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카페 알바를 하는 이유 □
과연 커피 맛을 본 유나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난 구름 커피의 커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절대 내 솜씨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야."
"다행이다. 난 네가 날 싫어해서 커피에 무슨 짓을 한 줄 알았어."
그날 이후 유나는 매일 저녁 카페로 찾아왔다.
알고 봤더니 우린 수업을 세 개나 같이 듣고 있어서 이야기할 게 무척 많았다.
"넌 사실 엄청난 천재가 아닐까?"
"또 무슨 소리야?"
"자기 일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잖아."
회귀자가 자기 일 말고, 대학 신입생들에게 신경 쓰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나저나 넌 이 맛없는 커피를 마시려고 용케 매일 오는구나."
"공짜니까. 빈 테이블도 있고."
그래도 유나가 있어서 무척 편했다.
같은 과니까,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좋았다.
이제까지는 항상 혼자 고민하고, 혼자 작전을 짰는데 든든한 조언자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직접 사진을 찍고 있다고?"
"응. 기교에 자신이 없으니까, 소재로 보완하려고."
"서둘러야 할 거야. 사진처럼 그리는 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더라고"
그리고 내가 카페를 청소할 때 대신 카운터를 봐주기도 했다.
유나는 솜씨가 좋아서 커피 내리는 것과 거품 만드는 것도 금방 배웠다.
"내가 이곳에서 일했어야 했어."
"더 재빨리 움직였어야지."
"네가 사라지면 내게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나는 우유 거품을 연습하고, 틈틈이 라떼 아트도 연습했는데 잠깐 연습한 유나가 나보다 훨씬 잘 그렸다.
"이걸 구름 사장님께 보여드리고, 다시 생각해보시라고 말씀드리자."
"넌 이제 출입금지야. 내일부터 돈 내고 마셔."
유나는 이제 수업을 마치면 카페로 출근해서 당당하게 커피를 받아내고 테이블에 앉아서 레포트까지 쓰고 들어갔다.
손님이 없는 카페가 유나의 개인 도서관이 된 듯 했다.
* * *
구름 커피는 카페 재료상 한 곳에서 모든 원두와 시럽, 소모품 일체를 정기적으로 공급받고 있었다.
보통은 내가 없는 시간에 오는데, 하루는 일정이 늦었는지 내가 있는 시간에 찾아왔다.
나는 입고된 물품을 확인하고, 전표를 받았다.
나는 납품 온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그런데 여기 원두는 괜찮은 건가요?"
"왜 그러시죠?"
"향은 약하고 맛은 써요. 손님들도 항의하고요."
그러자 직원이 얼굴을 찌푸렸다.
"원두는 좋은 거예요."
"거래하는 다른 카페들도 이 원두를 받나요?"
"종류야 여러 가지지만, 이 원두도 괜찮은 거예요. 이 원두 쓰는 카페도 몇 군데 있어요."
"다른 원두들 가격표 같은 걸 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직원이 약간 짜증스럽게 말했다.
"다음에 올 때 가져다 드릴게요. 그런데요."
"네."
"아마 알바생이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 카페는 규모가 작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작은 주문도 전부 배달해주고, 원두도 가격 맞춰주고 그러기가 쉽지가 않아요. 우리가 이 가게 많이 챙겨드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번 사장님부터 지금까지 계속 거래하고 있는 거고요."
사장들이 가만히 있는데, 알바가 왜 나서냐는 말투였다.
'하지만 사장들이 너무 가만히 있었어.'
한명은 가게를 팔고 떠났고, 구름 커피는 손님이 계속 줄고 있었다.
난 단순히 가격을 알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짜증을 내니까 더 수상했다.
"여기 컵이랑 홀더에 카페 로고 찍어드리잖아요. 이것도 원래 이렇게 작은 수량으로는 안 해드리는 거예요."
"그렇군요. 그래도 다음에 오실 때 원두 가격표는 가져다주세요."
도매 직원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나가버렸다.
내가 어려서 더 함부로 구는 것 같았다.
'어린 것도 가끔 불편하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유나에게 내 계획을 말했다.
"커피가 맛있다고 소문난 카페들을 찾아다니면서, 커피를 맛보고 괜찮은 로스팅 업체를 찾아볼 생각이야."
"언제부터 갈까?"
"너도 가게?"
"너 혼자 커피 다 마시면 손 떨려서 그림 못 그릴걸?"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포토 리얼리즘은 붓자국 하나까지 지우며 그리는 세밀한 화법이었다.
'안 그래도 솜씨가 딸리는데 손까지 떨면...'
"내가 도와줄게. 대신 커피 값은 다 네가 내는 거야."
유나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너 입학하고 돈 내고 커피 마신 적은 있어?"
"한두 번? 그런데 앞으로는 없을 거야."
유나의 강렬한 의지가 전해졌다.
나는 어느새 그녀의 카페인 담당이 된 듯 했다.
* * *
일부러 다른 동네 카페들을 찾아다녔다.
검색해서 위치를 알고 가도, 작은 골목 카페들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커피향이 기가 막힌 곳을 찾았다.
우린 커피를 맛보고, 로스팅한 원두를 어디서 공급받는지 물었다.
다행히 카페 사장도 우릴 좋게 본 모양이었다.
"열심이네요. 부모님이 카페를 하세요?"
"아뇨. 알바하고 있는 카페인데요. 원두를 좀 바꾸면 어떨까 싶어서요."
"아니, 알바생이 원두를 찾아다닌다고요?"
사장은 우릴 신기하게 쳐다봤다.
"세상에 이런 알바생이 있는 줄 알았다면 내가 뽑았을 텐데."
그리고 자기가 거래하는 로스팅 업체를 가르쳐주었다.
"나도 카페 창업할 때 여러 군데 알아보고 여길 찾았거든요. 한 번 직접 가 봐요. 사장님도 젊고, 원두도 훌륭해요. 손님들 반응도 좋고요."
물론 나나 유나나 둘 다 그렇게 고급스런 입은 아니었다.
'유나야 이제 고3 마치고 온 거지만, 난 한 번 살다 왔는데 입맛이 이렇게 싸구려라니.'
살짝 슬프기도 했지만, 어쨌든 드디어 맘에 드는 곳을 찾았다.
* * *
유나와 나는 의정부까지 로스팅 공방을 직접 찾아갔다.
"아..."
유나가 탄식을 뱉었다.
로스팅 공방에 가까워질수록 코가 얼얼할 만큼 커피향이 났다.
"매일 이 커피를 마실 생각을 하니까 너무 좋아."
이제 유나는 친구 한 잔을 자신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있었다.
"멀리서 오셨네요. 의정부까지."
로스팅 공방의 사장은 우리에게 신선한 커피를 한 잔씩 건넸다.
'과연...'
구름 커피에서 늘 먹던 커피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우리 카페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두를 대량으로 로스팅하고 시간이 지체되면 생두의 품질이 좋아도 향이 날아갈 수 있어요."
그리고 사장은 몇 가지 샘플 블렌드를 맛보여 주었다.
"우린 지방 카페와도 거래를 많이 해요. 매일 로스팅해서 소량으로 택배를 보내면, 보통은 다음날 도착하니까요."
생각 외로 가격차이는 크지 않았다.
거기에 매일 부담해야 하는 택배비 정도가 추가되었다.
하지만 하루 아메리카노 서너 잔을 더 팔면 만회되는 금액이었다.
충분히 투자 할만 했다.
'구름 커피는 장소가 좋아. 전국에서 제일 커피에 허덕이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동네지. 커피만 맛있으면 본전은 금방 찾을 거야..'
로스팅 공방 사장이 우릴 배웅하며 말했다.
"사실 주문양은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이 일이 좋아서 하는 거니까요. 꾸준하게만 거래해준다면 가격 같은 것은 다시 조정해드릴 수도 있어요."
그렇게 사장과 약속하고 로스팅한 원두를 종류별로 구매해서 돌아왔다.
이제 구름 커피의 사장님을 설득하는 일만 남았다.
* * *
내가 가져온 커피를 맛본 사장님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커피가 맛있네요. 덜 쓰고, 향도 좋고, 살짝 단맛도 나고. 의정부까지 갔다 왔다니 고생했어요."
"저도 의정부까지 같이 갔어요."
옆에 있던 유나가 끼어들었다.
하도 자주 와서 이제 사장님도 유나를 알고 있었다.
"내가 혼자서 카페를 하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커피 맛도 신경을 못 썼네요. 카페 인수할 때 소개받은 곳에서 계속 바꿀 생각을 못했어요."
"장사가 처음이시니까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네?"
사장님이 망설이다 말했다.
"지금 도매업체가 모든 재료를 한꺼번에 배송해주고 있어요. 안 그래도 주문량이 많지 않은데 원두를 빼버리면...나머지 소모품들은..."
확실히 사장님은 장사를 할 분이 아닌 것 같았다.
난 내가 미리 뽑아둔 리스트를 사장님께 건넸다.
"제가 카페 재료 쇼핑몰들을 다 뒤져봤습니다. 소모품들을 일괄적으로 구매하는 것보다 종류별로 따로 구매하는 게 더 싸게 먹힙니다. 물론 한 번에 많이 사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조금 번거롭긴 하겠지만 굳이 도매상 눈치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장님은 내가 건넨 리스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러네요. 언제 이런 조사까지.."
"그리고 이 잔."
나는 카페에서 쓰는 잔들을 가리켰다.
구름 커피의 로고가 박힌 잔들은 전부 재료상에서 일괄 배송된 것들이었다.
"다른 카페에서 쓰는 잔들보다 조금씩 크더라고요."
"그래요?"
"네. 저랑 유나가 카페들마다 돌아다니면서 비교해봤습니다. 우리 잔이 제일 컸습니다. 잔이 크니까 그 만큼 아메리카노는 연해지고, 라떼는 우유를 많이 넣게 됩니다. 커피는 맛이 없어지고요."
커피 맛을 결정하는 요인은 이것 말고도 아주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사장님은 둘 다 초보였다.
그러니 쉬운 것부터 개선하면 될 것 같았다.
결국 사장님은 원두 공급처와 소모품 구입처를 전부 바꾸기로 결정했다.
"열심히 해줘서 너무 고마워요. 내가 아르바이트생을 너무 잘 뽑은 것 같아."
"저도 의정부 같이 갔어요."
내 자리를 노리는 유나는 계속해서 끼어들었다.
* * *
"어? 카페 냄새가 너무 좋아졌어요."
커피를 사러 온 단골들마다 전부 똑같은 말을 건넸다.
원두를 바꿨더니 카페에 진한 커피향이 가득했다.
"맛도 더 좋아졌을 걸요?"
"진짜 그러네요"
전에 커피에서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는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커피를 맛보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어요. 잘 마실게요."
단골들이 좋아하니, 나도 꽤 뿌듯했다.
이런 게 카페를 운영하는 재미인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그냥 아르바이트에 불과했다.
"어이구. 네가 왜 편한 알바 다 놔두고 카페 알바 하는지 알겠다."
여자 손님이 나가자 어두운 카페 구석에서 유나가 날 비웃고 있었다.
* * *
카페를 마치면 나는 학교 작업실에 가서 새벽까지 그림을 그렸다.
사진을 직접 찍느라 늦게 시작했고, 또 손이 느린 만큼 부지런히 그려야 했다.
요새 입시가 끝났더니 코인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래서 [ 잡생각 제거 ], [ 밝은 눈 마사지 ]를 아낌없이 구매해 그림에 쏟아 부었다.
당분간 산책은 [숲속 산책]대신 [바닷가 산책]만 구매했다.
'그놈의 바닷가 출신.'
유나가 하도 바다, 바다 노래를 해서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덤으로 [ 엉덩이 축소 ] 까지.
아재라도 엉덩이가 중요한 것은 잘 알고 있으니까.
엉덩이는 남자의 영혼이며 생명이다.
청바지를 입든, 정장을 입든, 모든 것은 엉덩이가 결정했다.
그리고 드디어 3주.
포토 리얼리즘으로 그리기.
첫 평가의 날이 밝았다.