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6화 (16/203)

■ 16. 그들의 첫 크리틱(2) □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주원입니다."

"그렇군요. 크리틱이 딱딱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의견이든 자유롭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즐거운 농담으로 크리틱의 분위기를 밝혔으니 유머 가산점을 드리겠습니다."

이럴 수가.

통했다.

나의 아재 개그가 시간을 거슬러 20살 대학생들을 웃겼다.

'솔직히 말하면 개그가 아니라, 그냥 아무 말이나 뱉은 거지만...'

그건 비밀로 하자.

지금 이 순간 난 알고 봤더니 재미있는 친구였다.

이 성취감을 누리고 싶었다.

찌릿.

물론 모두를 웃긴 것은 아니었다.

'괜찮아, 나중에 커피 한 잔 주고, 쿠키 몇 개 사주면 다 해결 될 거야.'

아무튼 다행이었다.

게다가 가산점까지.

'나도 하면 되는 구나. 자신감을 갖자.'

"그리고 다음 차례."

두둥.

드디어 그의 차례였다.

교수들이 붙잡아서 한국에 머물렀다는 천재.

특별해서 결석을 일삼는 그 녀석.

바로 김태민이었다.

김태민은 덤덤하게 앞으로 걸어가 별로 크지 않은 그의 캔버스를 이젤에 걸었다.

일순간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맙소사.'

난 유나가 말했던 '충격'을 곧바로 이해했다.

김태민의 그림이 충격이었다.

'소문은 분명 사실일 거야.'

내가 교수라도 김태민을 잡을 것 같았다.

'이 녀석은 결석할 자격이 있구나.'

그런데 놀란 것은 학생들뿐만이 아닌 듯 했다.

서진석 교수도 한참을 멍하니 그림을 보고 있었다.

고양이.

김태민이 그린 것은 한 마리 고양이였다.

그런데 햇빛을 머금은 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양이의 눈...'

사탕. 유리잔, 구슬, 과일...

사진 같은 재미를 주기 위해 자주 선택받는 소재였다.

하지만 김태민은 고양이의 눈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탁월했다.

그림 속 고양이가 빤히 그림을 보는 우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느릿느릿 김태민이 자기 그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첫 수업에 빠져서 포토 리얼리즘에 관한 설명을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포토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그냥 사진처럼 그리면 되는 줄 알고,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그려보았습니다. 다음부턴 성실하게 수업에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설명이 끝나고도 한동안 강의실은 정적에 묶여 있었다.

"좋군요. 강의에 성실히 나오라고 출석 가산점 드리겠습니다."

서진석 교수의 농담이 통했는지 다시 강의실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덕분에 긴장이 풀렸는지 학생들이 마구 손을 들기 시작했다.

온갖 찬사와 질문이 쏟아졌다.

그런데 내게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다 시끄러. 그냥 저 그림에 집중하고 싶어.'

김태민.

고마웠다.

멋진 그림을 보여줘서.

다시 돌아온 이후, 미대에 가겠다고 결심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난 생부터 차근차근 그림을 배우고 싶던 순간들도 떠올랐다.

'그래, 김태민, 한 번 해보자.'

김태민의 그림은 날 끓어오르게 했다.

뜬금없이 상조도 생각났다.

'알고 봤더니 상조는 인간적인 놈이었어.'

상조는 탁월한 소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상조는 정말 흑백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렸지.'

하지만 김태민에 비하면 상조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김태민이 그린 그림은 실제 이상이었다.

한 마리 고양이를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으로 바꾸어서 캔버스 안에 가두어 놓았다.

'내가 상조한테 너무 심하게 굴었나?'

잠깐 상조한테 사과의 문자를 보내볼까 고민했다.

[ 상조야, 잘 지내? 한국대 수업 듣다가 문득 네가 생각나서 연락한다. 한국대 수업은 매 순간 놀라움의 연속이야. 너랑 이 놀라움을 나누지 못해 정말 아쉬워! 보고 싶다, 친구야! ]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한참을 멍하니 있다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김태민은 자기 그림을 챙겨서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난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시 몇 번의 발표를 거쳐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그나마 김태민 바로 뒤에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후우우...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내 그림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잘 해 보자.'

* * *

지난 3주 동안 나와 동고동락한 그림이었다.

내 자식이기도 하고, 내 분신이기도 했다.

'넌 남동민 그림처럼 매끈하지도 않고, 유나 그림처럼 날카롭지도 않아. 태민이 그림처럼....걔는 일단 빼자. 아무튼 그래도 넌 내 그림이다. 난 네가 좋다. 잘 해보자.'

난 내 그림을 이젤 위에 얹었다.

"오오..."

'어라?'

이 작은 웅성거림.

내 그림에도 살짝 탄성이 들렸다.

'상상 못한 반응...'

서진석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그림을 보고 있었다.

'저 과한 끄덕임은 분명 칭찬의 일종일 텐데?'

살짝 가슴이 쿵쾅거렸다.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느낌이 너무 좋았는지, 발표를 하려는데 떨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나가 생글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저것은 커피 달라는 표정.'

후우우.

그래도 유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계속 붙어 다니며 장난쳤더니, 유나를 보자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발표를 시작했다.

"저도 반짝거리고, 선명하고, 익숙하면서도 자극적인 것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적당한 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직접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진처럼 그리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무엇이 사진을 사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일까? 계속 사진을 찍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서진석 교수가 웃으며 질문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으러 직접 거리로 나갔단 말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잘했습니다. 그림은 발로 뛰면서 그리는 겁니다. 계속 하시죠."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다시 발표를 이어갔다.

난 내 그림을 가리켰다.

내가 그린 그림은 수조 가게 창문에서 찍은 금붕어였다.

"그러다 하루는 거리에 어항을 꺼내놓고 열대어를 파는 가게를 발견했습니다. 그때 화려한 물고기들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보석 같다고. 그래서 그 중에 이 금붕어를 찍었습니다. 금붕어는 색이 선명하고, 반짝거리고, 또 유리 안에 갇혀 있으니까 잘 그려내면 다른 그림들 같은 재미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그린 그림을 바라보았다.

지금 다시 보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축에 속해.'

내가 그렸지만 꽤 잘 그렸다.

교수와 학생들의 시선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이젠 내 기교도 제법 늘어서 정말 살아있는 금붕어 같았다.

물론 남동민이나 김태민의 그림만큼 화려하진 않았다.

그래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애썼는지가 그림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 넌 괜찮아.'

난 마음속으로 내 그림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손을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것저것 질문과 의견을 말했다.

좋은 반응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할수록 나는 더 자신감이 생겼다.

번쩍.

그때 한 명이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유나..'

그런데 또 그 표정이었다.

장난치기 전 생글거리는 얼굴.

'복수를 하려는 걸까.

살짝 긴장이 흘렀다.

"네, 한유나씨 말씀하시죠."

교수가 지목하자, 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붕어가 헤엄치는 모습이 무척 동적인데요. 마치 방향을 바꾸는 순간처럼 보여요. 일부러 그런 순간을 포착한 건가요?"

후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방향을 바꿔서 새로운 방향으로 막 헤엄치려는 순간입니다."

"왜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유나의 질문을 따라 서진석 교수도 나를 바라보았다.

"계속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사진 안에는 시간이 들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우린 사진을 보면 무심코 그 사진 이후의 장면을 기대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포토 리얼리즘의 그림 속 사물들은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 괴리에서 우린 감동은 느끼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괴리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막 움직이려는 시점의 금붕어를 그렸군요."

"네. 맞습니다."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커다랗게 서진석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습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아주 잘 봤습니다. 재미있는 그림과 참신한 발상, 진지한 고민, 모두 다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림의 감춰진 시도를 발견한 한유나씨도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두 분다 대단합니다!"

'유나, 이 녀석.'

적절한 질문으로 서진석 교수의 칭찬까지 끌어냈다.

역시 유나는 영리했다.

'고맙긴 한데...'

분명 이걸로 또 한동안 나를 우려먹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역시 유나밖에 없었다.

'난 소주를 먹였는데...나한테는 칭찬을 먹여주는 군.'

그렇게 뜻밖의 칭찬과 함께 내 차례도 끝났다.

이제 수업을 마칠 시간이었다.

"오늘 재미있는 그림을 많이 봤습니다. 어떻게 보면 극사실주의 그림을 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기간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잘해주었습니다. 특히 몇몇 그림은 아주 수준이 높았습니다. 올해 1학년들은 뭔가 특별해 보이는 군요."

과제를 열심히 한 학생들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마치 내가 그 특별한 학생입니다, 그런 표정이었다.

"그럼, 오늘의 1위를 발표하겠습니다."

누굴까? 김태민? 유나? 남동민?

나는 유나에게 한 표를 걸었다.

남동민은 잘 그렸지만 재미없는 그림이었고, 김태민은 포토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그냥 김태민의 그림이었다.

'유나의 그림이 제일 영리했어.'

난 슬쩍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는 교수가 들고 있는 유화 붓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 공짜를 너무 좋아해.'

"1위를 발표하기 전에 먼저 1위를 선정한 이유를 먼저 말하겠습니다.

일단 세상에는 그림이 너무 많습니다. 성공한 화가 외에는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데도,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화가가 되려고 애쓰는지.

덕분에 화가로 살아남으려면 악착같이 노력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장 훌륭한 화가의 조건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근성이라고."

설마? 설마?

뭔가 느낌이 왔다.

그리고 설마가 현실이 되었다.

"오늘 이 강의실에서 훌륭한 그림을 몇 개 봤습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은 바로 이주원씨가 그린 금붕어입니다. 이주원씨는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직접 발로 뛰었습니다. 작업실을 벗어나 밖으로 나갔지요. 그리고 그 열정이 그대로 그림에 담겼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재밌고 즐거운 그림이 나왔습니다.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겁니다. 이주원씨, 3주 동안 수고했습니다. 덕분에 제가 아주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와서 붓을 받아가세요."

서진석 교수는 나를 향해 붓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박수.

그 중 한 명이 유난히 요란하게 손뼉 쳤는데, 안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 붓은 노력상이야.'

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김태민, 한유나.

거기에 남동민까지.

나는 아직 절대 1위가 아니었다.

별로 비싸진 않을 것 같은 붓.

그렇지만 내게 이 붓은 다짐의 표시였다.

'다음에는 노력상이 아니라, 진짜 실력으로 상을 받자.'

그리고 또 하나 결심했다.

'그래, 오늘은 유나에게 꼭 쿠키를 대접하자.'

어차피 내가 자발적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자기가 생색내면서 뺏어갈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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