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그들의 첫 크리틱(1) □
"자, 설레죠?"
서진석 교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미대생이 되고 첫 크리틱입니다. 크리틱이 처음이 아닌 사람도 보이지만, 대부분 낙제생일테니 처음이나 마찬가지겠군요."
크리틱이란 교수와 학생들이 서로의 그림에 대해 자유롭게 비평하고 토론하는 수업을 말한다.
생각하기에 따라 굉장히 즐겁고 재미있는 수업이었다.
물론 과제를 잘 준비했을 때 한정이다.
"그림을 잘 그려온 사람도 높은 점수를 받겠지만, 크리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높은 점수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림이 재미있으면 질문이나 의견도 많겠지요? 다른 학생의 크리틱 참여 빈도도 그림의 평가에 포함시키겠습니다."
사실 미술대에 학점이나 평가는 큰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른다.
학생의 예술관이 교수의 예술관과 다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소소한 점수 매기기는 수업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제 수업의 전통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는 사람은 아실 텐데요."
서진석 교수는 작은 호수의 유화용 붓 하나를 꺼내서 보여줬다.
"오늘 발표한 그림 중 제가 주관적으로 1위를 매겨서 상품으로 이 붓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그래도 바람직한 서양화과 학생이라면, 붓을 타기 위해 최선을 다 해주리라 믿습니다."
유화용 붓의 가격은 그리 비싸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가 상품을 걸자, 학생들은 눈을 반짝였다.
"자, 어느 분부터 시작하실까요?"
동기 중 하나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저 친구는?'
1학년이 모인 술자리에서 자신이 김태민을 이겨보겠다고 장담하던 26살짜리 장수 신입생이었다.
'이름이...뭐였더라....'
세상에 외울 게 많은데 굳이 시끄러운 남학생의 이름은 외울 필요가 없는 법이었다.
난 그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의 이름은 남동민.
한국대에 오기 전에도 꽤 괜찮은 인서울 미대에 다니고 있었고, 강남의 대형 미술학원에서 벌써 전임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강사를 하며 다시 수능을 봐서 한국대에 입학한 것이었다.
미대 입시에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자기 월급이 200만원이라고 그날 시끄럽게 자랑했었지...'
미술 학원 쪽은 실력이 우선이라 나이가 어려도 전임 강사가 되기도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태민을 이겨보겠다고 호기를 부릴 만 했다.
"오, 용기가 있어서 좋군요. 그럼 시작해 봅시다."
서진석 교수가 말을 마치자, 남동민은 당당하게 자신의 그림을 가져와 앞에다 걸었다.
그림 속에는 두 개의 유리잔이 있고, 잔 안에는 과일과 사탕들이 예쁘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반짝 거리는 은색 스테인리스 커피포트가 보였다.
"와아..."
정말 사진 같았다.
꽤 잘 그린 그림이라, 그림을 걸자 학생들이 작은 탄성을 뱉었다.
남동민은 자신감 담긴 웃음을 지었다.
"저는 유리잔에 담긴 과일과 사탕을 그렸습니다. 포토 리얼리즘의 그림의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선명한 색감과 표면에 반사되는 빛을 표현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곧바로 이어진 질문 타임.
학생들은 그린 방식이나, 후기 등을 질문했다.
그런데 남동민은 자신의 실기력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 좀 거들먹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저 같은 경우는 시간은 별로 걸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내가 이걸 왜 그려야 하지 싶었는데, 똑같이 그리다보니 재밌기도 했고요, 이번 기회에 포토 리얼리즘에 관심을 갖고, 몇 번 더 그려볼까 생각중입니다.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서요."
서진석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잘 봤습니다. 그럼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남동민씨는 그림에 쓰인 사진을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사진이요? 구글에서 찾았습니다."
"그렇군요. 구글이요. 음, 그렇다면 저 사진들을 고른 이유는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포토 리얼리즘 작품들도 저런 소재를 많이 택하길래, 그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맞습니다. 유리잔, 사탕, 과일..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그림이 많지요. 그럼 하나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세상에 이미 비슷한 소재를 택한 포토 리얼리즘 그림이 많은데, 굳이 남동민씨의 그림이 하나 더 있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그건.. 제 그림이 왜 있어야 하냐면..."
"남동민씨의 그림이 다른 작품들보다 더 사진 같은가요?"
"그..그건..아니지만..."
남동민 역시 실력이 뛰어나겠지만, 아직 유명한 포토 리얼리즘 화가들만큼은 아닐 것이다.
항상 사람 좋게 웃던 서진석 교수가 날카롭게 질문하자 남동민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남동민씨, 그럼 하나의 그림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에는 어떤 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교라든가,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메시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 남동민씨의 그림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있죠?"
서진석 교수는 다그치듯 질문한 게 아니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처럼 조용조용 질문했다.
잠시 머뭇거린 남동민이 대답했다.
"모든 게 골고루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사진처럼 잘 그렸고, 소재의 색감과 인상을 충분히 살렸고...또....예.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좋은 그림 잘 봤습니다."
그렇게 남동민의 발표가 끝났다.
남동민은 조금 빨개진 얼굴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발표.
드디어 익숙한 얼굴의 차례가 되었다.
바로 한유나였다.
유나는 나와 같은 현역 합격생이었다.
'현역으로 들어왔다면...'
그 말은 둘 중 하나다.
그림 실력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그림 실력도 뛰어나고 수능도 잘 봤거나.
'유나가 좀 똑똑하긴 하지. 그렇긴 한데...'
아무튼 유나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난 의리상 질문 하나 정도는 해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유나의 발표를 유심히 들어야 했다.
유나가 그림을 걸자, 학생들 사이에서 오호...하는 작은 탄성이 들렸다.
"오호..."
나도 탄성을 뱉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과연 유나는 현역으로 단번에 합격할 만했다.
'상당한 실력이네..'
유나는 언제나 장난치기 좋아하는 개구쟁이였다.
그런데 그림만큼은 절대 장난이 아니었다.
유나의 그림은 상당히 뛰어나서 뻔뻔하게 공짜 커피를 요구하던 모습과 잘 매치되지 않았다.
"저는 포토 리얼리즘의 재미가 충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소재들을 다루지만,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사물을 접할 때 우린 시각적인 충격을 경험합니다."
끄덕끄덕.
유나의 발표를 들으며 서진석 교수가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유나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사진 같은 그림을 보게 되면 관객들은 일단 충격을 받게 된다.
"저는 그래서 그 충격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린 그림을 접하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물을 떠올리고 기억과 그림을 비교하며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없는 사물이라면 어떻게 될까? 사진과 똑같이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비교할 대상이 없는 사물이라면 충격은 어떤 모습을 지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유나가 그린 그림은 깨어진 소주병이었다.
유리병이 깨지는 모양은 매번 다르니까, 완전히 일치하는 기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유나는 능숙한 솜씨로 깨진 소주병을 그려서 사진처럼 생생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뭐랄까, 굉장히 잘 그렸으면서도 애매하고, 계속 시선을 붙잡는 느낌이야. 이런 걸 매력이라고 불러야 할까?'
남동민의 그림이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포토 리얼리즘과는 살짝 느낌이 달랐다.
멍하니 그림을 보고 있는데, 서진석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재미있는 의견입니다. 굉장히 새로운 시도이기도 하고요. 아주 좋습니다. 1학년 수업에서 이렇게 흥미로운 발상을 접할 줄은 몰랐네요. 제가 방심하다 한 방 맞은 기분입니다."
서진석 교수가 격하게 유나를 칭찬했다.
교수가 그렇게 분위기를 띄우자, 학생들이 앞 다퉈 질문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마치 맛있는 식탁에 숟가락을 걸치는 느낌이었다.
난 위기감을 느꼈다.
'의리상 질문하나 해주려고 했더니, 이러면 내가 끼어들 틈이 없잖아.'
유나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학생들의 질문 공세에 여유롭게 대답했다.
'저건 커피 달라고 할 때 표정인데...'
유나의 진면목을 아는 나는 살짝 가증스러울 정도였다.
나올만한 질문이 다 나와 버려서 나는 머리를 굴리며 질문거리를 생각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김태민이었다.
'저 녀석...'
김태민은 정말 소문처럼 잘생겼었다.
그리고 뭔가 특별해서 지각과 결석을 밥 먹듯 했다.
결석인 줄 알았다가도 쉬는 시간에 슬쩍 와서 자리에 앉아 있곤 했다.
게다가 김태민은 공동 작업실을 쓰지 않았다.
자기 개인 작업실이 있어서 그곳에서 혼자 그린다고 했다.
'부르주아 녀석...'
그리고 오늘도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어느새 뒤에 앉아 있다가 처음으로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녀석은 천재, 나는 둔재.'
우린 애초에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혼자 긴장해서 녀석의 질문에 귀를 기울였다.
"네."
유나가 상냥하게 김태민을 지목했다.
"깨진 소주병의 날카로운 부분들을 강조해서 그린 것 같은데, 그것은 의도적인 겁니까? 만약 의도라면 어떤 의도인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차분한 말투였지만, 그럴듯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자, 유나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네, 정확히 보셨습니다. 전 앞서 말했듯 포토 리얼리즘의 일차적인 재미가 바로 충격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각적인 충격을 줄 수 있는 공격적인 요소가 없을까 고민하다, 깨진 소주병의 날카로운 부분들을 강조해서 그려보았습니다."
"오호, 대단하군요. 유나씨의 발상도 재밌고, 그걸 발견한 사람도 대단합니다. 가산점을 드려야 하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서진석 교수는 항상 학생들에게도 경어를 사용했다.
"김태민입니다."
두둥.
그 순간 서진석 교수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서진석 교수 역시 천재 김태민의 소문을 아는 게 분명했다.
'교수들마저 다 아는 학생이라니..'
나는 강렬한 질투를 느꼈다.
거기다 예리하고 멋있는 질문까지.
'내가 그런 질문을 했어야 하는데...'
아깝고 부러웠다.
"자, 한유나씨 그림 잘 봤습니다. 그럼 더 이상 질문이 없으면 다음 그림을..."
찌릿.
기분 탓일까?
난 유나가 나를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나는 충분히 많은 칭찬과 질문을 받았다.
그래도 역시 커피 동맹의 의리상 나도 뭔가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야 안전할 것 같았다.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손을 들었다.
"질문이 또 있었군요. 말씀 하시죠."
유나가 생글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매일 내게 공짜 커피를 요구할 때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런데 적절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걸 던져도 되는 걸까.
"그...그게..."
"네에."
"소주병을 그리셨는데, 내용물은 본인이 드셨나요?"
"...."
유나와 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행히 강의실 전부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