.
다행히 두 사람은 당장 나를 찾아오진 않았다.
혼자 화장실에 갔다가 손을 씻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그냥 얼굴만 아는 서양화과 복학생 선배였다.
"야, 1학년."
"네?"
"1학년이 왜 이 수업을 들어?"
"그게..."
"너무 나대지마. 알겠지? 내가 너 보고 있을 거야."
그리고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먼저 나가버렸다.
그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저 놈이 그 놈이었나 보군.'
아마 내 생각이 맞을 것이다.
개강하고 나서 가진 술자리에서 얼핏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난 학기에 복학생 한 명이 수진 선배에게 무작정 들이대다 거절당했다고.
수진 선배는 착하고 예뻐서 인기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자주 고백을 받았는데, 그 중 유난히 집착하는 복학생이 한 명 있다고 했다.
'이 수업은 정말 복잡하군.'
앞에는 기숙사 룸메이트, 뒤에는 복학생 스토커가 있었다.
'룸메이트 녀석들은 귀엽기라도 하지.'
복학생 스토커는 답이 없었다.
'사진 수업이라도 편안히 들을 수 있도록 내가 수진 선배를 챙겨주자.'
그렇게 결심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았으니까.'
사회생활을 할 땐, 학생들은 아무 고민 없이 마냥 즐겁게 사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학생이 되자, 학생들 역시 그들만의 고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